(~~ 제29강에서 계속)
여러분들은 한국사람으로서 자기 민족의 역사를 알아야 됩니다,
자기의 정통성 뿌리를 알아야 하지만 거기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내세우지 않아야 됩니다.
이 뿌리가 없으면 자기가 해체되고 중심이 없어집니다.
그것을 가지고 세계에 나가 흑인과 백인과 일본 사람과 중국 사람과 거리낌 없이 논의해야 되고
조계종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천태종이나 다른 종파와 더불어서 그들을 존중해야 하고,
불교의 전통을 가지고 기독교와 천주교와 다른 종교인들을 존중해야 됩니다.
대사께서는 개원(改元) 원년 계축년 8월 3일 국은사에서 공양을 마치시고 문도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각기 제자리에 앉아라. 내 이제 너희들과 작별하고자 한다.”
이때 법해가 말씀드렸다.
“화상께서는 어떤 교법을 머물게 하시어 후대의 미혹한 사람들로 하여금 불성을 보게 하십니까?”
대사가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자세히 듣거라.
후대의 미혹한 사람이 만약 중생을 알면 곧 이것이 불성을 본 것이거니와
중생을 알지 못하면 만겁을 두고 불(佛)을 찾아도 만나기 어려우니라.
나는 이제 너희들로 하여금 자심(自心) 중생을 알아 자심 불성을 보게 하는 것이니
불을 보고자 할진대 다만 중생을 알라.
다만 중생이 불을 미혹케 한 것이요, 불이 중생을 미혹하게 한 것이 아니니,
자성을 깨달으면 중생이 바로 불이요, 자성이 미혹하면 불이 중생이니라.
중생을 알아야 부처를 아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중생의 어리석음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음이 어리석은 줄 알 때 거기에 깨달음의 길이 있다,
자기 마음의 어리석음을 알면 바로 불성을 보게 되는 것이니 자기의 어리석음을 알아라,
중생 즉 어리석은 생각이 우리의 본성을 미혹케 한거지 우리의 본성이 미혹을 일으킨 게 아니다,
자기 마음의 본분을 깨달으면 중생이 바로 불이요 자기 본분을 알지 못하면 불이 중생이니라.
자성이 평등하면 중생이 바로 불이요, 자성이 삿되고 험하면 불이 바로 중생이니
저희들의 마음이 만약 험하고 굽으면 곧 불이 중생 속에 있는 것이요,
한 생각 평등하고 곧으면 곧 중생의 성불이니라.
내 마음에 스스로 불이 있나니 이 자불(自佛)이 참부처이니라.
만약 자기에게 불심이 없다면 어디에서 참부처를 구할 것인가!
너희들의 자심이 바로 불이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
내 마음 떠나서 따로 부처를 구하지 마라, 내 마음 깨달으면 부처다,
이 세상의 온갖 고뇌를 받고 갖가지 재앙을 받는 건 내 마음이 어리석어서 그렇다,
어리석은 자기를 깨닫는 게 해탈의 길이고 참 부처의 길이지 따로 진리가 있는 게 아니다,
이렇게 간곡하게, 이 경 전체를 통해서 반복해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법문 들을 때만 잠시고 또 밖을 구합니다.
밖으로는 결코 한 물건도 세울 것이 없으니, 만 가지 법은 모두 다 본심이 내는 것이니라.
그러기에 경에 이르기를, <마음이 생하면 종종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종종 법이 없어진다>고 하였느니라.
내가 지금 한 게송을 남기고 너희들과 더불어 작별하리니 이름을 자성진불게(自性眞佛偈)니라.
후대의 사람이 이 게송의 뜻을 알면 곧 본심을 보아 스스로 불도를 이루리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근본 가르침이나 대승불교의 가르침이나 선의 근본 종지는 같은 것인데,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경전에 집착해 자기 멋대로 해석한 소승의 갖가지 문장들이 정법을 훼손시키는 것이고,
대승불교도 후대에 갖가지 종파를 만들어 밖으로 부처를 구하는 것이 또한 불교를 훼손시키는 것이고,
선이라는 이름으로 호흡법이니 기수련이니 하면서 이런 게 참선인 것처럼 또 혼란시키는 것이다,
건강하고 싶으면 요가를 하든지 체력단련을 하든지 알아서 할 일이지 그걸 불법이라고 말하지 마라,
몸이 아파 의사에게 찾아가 치료받았다고 해서 수행자가 아닌 게 아니듯이
그런 것을 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나 그런 것을 불법이라고 말하지는 마라,
또 병이 나았다고 불법이라 하고 재물이 불었다고 불법이라 말하지 마라,
불법이란 재물의 많고 적음, 병이 나거나 낫는 것과는 도무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병이 나도 일심이 흔들리지 않아야 되고 건강해도 일심이 흔들리지 않아야 되고,
돈이 굴러들어오고 돈이 나가도 일심에 흔들림이 없는 쪽으로 공부를 해야 되는데,
돈과 재물과 건강과 희로애락에 끄달리면서 그게 부처님의 은혜니 재앙이니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불법을 혼탁하게 만드는 것이다.
게송에 이르되
“진여 자성 이것이 참 부처요. / 사견(邪見)과 삼독(三毒)은 이것이 마왕(魔王)이라.
삿(邪)되고 미혹할 땐 마가 집에 있음이요. / 올바른 지견일 땐 불이 집에 있음이라.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진여자성이 참부처고,
잘못된 견해를 내거나 탐진치 삼독을 일으키는 게 마왕이지 마왕이 밖에 있는 게 아니다,
자기 마음속에서 일으키는 잘못된 견해와 탐진치 삼독이 바로 마왕이다,
마음이 삿되면 마왕이 주인노릇을 하고 마음이 바르면 부처가 주인노릇을 한다,
성품 속 사견이면 삼독이 생기나니 / 이것은 마왕이 집안에 옴이로다.
정견(正見) 가져 스스로 삼독 제하면 / 마왕이 부처되어 참일 뿐이리.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또한 화신(化身)의 / 이 3신은 본래로 한 몸이니
성품 속을 향하여 스스로 보면 / 이것이 성불하는 보리인(菩提因)이다.
본래 화신을 좇아 정성(淨性)이 나니 / 정성은 어느 때나 화신 중에 있어라.
성품이 화신시켜 정도(正道) 행하면 / 당래에 원만하여 다함 없으리.
음성(淫性) 본래 이것이 정성인(淨性因)이니 / 음을 제하면 정성신(淨性身)되리.
정성이란 깨끗한 성품을 말하고, 음성이란 거짓된 잘못된 어리석은 것들을 말합니다.
자신의 본 성품이 몸을 시켜 바른 도를 행하게 되면 그게 바로 화신이다,
더러운 마음이 바로 깨끗한 마음이지, 더러운 마음 따로 깨끗한 마음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착한 사람 따로 있고 악한 사람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본심으로부터 한 생각 어리석게 내면 더러운 마음을 내고 악한 인간이 되고,
한 번 바르게 일으키면 바른 마음이 되고 그것이 착한 사람이 되는 거다,
음을 제하면 정성신 되리, 한 생각 어리석고 잘못되어 악인이 된거지 그 어리석은 생각만 제하면 바로 깨끗한 몸이 된다,
성품 속엔 스스로 오욕(五欲) 여의었으니 / 성품 보는 찰나가 즉시 진(眞)이라.
금생 만약 돈교 법문 만나게 되어 / 홀연히 자성 보면 세존 봄이라.
수행하여 부처를 찾으려 해도 / 어느 곳에 진(眞) 구할까 헤매다가도
만약 능히 심중에서 진(眞) 보게 되면 / 진이 있음이라 성불인(成佛因) 되나
자성은 아니보고 부처 찾고자 / 마음을 일으킴은 모두가 치인(痴人, 어리석은 사람)이다.
내 이제 돈교 법문 여기 남기니 / 세상 사람 제도하고 힘써 닦아라.
당래의 학도자에 내 이르노라. / 이런 견해 짓지 말고 크게 유유(悠悠)하라.”
비록 내가 오욕락을 즐기고 빠져 있다 하더라도 본 성품까지 물들지는 않은 것이다,
자기 스스로의 본 성품을 보면 그것이 곧 세존을 보는 거다,
첫날 법문 하실 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간곡하게 또하고 또하고 말씀을 하십니다.
수행하는 사람에게 이르노니 이런 저런 견해 짓지 말고 크게 유유하라, 놔버려라,
대사께서 게송을 설하시고 나서 또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듣거라. 내가 멸도한 후에 세상 인정에 따르지 말라.
슬피 울고 눈물을 흘리거나 남의 조문을 받거나 몸에 상복을 입거나 하면 나의 제자가 아니며 또한 정법이 아니니라.
이렇게 말했는데도 세상에 물들어서 스승이 죽으면 상복을 입고, 휘장을 만 개나 붙이고,
황제의 장례를 치루듯 야단법석을 피우는 것이 과연 조사의 법을 계승한 사람들이겠느냐,
수다를 떨고 사리가 몇 개 나왔다고 헤는 것이 과연 마음 가운데 모든 법이 있다는 얘기와 통하는 것이냐,
그런 것 하는 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바른 깨달음의 법에서는 그걸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 본심을 알아서 자기 본성을 보면 동(動)도 없고 고요도 없고 생도 멸도 없고
감(去)도 없고 옴(來)도 없고 옳음도 없고 그름도(非) 없으며, 머무름도 없고 떠남도 없느니라.
너희들의 마음이 미혹하여 내 뜻을 알아듣지 못할까 걱정되어 지금 다시 부촉하여 너희들로 하여금 견성토록 하고자 한다.
내가 멸도한 후에 이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내가 있을 때와 같거니와 만약 내 가르침을 어긴다면 비록 내가 세상에 있더라도 아무런 이익이 없으리라.”
하시고 다시 게송으로 이르셨다.
그리고 마지막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이걸 꼭 명심해야 됩니다.
“차분히 힘써서 선(善)도 안 닦고 / 활활 놓아 지내 악도 안 지으며
적적하여 보고 들음 모두 다 끊고 / 탕탕하여 마음에 집착 없이하라.
대사께서 이 게송을 설하시고 단정히 앉아서 3경이 되니, 홀연 문인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간다” 하시고 훌쩍 천화(遷化)하셨다.
이때에 기이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고 흰 무지개가 땅에 걸치매 나무 숲이 흰 빛으로 변하고 새와 짐승들이 슬피 울었다.
11월에 광주(廣州) 소주(韶州) 신주(新州)의 3군(郡) 관료와 문인과 신도들이 진신(眞身)을 모셔 가려고 서로 다투어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향을 살라 기도하기를 “조사께서 돌아가실 곳을 항연기로 가르키소서”하였더니 그 때에 향연이 곧 바로 조계로 뻗쳤다.
11월 13일 신감(神龕)과 전해 내려온 의발을 조계 보림에 옮기고,
다음해 7월 25일, 출감하여 제자 방변(方辯)이 향이(香泥)로 바르고,
또한 문인들은 <머리를 취해 간다>는 예언을 생각하여 철엽(鐵葉)과 칠포(漆布)로 조사의 목을 단단히 싸서 탑에 모시니
탑 속에서 홀연 흰 광명이 곧바로 하늘로 뻗쳐 올라간 지 3일 만에 비로소 흩어졌다.
소주 자사가 조정에 주달하여 칙명을 받들어 비를 세워 조사의 도행(道行)을 기록하였다.
돌아가신 때가 713년 8월 3일인데 장례는 동짓달 조계산에서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월 13일 전해 내려온 의발을 조계 보림에 옮기고 잘 장례를 치루었다,
여기 보면 화장한 게 아니라 육신을 그대로 모셨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목을 베어가는 사고가 생겼지요,
조사의 춘추는 76이었고, 24세에 의발을 받으셨고,
39세에 축발하셨고 법을 설하여 중생을 요익하심이 37년이었고,
아버님을 여의고 나무꾼으로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던 그런 시골 촌사람이었는데,
몸을 일으켜서 역대 가장 위대한 조사스님이 되었지만 그동안 핍박도 많았다,
24세에 의발을 받으시고 절에 있다가 불을 질러 죽을 뻔하고 바위틈에 숨어있는데 산불을 질러 죽을 뻔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의 비난이 있었고 해치려는 사람이 끝도 없이 있었지만.
37년 동안 끊임없이 법을 설하시고 선종의 종지를 휘날려서
오늘날 중국 한국 일본에 널리 퍼지고 지금은 미국과 유럽으로 건너가 새로운 선풍을 일으킬 씨앗으로 작동하고 있다,
종지(宗旨)를 얻어 법을 이은 제자는 43인이고, 도를 깨쳐 범부의 자리를 넘어선 자는 그 수를 알 수 없다.
깨달았다고 인가를 받은 분이 43명이고, 범부의 자리를 넘어선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달마 조사가 전하신 신의(信衣)와 중종이 드린 마납가사와 보발(寶鉢)이며, 방변이 만든 조사의 진상과 그 밖의 도구들은
탑을 주관하는 시자가 맡아서 길이 보림 도량을 진정시키고 단경은 유전케하여 종지를 나타내고 삼보를 흥륭(興隆)하여 널리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한다.
더 이상 옷과 발우를 제자들에게 전하지 않고 머무르시던 절에 잘 보관을 하고, 법의 징표로는 법보단경을 유전케 했다,
조사의 제자들은 법보단경을 한 부씩 가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혜능의 법은 상좌인 법해스님께서 어록을 잘 모아서 책으로 편집하여 유통시켰고,
법해스님이 돌아가실 때는 도반인 도제스님에게 그 일을 할 것을 부촉했고,
도제스님이 열반에 드실 때는 그 제자인 오진스님이 그 일을 행했습니다.
돈황본 법보단경은 이 오진스님이 행한 데 까지 기록이 있는데, 돈황석굴에 천 년 동안 묻혀 있었고,
그 이후 법보단경은 여러 이본이 나왔는데 우리가 공부한 이 것은 1260년대 것입니다.
즉 700년이 지난 뒤에 덕이선사가 모아놓은 경전으로 우리가 공부한 것인데,
돈황본과 비교해보면 가감첨삭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중간중간 생략한 것들은 돈황본에는 나오지 않는 것들입니다.,
중종이나 측천무후 얘기나 예언 같은 것들은 돈황본에는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열 번에 거쳐 육조단경의 강의를 마치게 되는데,
제가 선사의 어록 그리고 금강경 강의를 했지만 부처님의 뜻을 다 전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높다고 위에 모셔놓거나 우리는 수준이 안 된다고 우리의 삶과 별개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조사와 부처님께서 늘 말씀하셨듯이 부처님의 법은 어리석은 중생, 깨닫지 못하는 중생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미 깨달은 선지식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 깨닫지 못한 중생을 위해서 있는 것이니
100%가 아니라 다만 일부라도 이해하고 그 법을 계승을 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큰 공덕이 됩니다.
다만 제가 혹시 경문을 잘못 해석 했거나 여러분들이 잘못 이해했다면 이것은 제 능력의 부족에서 온 것이니, 부처님께 참회를 구할 것입니다.
많은 큰 스님들은 이런 것들을 일반인의 생활에 견주어 해석을 하면 법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것이니,
가정사나 세상사에 연결하지 말고 공부하는 이에 견주어 말해야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경험 속에서 마음의 도리를 설명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경험을 떠나 법을 얘기하면 듣기는 고고하고 좋은지 몰라도 마음에 깨달은 바가 별로 없습니다.
생활에 견주어 얘기를 했다고 해서 법이 더러워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시고, 이것이 지식으로 유희되거나 이것을 무기로 삼아서 남을 비판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지식으로 삼아 수행하는 스님을 비판하는 용도로 써도 안 되고
이것을 다른 종파나 다른 신도나 다른 종교를 비난하는 용도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부처님의 법과 조사의 어록은 늘 자기를 향해서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음식을 써는 칼도 남을 해치려 마음먹으면 흉기가 되듯이, 좋은 법문도 새로운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법문 듣는 것도 좋지만 삶속에서 늘 자기를 돌아봐야 하고, 자심을 떠나 공부해서는 안 됩니다.
남편과 다투고 돈 문제로 괴로워하는 속에서도 자기를 잃지 않아야 그것을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지,
공부시간에만 공부하고 나머지는 공부하고 거리가 먼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 돌아가시면 첫째 해야 할 일은 아만을 꺾는 것입니다.
아만을 꺾는데 제일 좋은 것이 절입니다.
매일 최소 108배씩은 하되 허리만 구부릴 게 아니라 마음을 숙이고 참회를 해야 합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 기초 위에 경문도 읽고 참선도 하고 딴 것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 법의 종지가 뭔지를 분명히 알고 자기 역사의 역사성을 분명히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걸 심중에 갖고 있되 바깥에 드러내거나 강요해서는 안 되고, 그런 것으로 상을 삼아서도 안 됩니다.
모두에게 평등하게 대해야 합니다,
인도사람이라고 천하게 대하지 말고, 미국사람이라고 높이 보지 않는 게 불법입니다.
조계종의 종지를 잘 간수하되, 교종이나 다른 종파를 얕보지 않고 평등하게 대해야 합니다.
여기 와서 수행전진하고 정법 지키는 것은 좋지만, 다른 절에 다니며 복이나 닦는다고 얕봐서는 안 되고,
그것을 근기가 하열하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다 존중해줘야 여러분들이 빛나는 겁니다.
사람은 다 그 나름대로 갈 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나은 길을 제시하고 토론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자랑삼으면 도리어 제 허물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금강경을 공부하고 육조단경을 공부하는 도리입니다,
자긍심 차원에서는 승속이 없는 줄 알아야 되지만 차별현상계에서는 스님을 존중해야 됩니다,
스님을 존중하되 신비화 시키지도 말고 비굴하게 대하지도 말고 열등의식도 갖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법문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남자나 여자나 스님이나 기독교인이나 평등하게 봐야 합니다,
다만 듣고 나에게 도움이 되고 부처님의 법에 맞는 거라면 귀담아 듣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공부하는 게 조사의 법을 계승하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이것을 명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으로 육조단경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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