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7. 육조단경

[법륜스님의 '육조단경'] 제25강 불법을 대로 말하다 1

상원통사 2021. 11. 9. 16:17

오늘은 육조단경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8. 당조에서 초청하다

 

 신룡(神龍) 2년 상원일(上元日) 칙천황후(則天皇后)와 중종(中宗)이 조서를 보내어 이르기를,

 “짐이 안·(·) 두 대사를 궁중에 모시고 공양하며 만기(萬機)를 살피는 겨를에 매양 일승을 연구하는 바,

  두 대사가 사양하며 추천하기를, <남방에 계시는 능()선사는 인()대사의 의법을 밀수(密受)하여

  부처님 심인(心印)을 전해 받았으니 그분을 청하여 묻는 것이 좋다>하시니

  이에 내시 설간(薛簡)을 보내어 조서를 전하고 청하오니 바라건대 스님께서는 자비로 살피시어 속히 상경하여 주소서하였다.

서기 706115, 당나라 고종의 황후인 측천무후는 설간이라는 내시를 혜능께 보내,

왕궁으로 와서 설법해달라고 하는데, 초기본인 돈황본에는 이런 얘기가 없습니다,

 조사께서는 표()를 올리어 아프다고 사양하시며 숲 아래에서 종신하기를 원하시니 설간이 여쭙기를

 “서울의 선덕들이 다 말씀하기를 <도를 알려고 하거든 반드시 좌선하여 정()을 익혀라.

  선정을 인하지 않고 해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옵는데 스님께서 설하시는 법은 어떠하십니까?” 한다.

혜능이 병을 빙자하고 왕궁에 올라가 설법하는 것을 사양하자,

내시 설간은 자기가 서울에 가서 대신 전할테니 법문을 해달라며 묻고 있습니다.

이걸 보면 황실에서는 교종중심의 불교가 수행중심의 선종으로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조사가 말씀하셨다.

 “도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깨치는 것인데 어찌 앉는 데 있겠느냐!

참선과 좌선을 가르치는 분이 바로 육조대사입니다,

육조대사는 이 경문 전체를 통해 누누이 말씀하시는 게, 앉는다고 선이 되는 게 아니다,

마음을 깨달아야지 몸을 어떻게 하느냐 호흡을 어떻게 하느냐 이런 것은 도무지 관계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조사의 가르침에서 빗나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경에 이르기를 <만약 여래(如來)를 혹은 앉는다 혹은 눕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따라 올 곳도 없고 또한 갈 곳도 없는 까닭이라> 하지 않았더냐!

  생()도 없고 멸()도 없는 것이 여래의 청정선(淸淨禪)이요,

  모든 법이 공적(空寂)한 것이 여래의 청정좌(淸靜坐)니 구경에는 증득함도 없거니 어찌 하물며 앉는데 있겠느냐!”

여기서의 경은 금강경을 말합니다,

생멸이 없는 것이 여래의 선이고 모든 법이 텅 비었다 하는 것이 여래의 청정좌다,

구경에 가서는 함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데, 어찌 앉는다 눕는다 하는 게 문제가 될 것이냐,

 

 설간이 말씀드렸다.

 “제자가 서울로 돌아가면 주상께서 반드시 물으시리니 바라건대 스님께서는 자비로써 심요(心要)를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하오면 제자가 양궁(兩宮)께 전하여 올리고 또한 서울에 있는 도를 배우려는 모든 사람에게도 미치게 하여

  마치 한 등불을 수천 등불에 붙이듯이 하고, 어두운 것을 다 밝게 하여 밝고 밝음이 다함이 없게 하겠습니다.”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도에는 밝음도 어둠도 없느니라. 밝음과 어둠은 이것이 대사(代謝, 상대되는 말)의 뜻이라,

  설사 밝고 밝음이 다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역시 다함이 있는 것이니, 이것은 서로 상대하여 그 이름을 세운 까닭이니라.

  정명경에 이르기를, <법은 견줄 바가 없으니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하시지 않았더냐!”

법이란 상대를 떠난 것이다, 두 가지를 떠난 게 법인데 어찌 법에 두 가지 모양이 있겠느냐,

밝으니 어둡니 하면 벌써 이법이고, 이미 사량분별입니다.

 “밝음은 지혜에 비유되고 어둠은 번뇌에 비유되니, 수도하는 사람이 만약 지혜로 번뇌를 비춰 없애지 않으면

  시작 없는 먼 옛날부터 내려온 생사의 굴레를 무엇을 의지하여 벗어나리까?”

등불을 켜서 어둠을 밝히듯이 지혜로서 번뇌를 쫒아내야 되지 않느냐,

그런 게 아니면 어떻게 다생겁래로 지어온 이 죄업을 벗어나느냐 설간이 이렇게 물으니

 “번뇌가 곧 보리니, 이는 둘이 아니며 다름도 없느니라.

  만약 네 말과 같이 지혜로써 번뇌를 없애 버린다면 이것은 2승의 견해요, 양거(羊車녹거(鹿車) 등의 근기인 것이니

  상지(上智대근(大根)은 모두가 그렇지 않느니라

번뇌니 보리니 그런 분별도 안 된다,

여기서 2승은 성문과 연각, 양 수레와 사슴 수레 타는 사람들을 말하고,

상지 대근은 높은 지혜와 근기가 큰 사람, 즉 대승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대승의 견해이옵니까?”

 “범부들은 명()과 무명(無名)을 둘로 본다.

  그러나 지혜있는 이는 그 성품이 둘이 아님을 요달하나니 둘이 아닌 성품이 곧 실다운 성품이니라.

  실다운 성품이라는 것은 우치한 범부에 있어서도 덜하지 아니하며 현성(賢聖)에 있어서도 더하지 아니하며

  번뇌 속에서도 어지럽지 않으며 선정(禪定) 가운데서도 고요하지 않으며 단()도 아니며 상()도 아니며

  오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으며 중간이나 안이나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나지도 않으며 멸하지도 아니하며

  본성과 형상이 여여하여 항상 머물러서 변천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도()라 하느니라.”

밝니 어둡니, 깨끗하니 더럽니, 이런 두 가지 모양을 짓지 않아야 참다운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실다운 성품이란 어리석은 사람에게 모자라지 않고 현인과 성인에 있어서도 더하지 아니하며

()도 상()도 아니며, 끊어지지도 아니하고 영원하지도 아니하며,

오니 가니 앉느니 눕느니 깨끗하니 더럽니 더하니 줄어드니 이런 것은 본성과 거리가 멀다,

번뇌가 일어나기에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일어나고 이런 법 저런 법도 일어나는 것이지

본심의 세계, 본자리의 세계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우리가 번뇌를 일으켜 허둥대고 악을 쓰지만 본심이 어지러운 게 아니고,

또 우리가 고요히 있다 해서 자성이 고요한 것도 아니다,

그건 본래 고요한 것이지 고요해 지는 것이 아니다,

어지럽힐래야 어지럽혀질 수도 없고 고요해질래야 고요해질 수도 없는 거다,

 

 설간이 말씀드렸다.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불생불멸은 외도의 그것과 어떻게 다릅니까?”

 “외도가 말하는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멸이란 생을 멈추는 것이고 생이란 멸을 나타낸 것이라

  멸도 오히려 멸한 것이 아니며 생하였다 말하더라도 생한 것이 아니거니와

  내가 말하는 불생불멸은 본래 스스로 남()이 없는 것이어서 지금 또한 멸도 없으니 이 까닭에 외도와 같지 않느니라.

  네가 만약 심요를 알고자 할진대 다만 일체 선악을 전혀 생각하지마라.

  그러면 자연히 청정 심체에 들어가 맑고 항상 고요하며 묘용(妙用)이 항하사와 같으리라.”

외도들이 말하는 불생불멸이란 태어났지만 멸하지 않는 것, 영원한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 불생불멸이란 생하지 않으니 멸도 없다, 즉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다,

생이니 멸이니 하는 것은 우리들의 분별에 불과한 거다,

선악이라는 분별을 내지 말고 본래 선악이 없는 줄을 알아라,

선악이 보인다는 것은 색깔있는 안경을 쓰고 보는 것과 같다,

망상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고 꿈같은 것이다, 공한 것인줄 알고 헛것인 줄 알아라.

 설간이 가르침을 받고 활연 대오하고 조사께 예배하고 하직하였다.

 대궐로 돌아가 조사의 말씀을 표로 사뢰었다.

 그해 93일 조서를 내리어 대사를 찬양하였는데 이르기를,

 “대사께서 늙고 병들었다 하여 짐의 청을 사양하고, 짐을 위하여 도를 닦으시니 나라의 복전이옵니다.

  대사는 정명(淨命)이 병을 칭탐하여 비야리에서 대승을 천양하고 제불의 마음을 전하면서 불이법(不二法)을 담론하던 일과 같습니다.

  설간으로부터 대사께서 여래지견을 가르쳐 주신 것을 전하여 들으니,

  이는 짐이 적선한 보람이며 숙세로 선근을 심은 인연으로 이 세상에 나신 대사를 만나게 되어 상승(上乘)을 돈오하였사오니,

  대사님 은혜에 감사하고 머리에 받들어 마지 않습니다하였다.

 그리고 마납(摩納)가사와 수정발우를 드리고 또한 소주(韶州) 자사에게 명하여 사우(寺宇)를 중수 장엄케 하고 대사의 옛 거처에 국은사(國恩寺)라 이름을 내렸다.

(~~ 여기까지 강의 생략)

 

9. 법문을 대()로 보이다

 조사께서 하루는 문인 법해(法海지성(志誠법달(法達신회(神會지상(智常지통(智通지철(志徹지도(志道법진(法珍법여(法如) 등을 불러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다른 사람과 같지 않으니 내가 멸도한 후에 각각 일방의 스승이 될 것이므로

  내 이제 너희들로 하여금 법을 설하는 데 있어 근본종지를 잃지 않게 하리라.

  먼저 삼과(三科) 법문과 동용(動用)36()를 들어 말하리니 나고 듦에 곧 양변(兩邊)을 여의고 일체 법을 설할 때 자성을 여의지 말라.

  혹 어떤 사람이 와서 너희에게 법을 묻거든 말을 하되 모두 쌍()으로 하여 다 대법(對法)을 취하고

  오고 감에 서로 인()하고 마침내는 이법(二法)을 모두 없애어 다시 갈 곳을 없게 하라.

  삼과(三科)법문이라 하는 것은 음()과 계()와 입()을 말함이니라.

  음이라 함은 오음이니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이것이요,

  입이라 함은 12()이니 밖으로 육진(六塵)인 색성향미촉법과 안으로 6문인 안이비설신의가 이것이요,

  계라 함은 18계니 6진과 6문과 6식이 이것이니라.

  자성이 만법을 머금었으므로 함장식(含藏識)이라 하는 것이니 만약 사량(思量)을 일으키면 이것이 전식(轉識)이라,

  6식을 내어 6문을 나와 6진을 보게 되나니 이와 같이 18계 모두가 자성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므로

  자성이 만약 삿되면 18()가 일어나고 자성이 만약 바르면 18()이 일어나느니라.

(~~ 여기까지 강의 생략)

 

  악한 것을 머금고 쓰면 이것은 곧 중생의 용()이요 착하게 쓰면 곧 부처님의 용(佛用)이니라.

중생의 마음으로 보면 갖가지 모양을 짓고 형상에 집착해서 희로애락에 빠지게 되고,

부처의 마음을 일으키면 중생의 괴로움을 볼 수 있고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다,

눈이 있다고 다 나쁜 게 아니고 봤다고 다 나쁜 게 아니다,

봄으로 해서 좋은 일을 할 수도 있고 봄으로 해서 나쁜 일을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어떻게 일으키느냐 하는 것이지 손이나 머리나 옷이 중요한 게 아니다,

 

  대체 용은 무엇을 말미암아 이루어지는가?

  자성을 말미암아 대법(對法)이 있느니라.

용이란 활용인데, 활용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대법이란 근본교설의 연기법에 해당합니다.

연기법이란 서로 의지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아내와 남편은 대법입니다, 아내가 있으므로 남편이 있고 아내가 없으면 남편도 없다,

 

밝음이 있으니 어둠이 있고 어둠이 없으면 밝음도 없다, 서로 의지해서 있는 것이다,

밝음이라는 실체도 어둠이라는 실체도 없다, 서로 의지해 있으니 하나가 없어지면 다른 하나도 없어진다,

서로 연관되어 일어나는 것, 서로 상대해서 있는 것, 이게 대법입니다.

모든 것이 인연을 따라서 일어나고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거다,

 

  대법에는 무정물인 바깥 경계에 5()가 있으니, 하늘은 땅과 더불어 대며, 해는 달과 더불어 대며,

  밝음은 어둠과 더불어 대며, 음은 양과 더불어 대며, 물은 불과 더불어 대니 이것이 5대니라.

  제법의 모양을 딴 말에 12대가 있으니, 말은 법과 더불어 대며, 유는 무와 더불어 대며, 유색은 무색과 더불어 대며,

  유상(有相)은 무상(無相)과 더불어 대며, 유루(有漏)는 무루(無漏)와 더불어 대며, ()은 공()과 더불어 대며,

  동은 정과 더불어 대며, 청은 탁과 더불어 대며, 범부는 성인과 더불어 대며, 승은 속과 더불어 대며,

  노()는 소()와 더불어 대며, 대는 소와 더불어 대니 이것이 12대니라.

  또한 자성이 용()을 일으킴에 19대가 되니, ()은 단()과 더불어 대며, ()는 정()과 더불어 대며,

  치()는 혜()와 더불어 대며, ()는 지()와 더불어 대며, ()은 정()과 더불어 대며,

  자()는 독()과 더불어 대며, ()는 비()와 더불어 대며, ()은 곡()과 더불어 대며,

  실()은 허()와 더불어 대며, 험난은 평탄과 더불어 대며, 번뇌는 보리와 더불어 대며,

  상()은 무상(無常)과 더불어 대며, ()는 해()와 더불어 대며, ()는 진()과 더불어 대며,

  줌은 아낌과 더불어 대며, ()은 퇴(退)와 더불어 대며, 생은 멸과 더불어 대며,

  법신(法身)은 색신(色身)과 더불어 대며, 화신(化身)은 보신(報身)과 더불어 대니 이것이 19대니라.”

대법에는 무정물인 바깥 경계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가 하늘 땅, 천지가 대법(서로 대비해 있음)이요, 다음에 해와 달, 밝음과 어둠, 음과 양, 그리고 물과 불 이렇게 다섯 가지 대법이 있다,

사실은 다섯 가지가 아니라 얼마든지 있지만 크게 다섯 가지를 말한 것입니다.

다음은 제법의 모양, 존재하는 모양에는 12가지 대법이 있다고 말하는데, 초기 경전인 돈황본에는 말과 법, 유와 무는 없습니다.

유색과 무색(모양이 있느냐 모양이 없느냐), 유상과 무상(생각이 있느냐 생각이 없느냐),

유루와 무루(새느냐 새지 않느냐), 색과 공, 동과 정, 청과 탁(깨끗하고 흐린 것),

범부와 성인, 승과 속, 노와 소 늙고 젊음, 대와 소, 크고 작은 것 등 12가지가 있다.

크다 작다는 서로 대대해서 생기는 것이지 그 근본은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이 공이다, 이 공이 자성이고 자성은 공한 것이다, 거기로부터 크다 작다,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것들이 나온다.

 

(제26강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