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7. 육조단경

[법륜스님의 '육조단경'] 제23강 남돈과 북접 2

상원통사 2021. 11. 4. 10:45

(~~ 제22강에서 계속)

 

 지성이 이 게송을 듣고 조사께 재배하고 말씀드렸다.

 “제자는 수대사 휘하에서 9년 동안 도를 배웠사오나 깨치지 못하옵더니 이제 화상의 한 말씀을 듣고 문득 본심에 계합하였습니다.

 제자의 생사(生死) 일이 크오니 화상께서는 대자비로 다시 가르쳐 주십시오.”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듣건대 너의 스승은 학인에게 계정혜(戒定慧) 법을 가르친다 하니 너의 스승은 계정혜를 어떻게 말씀하는지 말하여 보라.”

 “수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계요,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혜며,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이 정이다> 하십니다.

  저기서 하심은 이러하옵거니와 화상께서는 어떠한 법으로 학인을 가르치시옵니까?”

여기서 생사일이 크다는 것은 죽고 사는 문제를 뛰어넘지 못했다,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고,

악한 일은 하지 않고 선한 일을 닦으며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건 모든 부처님과 조사스님의 공통된 전법게입니다.

 

옛날 어떤 스님이 나무 위에서 살며 내려오지 않자 사람들은 새같다 하여 조가선사라 불렀습니다.

그 분이 유명하다 하니까 하루는 백낙천이 찾아 가서 물었습니다, ‘도가 뭡니까?’

박학다식한 분이 물었다는 것은 내심 굉장한 것을 기대했다는 것인데,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게 도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거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얘기 아니요, 그것 들으려고 이 먼 길을 왔겠소 하며 돌아가려 하는데,

조가선사는 삼척동자도 알만큼 쉬운 것이지만 80 먹은 노인이라도 행하기는 어렵다라고 답합니다.

이에 백낙천은 크게 깨닫고 공부를 다시 했다 합니다.

머리로 지식으로 생각으로 이론으로 공부하는 것과, 마음으로 깨닫고 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불교의 핵심은 수행입니다, 수행이란 일체를 놔버리는 겁니다.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계요,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지혜이며,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이 정이다’,

윤리적 도덕적 학문적 실천적인 면에서 보면 참 좋지만, 일체유심조라는 마음도리에서 보면 진부한 얘기입니다.

 

 “내가 만약 사람에게 줄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곧 너를 속이는 것이 되리라.

  나는 다만 잠시 경우를 따라 얽힘을 풀 뿐이니 이것을 거짓 이름하여 삼매라고 한다.

  너의 스승이 말씀하시는 계정혜는 실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으나 내가 보는 바 계정혜는 또한 다르니라.”

 “화상이시여! 계정혜는 다만 한 가지 이온대 어찌하여 다릅니까?”

 “너의 스승이 말하는 계정혜는 대승인을 제접하는 것이지만 나의 계정혜는 최상승인을 제접하는 것이니라.

  깨닫고 앎이 같지 않으므로 지견에 빠르고 더딤이 있나니라.

  내가 말하는 법이 저와 같은가 다른가 들어보아라.

  내가 설하는 법은 자성을 여의지 않느니라.

  체를 여의고 법을 설하는 것을 상설(相說)이라 하는데 이것은 항상 자성을 미혹하게 하느니라.

  모름지기 일체 만법이 모두가 자성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임을 알라.

  이것이 참된 계정혜의 법이니라. 내 게송을 들어라.

(~~ 여기까지는 강의 생략)

 

  마음 자리(心地)에 잘못() 없음이 자성계(自性戒),

  마음 자리에 어리석음(, ) 없음이 자성의 혜(自性慧)

  마음 자리에 어지러움(, ) 없음이 자성의 정(自性定)이요

마음자리에 뭔가 잘못이 있으니 잘못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담배 피우고 싶은 사람은 안 피우려 애써야 하고, 마약하고 싶은 사람은 안 하려 애써야 하고,

욕하고 싶은 사람은 욕 안 하려고 애써야 하고 성질나는 사람은 성질 안 내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술이 몸에 나쁘다는 것을 깨우쳐 술에 집착이 없는 사람은 술 안 먹으려 애쓸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깨우쳐 집착이 없는 사람은 담배 안 피우려고, 거짓말 안하려고, 살생 안하려고, 도둑질 안하려고 애쓸 일도 없습니다.

마음자리에 잘못이 없는 게 진정한 계입니다,

마음자리 자체에 잘못이 없으니 지킬 계가 없다, 그것이 진정한 계율입니다.

얻으려는 욕심이 있고 얻을 게 있어야 걸림이 있고, 걸림이 있어야 희로애락이 생겨나는데,

마음자리에 어지러움이 없으니 고요히 해야 할 게 없고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으니 깨쳐야 할 게 따로 없다,

이것이 바로 자성계요 자성혜요 자성정입니다.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음이 자성금강(自性金剛)이며 몸이 오고 몸이 감이 본래 삼매니라.”

마음자리라는 것은 느는 것도 아니고 주는 것도 아니다,

더럽힐래야 더럽힐 수도 없고 깨끗하게 할래야 깨끗하게 할 수도 없고 늘릴래야 늘릴수도 없고 줄일래야 줄일수도 없다.

 

 지성이 게송을 듣고 깊이 뉘우치고 곧 한 게송을 지어 바쳤다.

 “오온인 이 몸은 바로 환()이니       / 환을 어찌 구경(究竟)이라 하랴.

  그렇다고 진여로 돌이켜 나아가면    / 법이 도리어 다시 부정(不淨)이리.”

오온(색수상행식)을 참나로 생각하고 여기에 집착했는데 이 자체가 환(거짓)이다,

환을 버리고 진실을 구한다고 돌이켜 나가더라도 법이 도리어 다시 부정해진다,

환을 환인줄 알면 그걸로 끝나야지 거기서 현실을 찾는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또 꿈을 꾸는 것이다,

 

 조사께서 그렇다 하시고 다시 성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스승의 계정혜는 작은 근기의 지혜를 지닌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요,

  내가 말하는 계정혜는 큰 근기의 지혜를 지닌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니라.

너의 스승은 잘못되고 나만 옳다가 아닙니다.

너의 스승은 작은 근기를 가진 사람에게 맞는 얘기고 내 가르침은 큰 근기를 가진 사람에게 맞는 얘기다,

소승은 해탈 못하고 대승만 해탈한다가 아니라,

소승은 혼자 해탈하는 길이고 대승은 여러 사람이 다 같이 해탈할 수는 있다와 같은 얘기입니다.

틀렸다 이단이다가 아니라 그것은 근기가 작고 어리석은 사람을 위한 더딘 길이고

이것은 근기가 높고 지혜롭고 큰 사람을 위한 빠른 길이다,

이렇게 포용도 하면서 또한 더 우위에 있다는 것도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자성을 깨달으면 보리열반도 세우지 않으며 또한 해탈지견도 세우지 않느니라.

  가이 한 법도 얻음이 없으므로 바야흐로 능이 만법을 건립하는 것이니

  만약 이 도리를 안다면 이는 곧 불신(佛身)이며 보리열반이며 해탈지견이라 할 것이니라.

  견성한 사람은 세워()도 되고 세우지 않아도 되니 거래에 자유롭고 막힘도 없으며 걸림도 없어서

  경우에 응하여 짓고 물음에 응하여 답하며 널리 화신(化身)을 나투되 자성을 여의지 아니하며

  곧 자재신통력과 유희삼매(遊戱三昧)를 얻나니 이것이 견성이니라.”

 지성이 다시 조사께 말씀드렸다. “어떠한 것이 세우지 않는 뜻이 됩니까?”

 “자성은 그름()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으며, 어지러움도 없나니,

  생각마다 반야로 관조하여 항상 법상(法相)을 여의고 자유자재하여 종횡으로 모두가 통하니 어찌 세울 것이 있으랴!

  자성을 스스로 깨달아 돈오(頓悟) 돈수(頓修) 하므로 또한 점차가 없나니

  이 까닭에 일체 법을 세우지 않는 것이며 제법이 적멸하거니 무슨 차례가 있으랴!”

 이에 지성이 예배하고 시자(侍者)되기를 원하고 조석으로 게으르지 않았다.

 [지성은 길주(吉州) 태화(太和) 사람이다]

 

세우지 않는다 것은 상을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름도 없고, 그름의 상도 짓지 않고 옳음의 상도 세우지 않는다,

어리석음도 없으며, 어리석음이란 것도 본래 없다.

이 법문을 보면 혜능대사는 불교의 근본 맥인 연기 무아 공의 입장에 그대로 상통합니다.

소승불교인들은 부처님 법을 그대로 계승했다 하지만 사실은 아견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법상을 지어 법의 실체가 있다는 쪽으로 떨어졌기에 대승에서 공이란 이름으로 비판했습니다.

또 대승을 계승했거나 선을 한다면서 한 생각 일으켜 견해를 낸다면 지혜있는 자는 그건 알음알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원효대사는 방울스님이 몸도 불편하고 연세도 많고 천대 받고 있으니, 불쌍한 분으로 생각하고 잘 돌봐드렸습니다,

보살행을 하신 것이지만 나중에 깨닫고 보니 불쌍하다는 생각은 스스로 지은 것일 뿐이었습니다.

좋은 거라고 다 깨달음이 아니고, 도덕적으로 선이라 해도 그것이 깨달음의 길은 아닙니다,

그럼 윤리도덕적으로 나쁜 게 깨달음의 길일까요, 그건 물론 아니지요,

좋은 것마저도 집착할 바가 없는데 나쁜 것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제24강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