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7. 육조단경

[법륜스님의 '육조단경'] 제20강 참청한 기연 2

상원통사 2021. 10. 29. 15:55

(~~ 제19강에서 계속)

 

 법달이 이 게송을 듣고 곧 크게 깨치고 저도 모르게 슬피 울면서 조사께 여쭈었다.

 “법달은 이제까지 실로 한 번도 법화경을 굴리지 못하고 법화경에 굴리어 왔습니다.”

사람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야 되는데, 뗏목을 머리에 이고 물속에 헤엄치는 격이 되었다,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해탈을 해야 되는데 도리어 부처님의 말씀에 갇혀버렸다,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상을 짓고 거기에 종이 되어가지고 도리어 헤매고 다녔다.

 

 하고 다시 여쭈기를

 “경에 이르기를 <모든 대성문(大聲聞)들과 보살들이 다 함께 생각을 다하여 헤아리더라도 부처님이 지혜는 측량하지 못하다> 하였사온데

  이제 범부가 다만 자기 마음만 깨달으면 곧 불지견을 이루는 것이라 하시니

  스스로 상근기(上根機)가 아닌 자는 의심하거나 비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경에 삼거(三車)를 말씀하셨사온 데 양녹거(羊鹿車)와 백우거(白牛車)를 어떻게 구별하올지, 바라옵건데 화상께서는 다시 가르쳐 주십시오.”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경에는 뜻이 분명한데 네가 스스로 미혹하여 모르는구나.

  모든 삼승인(三乘人)이 부처님의 지혜를 측량하지 못하는 것은 그 허물이 헤아리고 짐작하는데 있나니,

  비록 저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생각하고 함께 추구하더라도 더욱더 멀어지느니라.

(~~ 여기까지는 강의 생략)

 

 부처님은 본래 범부를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요 결코 부처님을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닌데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은 부처님을 위해 하신 것이 아닙니다.

중생에게 나를 이렇게 받들어라, 나한테 이렇게 해라, 이렇게 안하면 벌을 주겠다 이런 얘기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

부처님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자기를 숭배한다고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신은 자기를 숭배하면 좋아하고 딴 데 가면 미워서 증오합니다,

질투하는 하느님, 여러분들 들으면 웃겠지만 다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믿다가 다른 데 가면 질투하고 징벌을 내리고, 안 믿으면 지옥의 불구덩이에 넣어버린다 하지만,

부처님은 질투하거나 미워하거나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다만 중생을 어여삐 여기고 보살펴 주시는 분입니다.

법을 비난하거나, 자기가 지은 업 때문에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고 슬퍼하시면서 구제를 하시려 하는 분입니다.

 

부처님은 범부를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지 결코 부처님을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팔만사천 법문은 다 어리석은 자를 위하여, 그들을 깨우치려고 설한 것입니다.

영리하고 똑똑한 자들을 위해, 승려들을 위해서 설하신 걸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바로 여러분들을 위해 말씀하신 것이니 못 알아듣거나 어려운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그런 어려운 법문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후대 학자들이 공연히 복잡하게 만들어서 그런 법문이 생긴 거지, 부처님은 못 알아들을 법문은 하시지 않았습니다.

못 알아듣는 얘기를 하신 게 아니라, 못 알아듣는 사람이 알아듣도록 얘기하신 겁니다.

그런데도 못 알아듣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비가 오는데 바가지 거꾸로 쥐고 있는 사람, 물러서는 마음을 낸 사람, 다 안다고 교만한 생각을 내는 사람,

이들은 빛을 밝게 비춰줘도 스스로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할 뿐입니다.

 

  이 도리를 믿지 않는 자는 자리에서 물러가는 대로 맡겨 두거니와

  이들은 또한 스스로 백우거(白牛車)에 앉아 있으면서 다시 문 밖으로 삼거(三車)를 찾아 헤매는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법화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갖가지 광명을 보이고 교만한 자를 비판하시니까 오백 비구대중들이 자리에서 물러갔습니다,

비구 대중이란 높은 성문의 경지에 있는 사람인데 교만했기 때문에 이런 것입니다.

우린 이미 다 깨달았는데 뭘 또 공부할 게 있나, 이런 생각을 했기에 부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백우거를 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흰 소가 끄는 수레인 줄 알지 못하고,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라도 하나 생겼으면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인데도 부처인줄 알지 못하고, 중생 세계의 조그마한 것들에 탐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경문에 분명히 너희에게 이르기를 <오직 일불승(一佛乘)이 있을 뿐 다른 승()인 이승(二乘삼승(三乘)이 없다> 하였고

  <내지 무수한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의 말씀이 모두가 일불승인 이 법을 위함이라> 말씀하시지 않았더냐?

이승은 대승과 소승을 말하고, 삼승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직 부처되는 길 한 가지뿐, 다른 목적지로 끌고 가는 그런 가르침은 없습니다.

 

부처님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살인자, 창녀, , 대신, 바라문, 철학자, 수행승, 바보 등 온갖 사람들이 와서 묻습니다.

아낙네는 아들 죽었다고 울고불고 하고, 할머니는 손자 죽었다고 울고불고 하고,

왕은 이웃 나라와 전쟁할 것을 얘기하고, 철학자는 철학적인 논쟁을 하고,

살인자는 사람 죽였다고 괴로워하고, 창녀는 자기 몸이 더러워졌다고 하소연 하고,

바보는 자기가 바보라는 것을 한탄하고, 묻는 것도 다 다르고 고민도 다 다릅니다.

부처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그 하나하나를 다 그대로 들어줬느냐, 아닙니다.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를 원해서 찾아왔지만,

부처님은 그들이 원하는 수레가 아니라 다 흰 소가 끄는 수레를 주었습니다,

즉 모두가 깨닫도록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애기 죽었다고 와서 우는 여자도 깨달아서 성인의 지위에 이르렀고,

창녀도 살인자도 천민도 바보도 왕도 브라만도 철학자도 다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말씀은 동으로 서로 북으로 남으로 가라는 것이지만, 목적지는 다 서울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 길이 다르다고 말하지 마라, 오직 한 길 서울 가는 길, 부처되는 길만 있다,

이렇게 부처되는 길이 일불승인 것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삼거는 거짓이며 예전을 위함이요, 일승(一乘)은 실지며 이것이 지금을 위한 것임을 살피지 못하느냐?

  이는 다만 너로 하여금 거짓을 버리고 실지에 돌아오게 하려함이니 실지에 돌아와서는 실지라는 이름조차 또한 없는 것이니라.

  마땅히 알아라. 있는 바 모든 보물과 재물이 모두 네게 속하고 네 마음대로 쓰일 것이요

  다시는 아버지니 아들이니 하는 생각도 할 것이 없으며 또한 쓴다는 생각도 하지 말라.

  이렇게 알면 이것이 법화경을 수지하는 것이니 겁()과 겁이 다하도록 손에서 경을 놓지 않는 것이며

  낮이나 밤이나 외우지 않는 때가 없는 것이 되느니라.”

(~~ 여기까지는 강의 생략)

 

 이에 법달이 가르침을 받고 환희용약하며 게송을 지어 찬양하였다.

 “법화경 3천 번 읽는 것이                       / 조계(曹溪) 한 마디에 자취조차 없어졌네

  부처님 오신 뜻을 알지 못하거니             / 다생동안 미친()짓 어찌 쉬오리.

  양거·녹거·백우거로 방편을 삼아             / ··(初中後)로 잘도 설했네.

  누가 있어 알았던가 이 화택(火宅) 속의    / 이 몸이 원래부터 법왕(法王)인 것을.”

여기서 조계는 혜능대사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우리를 깨닫게 해주려 오신 뜻을 알지 못하고 다생겁래로 미친 짓하고 돌아다녔다,

미친 짓을 반야심경에서는 전도몽상, 뒤집어진 잘못된 생각이라 했습니다.

초중후도 잘 설했다, 처음도 중간도 끝도 조리있게 잘 설했다,

부처님이 전법선언을 하실 때도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전도의 길을 떠나거라, 세상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그들을 어여삐 여기고 그들을 위하여 처음도 중간도 끝도 조리있게 설해라

불타는 집 속에 있는 이 몸, 사바세계 어리석음 속의 범부로 있는 내가 바로 부처이다.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바야흐로 경을 외는 중이라 할 수 있으리라.”

 법달은 이 때부터 깊은 뜻을 알고 송경하기를 쉬지 않았다.

이제야 경을 외는 중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법달은 참된 스승을 만나 삼천 번 읽은 경의 공덕을 드디어 성취하였습니다.

 

굴림을 당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세상의 굴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스스로 원해서 나온 것도 아니고, 어디 태어날지 선택한 것도 아니고,

뭘 먹고 무슨 냄새를 맡고 무슨 옷을 입을지 여러분들이 선택한 것도 아닙니다.

흰 종이를 빨간 잉크에 넣으면 빨갛게 물들고 파란 잉크에 넣으면 파랗게 물들 듯이,

그냥 여기에 태어나서 된장찌개 맛에 길들고 그 냄새에 길들고 한국 말에 길들었습니다.

때가 되니 유치원 가고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에 간다, 선택한 게 아니라 그냥 따라 간 겁니다.

그 길에서 조금이라도 처지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한 발이라도 앞서면 좋은 줄 알고 그냥 갑니다,

대학에 합격하면 잘한 줄 알고, 떨어진 사람은 큰 죄나 지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세상에 뒤처진 사람처럼 그런 열등의식을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갑니다.

나이 차면 시집가야 되는 줄 압니다, 그것 말고 인생에 다른 길이 있는 줄은 모릅니다,

시집가면 애는 자동으로 낳는 거고, 예전에는 무조건 아들 낳아야 옳은 줄 알고,

열 명 낳는 시대에는 열 명 낳아야 되는 줄 알고, 요즘엔 한둘 낳는 게 옳은 줄 압니다.

남이 집사니 나도 집 사야 되고, 남이 쌀통 사니 나도 쌀통 사야 되고,

남이 자전거 사니까 나도 자전거 사야 되고, 남 자동차 사니까 나도 자동차 산다,

늘 서로서로 쳐다보면서 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고 삽니다.

사회가 변하면 또 따라서 같이 갑니다,

개개인이 볼 때는 내가 세상을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크게 보면 사회의 큰 물결에 떠내려가는 가랑잎 같고 나무토막 같은 존재입니다.

홍수가 나면 갖가지 물건이 그 황토물에 휩쓸려 떠내려갑니다.

자기가 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물결에 그냥 쏠려 가는 겁니다.

그처럼 우리도 큰 물결에 쏠려가고 있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알 지도 못하고 그냥 따라가는 겁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처지면 큰일 나는 줄 알고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군인이 돌격 앞으로 하면 죽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앞으로 가는 것처럼,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부모가 어떻게 병드는 지는 전혀 관계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세상의 군림을 당하는 겁니다,

내가 세상을 굴리고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게 아니고 세상에 의해 내가 살아지는 겁니다.

다들 정신이 없습니다, 떠내려가기에 여념이 없으니 정신도 못 차리고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떠내려가는 중생들에게 강변으로 나오라고 밧줄을 던져준 겁니다.

용케 밧줄을 잡기는 잡았는데, 나오려면 물결을 거슬러야 하니까 힘이 들지요,

불법에 입문하고 출가를 했지만 세속의 물결을 거스르기 힘이 드니 아우성입니다,

내가 뭐 땜에 밧줄을 잡고 힘들어 하나 그러면서 놔버리고, 그래서 다시 떠내려갑니다.

그 밧줄을 쥐고 거센 물결을 헤치고 강변으로 나오면 거기엔 안온한 세계가 있습니다.

거기 서서 봐야 흘러가는 수많은 물체들이 그냥 떠내려가고 있는 줄을 알게 되지,

같이 떠내려가면 떠내려가는 줄을 모르고 무슨 경주하는 줄 아는 것입니다.

 

일곱 살에 출가해 몇십 년 동안 법화경을 독송했는데 오늘에야 그 가르침이 뭔지를 깨달았다,

밖을 찾아 그렇게 헤맸는데, 알고 보니 자기가 선 이 자리가 바로 그대로 좋더라, 본래 아무 문제도 없더라.

 

 승 지통(智通)은 수주(壽州) 안풍(安豊) 사람이다.

 처음에 능가경(楞伽經)을 천여 편이나 보았으나 삼신(三身) 사지(四智)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조사께 예배하고 그 뜻을 물었다. 조사께서 말하셨다.

 “삼신이라는 것은 청정법신(淸淨法身)은 너의 성품이요 원만보신(圓滿報身)은 너의 지혜요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은 너의 행이니

  만약 본성을 여의고 따로 삼신을 말한다면 이것은 몸은 있어도 지혜가 없다할 것이요

  만약 삼신이 제각기의 성품이 없음을 깨달으면 곧 사지보리(四智菩提)에 밝을 것이다.

  나의 게송을 들어라.”

  자성이 삼신을 갖추었으니         / 이를 밝혀 알면 사지(四智)를 이루나니

  보고 듣는 인연을 여의지 않고    / 단번에 불지(佛地)에 뛰어 오르리.

  내 이제 너를 위해 말하노니       / 밝게 믿어 길이길이 미()하지 말고

  마음 밖을 향하여 구하는 자의    / 입에 바른 보리도(菩提道) 배우지 말라.

지통스님이 어떻게 대사를 만나게 됐느냐 하는 얘깁니다.

여기서 삼신사지(三身四智)란 부처님의 세 가지 몸과 네 가지 지혜를 말합니다.

 

 통()이 다시 여쭈었다.

 “4지의 뜻을 더 알고자 하옵니다.”

 “네가 이미 3신을 알았다면 곧 4지에 밝을 터인데 어찌하여 다시 묻느냐?

  만약 3신을 여의고 따로 4지를 논한다면 이것은 지혜는 있어도 몸이 없다 할 것이니,

  이 지혜가 있다는 것이 도리어 지혜가 없는 것이 되느니라 하시고 다시 게송으로 이르셨다.

 

 “대원경지(大圓鏡智)는 성품의 청정이요              / 평등성지(平等性智)는 마음에 병 없음이며

  묘관찰지(妙觀察智)는 봄()이 공() 아님이며    / 성소작지(成所作智)는 원경(圓鏡)과 같도다.

  5·8·6·7(七識)이 과()와 인()으로 전하나       / 다만 말과 이름이 있을 뿐 실성이 없으니

  다만 전()하는 곳 따라 뜻을 두지 않으면          / 번거로이 오고 감이 나가정(那伽定)에 있음이리.”

(~~ 여기까지는 강의 생략)

 

 이에 통이 즉시에 성지(性智)를 깨닫고 드디어 게송을 지어 올렸다.

 “3신은 원래로 내 몸이 그요                              / 4지는 원래로 본마음 밝음이라.

  3 4지 원융하여 걸림 없으니                         / 사태에 응하고 형세 따름에 맡겨두네.

  수행을 일으킴은 모두가 망동이요                    / 머물러 지킨대도 또한 참이 아니라.

  스승 인()해 묘한 뜻 이제 밝으니                   / 마침내 염오(染汚)의 말조차 없네.”

본래 이미 청정하기 때문에 수행을 한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자체가 벌써 망념이다,

더럽고 깨끗한 것이 본래 없기 때문에 더럽다 하는 말조차 필요가 없어졌다.

 

 승 지상(智常)은 신주(信州) 귀계(貴溪)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견성하기를 뜻하더니 하루는 조사께 찾아와 예배드렸다.

 조사께서 물으셨다. “너는 어데서 왔으며 무슨 일을 하고자 하느냐?”

 “학인이 근자에 홍주(洪州) 백봉산(白峰山)으로 대통(大通) 화상을 찾아 뵙고

  견성성불의 뜻을 배웠사오나 아직도 의심을 끊지 못하여 이제 멀리서 찾아와 뵈옵니다.

  바라옵건대 화상께서는 자비로 가르쳐 주십시오.”

 “그곳에서 어떻게 배웠는가? 나에게 말해 보아라.”

 “지상이 그곳에 이르러 석 달이 되어도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기에

  법을 위한 생각이 간절하여 하루 저녁에 홀로 방장실에 들어가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저의 본심 본성입니까?> 하니 대통화상 말씀이 <네가 허공을 보았느냐?>

  <네 보았습니다.> <네가 허공에서 어떤 모양을 보았느냐?>

  <허공은 형상이 없는데 어찌 무슨 모양이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화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본성은 마치 저 허공과 같아서 마침내 한 물건도 가이 볼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정견이며

  한 물건도 알 수 없으면 이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며

  청···(淸黃長短)도 없고 다만 본원이 청정하고 각체(覺體)가 두렷이 밝은 것을 보면

  이것을 견성성불이라 하며 또한 여래지견(如來知見)이라 하느니라> 하셨습니다.

  학인이 비록 이 말씀을 들었사오나 아직도 알지 못하오니 바라옵건대 화상께서는 가르쳐 주십시오.”

나의 본성은 허공과 같은 것이다, 허공과 같음을 늘 보고 그렇게 알아야 진짜 아는 거다,

본다느니 안다느니 하는 견해가 들어있으면 이것은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게 아니다,

나의 본성이 있는 줄 알고 늘 사로잡혀 다녔는데, 알고 보니 나라고 할 것이 없구나라는 말과,

나라고 할 것이 본래 없으니 나라고 할 것이 없는 줄을 내가 보고 알아야 된다라는 말은 천양지차로 다른 겁니다.

하나는 나의 본성이 공이라고 하는 한 생각을 내고 그 공을 보는 것이고,

하나는 나의 본성을 보니 아무 것도 없다, 무어라고 할 것이 없다 하는 겁니다.

공이라 하는 것을 보는 것과, 볼 것이 없다는 것은 천양지차입니다.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그 스님의 말씀에는 아직도 봄()과 앎()이 있었으므로 네가 알지 못하였구나.

  내가 너에게 게송 하나를 주리라.

  한 법도 보지 않는 무견(無見)을 둠이여       / 흡사 뜬 구름이 해()를 가림과 같고

  한 법도 알지 않는 공지(空知)를 지킴이여    / 허공에서 도리어 번개를 침이라.

  이와 같은 지견이 잠시라도 일어나면         / 그릇된 앎이거니 어찌 방편을 다 알손가.

  너 마땅히 일념에서 자기 잘못 알면           / 자기의 신령한 빛이 언제나 드러나리.”

아무 것도 보지 마라 하는 것은 보지 마라는 견해를 둔 것이니 마치 뜬 구름이 해를 가리는 것과 같고,

텅 빈 줄 알아라 하면 그건 이미 아는 것을 지킴이니 허공에서 도리어 번개를 침이라.

 

 지상이 게송을 듣고 마음이 활연히 열려 곧 게송을 지었다.

 “무단히 지견을 일으켜                           / ()에 착하여 보리를 구하였네.

  마음에 한 생각 <깨달음> 두면               / 미혹했던 옛날보다 무엇이 나으리.

  깨달음의 본원체 이 자성이                    / 경계를 따라서 떠돌아 다니니

  만약에 조사실에 들지 않았던들              / 아득히 두 갈림길 헤매었으리.”

무단히 안다는 견해를 일으켜, 모양에 집착해 깨달음을 구하였구나,

깨달음이다 하는 어떤 생각을 두면 이것은 미혹했던 옛날과 하나도 다른 게 없다,

이렇게 소위 공에 빠졌는데, 공견을 일으킨 이러한 것들을 깨뜨려 줬다 이런 얘기입니다.

 

(제21강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