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7. 육조단경

[법륜스님의 '육조단경'] 제19강 참청한 기연 1

상원통사 2021. 10. 28. 20:22

육조단경 일곱 번째 강의시간이 되겠습니다.

참청한 기연은 제자들이 육조 혜능대사를 찾아뵙고 문답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그런 인연을 말합니다.

 

6. 참청한 기연

 

 대사께서 황매(黃梅)에서 법을 받고 소주(韶州)에 이르시니,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으나

 다만 유지략(劉志略)이라는 유가의 선비가 있어서 매우 후하게 예우하였다.

 지략의 고모에 여승이 된 이가 있어 이름은 무진장(無盡藏)이라 하였는데 항상 대열반경을 지송하고 있었다.

 대사는 경 읽는 것을 잠시 듣고, 곧 그 오묘한 뜻을 아시고 그에게 해설하여 주었더니 그 비구니가 경을 듣고와서 글자를 물었다.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글자를 모르니 뜻을 물어라하셨다.

 비구니가 말하기를 글자도 모르고서 어찌 뜻을 압니까?” 한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의 묘한 진리는 문자에 상관없느니라.”

 이에 비구니는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온 동리 노덕에게 이 이야기를 퍼뜨렸다.

 그리고 이분은 필시 도인이니 마땅히 잘 받들어 공양하여야 한다하였다.

 그 때에 진무후(晋武侯)의 현손(玄孫)이 되는 조숙량(曹淑良)이 그곳에 살고 있었는데 주민들과 함께 다투어 찾아와서 예배드렸다.

 그 무렵 보림(寶林)의 옛 절은 수()나라 말엽의 병화로 타 버려 빈터만 남아 있었는데

 이 옛터에 다시 정사를 짓고 대사를 맞아 계시게 하니 얼마 안되어 보방(寶坊)이 다 이룩되었다.

 대사께서 이곳에 머무신지 9개월 남짓하여 또 악당무리들이 쫒아 왔다.

 대사께서 앞산으로 피하시니 저들이 불을 질러 초목이 모두 타올랐다.

 대사께서는 돌 틈으로 밀고 들어가 몸을 숨기어 난을 면하셨다.

 지금 그 돌에는 대사께서 가부좌하고 앉으신 무릎 흔적과 옷자락 무늬가 남아있어 <피난석>이라고 부르고 있다.

 대사께서는 오조께서 <()를 만나면 머물고 회()를 만나면 숨으라> 하신 부촉을 생각하시고 두 고을(二邑)에 몸을 숨기셨던 것이다.

(~~ 여기까지는 강의 생략)

 

 승 법해(法海)는 소주(韶州) 곡강(曲江) 사람이다. 처음 조사께 참예하여 물었다.

 “즉심즉불(卽心卽佛)의 뜻을 가르쳐 주십시오.”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전념(前念)이 나지 않는 것이 마음에 즉()함이요, 후렴(後念)이 멸하지 않는 것이 불에 즉함이며

  일체상(一切相)을 이룸은 마음에 즉함이요 일체상을 여읨이 불에 즉함이니

  내가 이를 다 말하자면 겁을 다하여도 다 말하지 못하느니라. 내 게송을 들어라.

즉심즉불이란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뜻입니다.

전념이 나지 않는 것,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니 불생이고,

후념이 멸하지 않는 것, 한 생각이 멸하지 않으니 불멸입니다.

한 생각이 나지 않으면 한 생각이 멸할 일도 없으니 이것이 불생불멸의 도리입니다.

전념 후념은 앞에서도 자주 나왔습니다,

명상좌가 바릿대를 훔치려고 바릿대에 손을 댈 때,

손대기 전 훔치려고 한 생각을 낸 것은 악이고, 손대는 순간 생각이 바뀌어 법을 구하는 마음을 낸 것은 선입니다.

전념은 악이고 후념은 선인데, 어떤 것이 명상좌의 본래 면목(본 마음)일까요,

전념도 떠나고 후념도 떠난다면 거기 바로 우리들의 참모습이 있습니다.

전념이 일어나지 않으니 불생이요 후념이 멸하지 않으니 불멸이다,

한 물건은 일체상을 이루기도 하고 일체상을 여의기도 한다,

일체상을 이루고 일체상을 여의는 것 이것이 다 우리들의 자성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에 즉함이 이것이 혜()요            / 불에 즉함이 이것이 정()이니

  정과 혜가 서로 같아서                      / 그 뜻이 항상 청정하니라.

  나의 이 법문을 깨달음은                   / 너의 습성(習性)을 말미암이니

  용()은 본래로 남이 없음(無生)이라.   / ()으로 닦음, 이것이 정()이니라

심즉불 마음이 곧 불이니 혜가 즉 정이고 정이 즉 혜가 되겠지요,

습성이라는 것도 본성을 여의지 않고 본성에 통해있습니다.

우리 꿈은 허망한 것이지만 그 허망함마저도 사실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고 했던 것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이,

물결이 바닷물을 떠나지 않고, 거품이 물을 떠나지 않고, 그림자가 물체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거품이 물은 아니지만 거품은 물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듯,

습성이 본성은 아니지만 그 습성이 불성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성이 체라면 습성은 용이다, 용이란 체의 작용이니 습성은 불성의 드러남이다,

체가 본래 불생불멸한것이니 거기서 일어난 용도 본래로는 남()이 없는 것입니다.

쌍으로 닦음이란 체와 용을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닦는 것을 말합니다.

체가 정이고 용이 혜이니, 체와 용을 쌍으로 닦는 것은 정과 혜를 쌍으로 닦는다(정혜쌍수)는 뜻입니다.

이것이 곧 바름이고 바른 수행입니다.

 

 법해는 언하에 대오하고 게송을 지어 찬탄하였다.

 “이 마음이 원래 불인 것을              / 깨닫지 못하고서 스스로 굴()하였네.

  내 이제 정과 혜의 원인을 알아서    / 쌍으로 닦으니 모든 상을 여읜다.”

이 마음이 본래 불인 것을, 이제까지 마음 떠나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고 있었구나,

법해는 혜능대사가 열반하실 때까지 곁에서 모신 최고의 제자로

열반 다비식 등 여러 기록들도 다 법해스님이 중심이 되어 하셨습니다.

 

 승 법달(法達)은 홍주(洪州) 사람이다. 7세에 출가하여 항상 법화경을 외워왔다.

 조사를 뵈옵고 예배할 적에 머리가 땅에 닿지 않으니 조사께서 꾸짖었다.

혜능조사를 찾아와 절을 하는데 머리가 땅에 닿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는 어릴 때부터 출가해서 오랫동안 승려생활을 했다는 자부심,

법화경을 삼천 번이나 읽었다고 하는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을 받을 사람은 일자무식의 나뭇꾼 출신, 남쪽 오랑캐 출신,

나이 40이 되어서야 머리를 깎은 늦깎이, 체계적인 불교공부도 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것들이 마음속에 있으니까 절은 하기는 하지만 머리가 땅에 닿지 않았다,

공손하게 하지 않고 그냥 대충 예를 갖추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절을 하여도 머리를 땅에 붙이지 않으니 절을 아니함과 같지 않느냐?

  네 마음속에 반드시 한 물건이 있구나! 네가 익혀 온 일이 무엇이냐?”

그럴 바에야 절을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형식적으로 대충 절을 하는 걸 보니 네 마음속에 뭔가 나다 하는 게 있구나,

절이라는 것은 사실은 몸을 숙이는 게 아니라 마음을 숙이는 겁니다.

 

 법달이 여쭈었다.“법화경을 3천 번 외웠습니다

법화경은 굉장히 긴 경전인데 이것을 삼천 번 읽었다면 굉장한 겁니다.

하루에 한 번씩 읽어도 10년을 읽어야 합니다.

 

 조사께서 이르셨다.

 “네가 만약 경을 만 번 외워 경의 뜻을 알았더라도 그것으로 자랑을 삼지 않으면 나와 더불어 함께 행하려니와,

  네가 이제 그 일을 자부하여 도무지 허물되는 줄을 모르는구나! 내 게송을 들어라.

경의 뜻이 아상을 버리는 것이니 읽으면 읽을수록 아상이 더 꺾여야하는데,

읽었다는 상을 지어 그 상을 더욱더 높이 받드니, 만 번 읽어봐야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예배는 본래 아만(我慢) 콧대 꺾자는 것    / 어찌하여 머리가 땅에 닿지 않는가?

  아()가 있으면 곧 죄가 생기고             / ()을 잊으면 복이 한량 없네.”

예배는 본래 아만을 꺾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아가 있으니 머리가 땅에 닿지 않는 것이다,

나다 하는 게 있으면 곧 죄가 생기고, 온갖 잘못과 번뇌는 다 그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금강경을 삼천 번 읽었다 하더라도 읽었다하는 그 공을 잊어야 복이 한량없는 것이다,

이것을 무주상보시 또는 무위의 행이라 말합니다.

 

 조사께서 또 말씀하셨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법달입니다.”

 “네 이름이 법달이기는 하나 아직 법에는 달하지 못하였구나! 다시 내 게송을 들어라.

 

  너 이제 이름을 법달이라 하나           / 부지런히 외울 뿐 쉬지 못했네.

  공연히 외움은 소리만을 따르는 것.    / 마음을 밝혀야만 보살이 된다.

여기서 쉬다()소리와 빛깔 등 경계에 끄달려 생각을 내는 것을 쉰다는 뜻입니다.

또는 마음으로 받아가지지 못했다는 의미도 있으니,

쉬지 못했다는 것은 마음이 숙여지지 못했다,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아만과 콧대를 꺾지 못했다는 얘기도 됩니다.

공연히 소리높여 외우는 것은 소리와 문자만 따르는 것이 된다,

아만과 콧대를 세우자고 삼천 배, 만 배 해봐야 공연히 무릎만 아플 뿐이고,

아만 콧대 꺾지 못하고 경만 읽으면 주위 사람에게 시끄럽고 목만 아플 뿐이다,

마음을 밝혀야 보살이 된다,

나라는 것을 버리고 내 것이다 하는 것도 버리고 나 옳다 하는 것도 버려야 한다,

  너 나와 더불어 인연 있으니           / 내 이제 너 위하여 말하노라.

  부처님은 말 없음을 오직 믿어라.    / 입에서 연꽃이 피어나리라

부처님은 팔만 사천 법문을 말하셨지만 사실은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즉 부처님의 말씀에 집착하지 말고 전하고자 하는 그 뜻을 깨달아야 된다,

달을 가리킬 때는 달을 봐야지 손가락 끝을 봐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해서 법달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혜능대사께 귀의하게 됩니다.

 

 법달이 게송을 듣고 깊이 뉘우치고 사과하였다.

 “이제부터는 마땅히 겸손하고 일체를 공경하겠습니다.

  제자는 법화경을 외워도 아직 경의 뜻을 알지 못하므로 마음 한 구석에 항상 의심이 있사옵니다.

  화상께서는 지혜가 광대하시니 바라옵건대 경의 뜻을 간략히 말씀하여 주십시오.”

 “법달아, 법인즉 본래 심히 달하였으나 네 마음이 달하지 못하였으며 경은 본래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네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는구나!

  네가 이 경을 왼다니 이 경은 무엇으로 종()을 삼는다고 생각하느냐?”

 “학인은 근성이 어둡고 둔하여 이제까지 다만 겉으로 글자만 따라 외웠을 뿐이오니 어찌 종취를 아오리까?”

 “그렇다면 나는 글자를 모르니 네가 경을 한번 외워 보아라. 내 마땅히 너를 위하여 해설하리라.”

 이에 법달이 고성으로 경을 외워 비유품까지 이르니 조사 말씀하셨다.

 “그만 그쳐라, 이 경은 원래 인연출세(因緣出世)로 종을 삼는 것이니, 비록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나 다시 이를 넘지 않는다.

  인연이라 함은 무엇일까?

  경에 이르기를 <제불 세존이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이 세상에 출현하신다> 하였으니 일대사라 함은 부처님의 지견(知見)이다.

  세상 사람들이 밖으로 미혹하여 상()에 착하고 안으로 미혹하여 공()에 착하니

  만약 능히 상에서 상을 여의고 공에서 공을 여의면 즉시 내외로 미혹하지 않을 것이니

  만약 이 법을 깨달아 한 생각 마음이 열리면 이것을 불지견(佛知見)을 열었다 하느니라.

  불()이란 깨달음()이라는 뜻이니 나누면 네 가지가 되느니라.

  깨달음의 지견을 열며,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며, 깨달음의 지견을 깨닫게 하며, 깨달음의 지견에 들어가게 함이니,

  만약 깨달음의 지견을 열어 보임을 듣고 문득 능히 깨달아 들어가면 곧 깨달음의 지견이 본래의 참성품의 나타남 이게 되나니,

  너는 경의 뜻을 그릇 알지 않도록 삼가라.

  경에 <열어 보이고 깨달아 들어간다> 이르심을 보고, 이것은 부처님의 지견일 뿐, 우리들 분수에는 맞지 않는다> 하는 이런 견해를 짓는다면

  이는 바로 경전을 비방하고 부처님을 허(, 헐 훼)는 것이니라.

 

  저가 이미 불이며 이미 지견을 갖추었으니 어찌 다시 열()것이 있으랴.

  마땅이 너는 불지견이라는 것은 다만 너 자신의 마음일 뿐 다시 다른 불이 없는 것임을 믿어라.

  대개 일체중생이 스스로 자기광명을 가리고 육진(六塵) 경계를 탐애하여

  밖으로 반연하고 안으로 흔들리면서 온 생애를 쫓고 쫓기며 시달려도 도리어 달게 여기니,

  이에 세존께서 삼매(三昧)에서 일어나시어 여러 가지 간곡한 말씀으로 저들에게 권하여 편안히 쉬도록 짐짓 수고하시는 것이다.

  부디 밖을 향하여 구하지 말라.

  불과 더불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니 이 까닭에 <불지견을 열라>하신 것이며

  나도 또한 모든 사람에게 권하기를 <자기 마음 속에서 항상 불지견을 열라>하는 것이다.

  세간 사람이 마음이 삿되고 어리석으며 미혹하여 죄를 짓되, 입은 선하고 마음은 악하며

  탐심(貪心) 진심(嗔心) 질투심과 아첨과 아만으로 남을 침해하고 일을 해쳐서 스스로 중생지연을 여나니,

  만약 능히 마음을 바르게 하고 항상 지혜를 내어 자기 마음을 비추어 보아

  악한 짓을 그치고 착한 일을 행하면 이것이 스스로 불지견을 여는 것이니라.

  너는 모름지기 생각마다 불지견을 열고 중생지견을 열지 않도록 하라.

  불지견을 열면 이것은 즉시 세간에서 뛰어남이요, 중생지견을 열면 이것이 곧 세간이니라.

  네가 만약 다만 힘들여 경이나 외고 그것으로 공과를 삼는다면 이우(犛牛)가 제 꼬리를 사랑하는 거와 무엇이 다르랴!”

 

 법달이 여쭈었다.

 “만약 그러하오면 다만 뜻만 알도록 하고 수고롭게 경을 외울 것은 없겠습니까?”

법달이 법화경에 대해서 묻습니다,

자기가 법화경을 삼천 번 외웠지만 사실은 법화경에 대해서 모르는 게 참 많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니 혜능대사는 나는 글자를 모르니 네가 읽어라’,

법달이 경을 읽고 혜능대사는 옆에서 듣고 있다가, 법화경의 대의가 뭔지 종취가 뭔지 하나하나 설명을 해줍니다,

자기는 삼천 번을 읽어도 깊이 있는 뜻을 알지 못하고 수박 겉핧기 식으로 공부했는데,

오늘 대사의 법문을 들으니 정말 눈물이 나도록 감격하고는 질문을 합니다,

뜻만 알면 되니 공연히 힘들게 외울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러자 대사는 경에 무슨 허물이 있기에 외우느니 마느니 하느냐’,

우리는 외워야 된다 또는 뜻만 알면 되지 외울 필요가 없다, 이렇게 양변만 취합니다.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경에 무슨 허물이 있건대 너의 경 외는 것을 못하게 하랴.

  대개 미와 오()가 사람에게 있고 손해되고 이익되는 것이 모두 자기에 달렸으니

  입으로 외고 마음으로 행하면 곧 이것이 경을 굴리는 것이요,

  입으로는 외워도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이것은 경이 너를 굴리는 것이니 다시 내 게송을 들어라.

어리석고 깨닫고 손해되고 이익되는 것이 사람에게 있지 경에 있는 게 아니다,

입으로 외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몸뚱이로 행하게 되면 이거야 말로 경을 굴리는 것이다.

 

  마음이 미혹하매 법화경에 굴리우고                 / 마음을 깨달으니 법화경을 굴리누나.

  아무리 경 외워도 자성은 못 밝히면                  / 뜻과는 오히려 원수같이 등이 졌네.

  무념(無念)으로 경 외우니 바른 길이 두렷하고    / 유념(有念)으로 경 외우니 그릇된 길 헤매누나,

  유념 무념 모두 다 계교(計較) 않으니               / 길이 길이 백우거(白牛車)를 타고 노니네.”

법화경에는 삼승에 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초기 대승불교의 불자들은 자신들은 대승이고 기존의 불교는 소승이다,

우리는 보살승이고 너희는 성문승 연각승이라 했는데,

성문이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

연각이란 부처님 말씀의 이치를 스스로 탐구를 해서 깨달은 사람을 말합니다.

대승은 법문 듣고 공부할 뿐 아니라 중생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나만 해탈의 길로 가는 게 아니라 일체중생을 다 태워서 함께 간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깨닫는 것과 중생 구제하는 것을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본다,

성문 연각은 아라한밖에 될 수가 없지만 보살행을 닦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

반야부 경전이 출현할 당시의 초기 대승불교인들은 이렇게 소승을 비판하고 대승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인정받고 사회의 주류가 되자 굳이 소승에게 시비하지 않고, 오히려 소승까지도 수용하게 됩니다.

, 성불의 길을 가는 데는 성문의 길, 연각의 길, 보살의 길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전에는 성문과 연각의 길은 절대 깨달을 수 없고 부처가 될 수 없다 했는데 이제는 그 길도 성불로 가는 하나의 길이다,

그러나 성문과 연각은 일인용 수레, 자기 몸만 겨우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그런 수레이고,

보살승은 수많은 사람을 싣고 가는 그런 대승적인 길이다,

전에는 못 간다 했지만 이제는 가기는 가는데 조금 수준이 낮다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세 가지 길이 사실은 하나의 길, 바로 부처되는 길이다, 이걸 일불승(一佛乘)이라 합니다.

성문과 연각은 아라한 되는 거고 보살만 부처된다, 이렇게 목적지가 다르다고 하다가,

목적지는 다 부처된다고 하는 하나의 길이지만 도달해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이렇게 하여 법화경에서 회삼귀일(會三歸一)을 주장했는데, 이렇게 비유합니다.

성문승은 양이 끄는 수레, 연각승은 사슴이 끄는 수레, 보살승은 소가 끄는 수레입니다,

큰 부자집에 불이 났는데 그 안에서 아이들이 장난을 치고 놀고 있습니다.

불났다, 빨리 나오너라하면 애들이 놀라 우왕좌왕하다가 다칠까봐,

대문 앞에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도 있다, 수레를 하나씩 줄테니 나와라하니까

아이들이 불난 것은 생각도 안 하고 수레 타는 재미로 전부 대문 밖으로 나옵니다.

불러낼 때는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를 주겠다고 말했지만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자 실제로는 전부 흰 소가 끄는 수레를 줬습니다.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는 각각 성문 연각 보살에 비유되고,

흰 소가 끄는 수레는 일불승을 말합니다.

어떤 수레를 타려고 오든지 불구덩이에서 나오기만 하면 다 흰 소가 끄는 수레를 준다,

즉 어떤 길이든 다 부처가 될 수가 있다, 배척하던 소승을 대승의 품속으로 수용한겁니다.

이렇게 볼 때 법화경은 초기 대승경전이 아니고 상당히 뒤에 나온 대승경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무념으로 경을 외우면 해탈의 길이 뚜렷해지고,

상에 집착하여 바라는 마음으로 경을 왼다면 가더라도 그른 길로만 가게 된다.

 

(제20강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