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0강에서 계속)
하루는 지상이 조사에게 물었다.
“부처님은 삼승법(三乘法)을 말씀하셨사온데 이제 조사께서는 또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말씀하시니 제자는 알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가르쳐 주십시오.”
“너 스스로 본심을 볼 것이요 바깥 경계에 착하지 말라.
법에는 사승(四乘)이 없는 것인데 사람 마음에 스스로 등차를 두는 것이다.
보고 듣고 마냥 외는 것은 소승이고 법을 깨달아 뜻을 아는 것은 중승이며 법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것은 대승이요
만법을 다 통하여 만법을 다 갖추어 일체에 물 안들고 모든 법상을 여의어 하나의 얻음도 없는 것은 최상승이니라.
승(乘)이라 함은 행한다는 뜻이요 말로 다투는데 있는 것이 아니니라.
너는 모름지기 스스로 닦을 것이요 나에게 묻지 말라.
언제나 자성은 스스로 여여(如如)하니라.”
이제 상이 예배드리고 조사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항상 곁에서 모시었다.
승 지도(志道)는 광주(廣州) 남해(南海) 사람이다. 조사에게 청익(請益)하여 말씀드렸다.
“학인은 출가하면서 열반경을 보아 이제 10여 년이 되었사온데 아직 대의를 밝게 알지 못하옵니다.
바라옵건대 화상께서는 가르쳐 주십시오.”
“네가 어느 대목을 모르느냐?”
“모든 행(行)은 무상하니 이것은 생멸하는 법이라.
생멸이 없어지니 적멸(寂滅)이 낙(樂)이 된다고 한데 의심이 있습니다.”
“네가 어떻게 의심이 드느냐?”“제가 알기로는 일체 중생은 모두가 두 몸이 있사온데 그것은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입니다.
색신은 무상(無常)하여 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지만, 법신은 유상(有常)하여 앎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고 하옵는데
경에 이르기를 <생멸이 없어지니 적멸이 낙이 된다> 하였으니
이는 어느 몸이 적멸이며 어느 몸이 낙을 받는 것이온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색신이라 할진대 색신은 멸하면 사대(四大)로 분산하는 것이오니 이것은 온전히 고가 있을 뿐 낙이라 말할 수 없사오며,
만약 법신이라 할진대 법신은 적멸하여 곧 초목이나 와석(瓦石)과도 같사옵거늘 누가 있어 낙을 받겠사오며
또한 법성은 이것이 생멸의 체(體)요, 오온(五蘊)은 생멸하는 작용이오니
한 체에 다섯 작용(五用)으로 생멸이 떳떳(常)할지니 생이란 체에서 작용을 일으킴이요,
멸이란 작용을 거두어 체로 돌아감이옵니다.
만약 다시 생한다고 한다면 유정(有情)의 무리가 끊어지지 않고 멸하지 않을 것이요,
만약 다시 생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영영 적멸로 돌아가 무정지물(無情之物)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하온즉 일체 제법이 열반에 묶이게 되어 오히려 나지도 못하거늘 어찌 낙이라 할 수 있사옵니까?”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부처님의 제자인데 어찌 외도의 법을 배워서 단상(斷常)의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최상승법을 의논하느냐?
너의 말에 따른다면 색신 밖에 따로 법신이 있으며 생멸을 여의고 적멸을 구한다는 것이며
또한 열반이 항상되고 즐겁다는 것도 짐작하기를 몸에 있어 수용하는 것이라 말하니
이것은 곧 생사에 집착하고 세간락에 탐착하는 것이다.
너는 이제 마땅히 알라. 부처님께서는 세간의 모든 미혹한 사람들이
오온(五蘊)이 화합한 모양을 가져 자기 참된 모양으로 삼고 일체법을 분별하여 바깥 모양을 삼아서
생은 좋아하고 죽음은 싫어하여 끊임없이 생각생각 흘러가며,
이것이 모두가 몽환(夢幻)이며 허무한 거짓임을 알지 못하고 부질없이 윤회(輪迴)를 받아서
상락(常樂)인 열반을 도리어 괴로운 것으로 잘못 알고, 종일 밖을 향하여 달리며 구하여 헤매고 있음으로
부처님은 이를 불쌍히 보시고 마침내 열반진락(涅槃眞樂)을 보이신 것이다.
찰나 동안의 나는 상(生相)도 없으며, 찰나 동안의 없어진 상(滅相)도 없으며
다시 가이 없앨 생멸도 없는 이것이 적멸이 현전한 것이다.
현전하였을 때 또한 현전하였다는 헤아림도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상락이니라.
이 낙을 받을 자도 없으며 또한 받지 않은 자도 없으니 어찌 하나의 체에 다섯 가지 용이라는 이름이 있으랴.
그렇거늘 하물며 다시 열반이 모든 법을 묶어서 영영 나지못하게 한다고 하랴.
이런 말은 바로 부처님을 비방하고 법을 허는 것이 되느니라. 내 게송을 들어라.
위 없는 대열반이 두렷이(圓) 밝아 / 언제나 고요히 항상 비침을
범부는 이를 들어 죽음이라 하고 / 외도는 집착하여 단멸(斷滅)을 삼고
이승(二乘)을 구하는 모든 이들은 / 이를 가리켜 무작(無作)이라 하나
뜻으로 헤아리는 이들 모두는 / 62견(見)을 일으키는 근본이 되며
망령스레 거짓 이름 세움이 되니 / 이를 어찌 진실한 뜻이라 하랴.
오직 하나 과량인(過量人) 여기에 있어 / 통달하여 취함이나 버림이 없어
오온법과 오온의 그 속의 나(我)와 / 밖으로 나타나는 온갖 색상(色像)과
여러 가지 낱낱의 음성의 상이 / 모두가 평등한 몽환임을 알아
범부니 성인이니 견해 안 내고 / 열반이란 알음알이 짓지 않으며
이변(二變)과 삼제(三際)를 모두 다 끊어 / 모든 근(根)에 응하여 항상 쓰지만
쓴다는 생각을 안 일으키며 / 일체법을 낱낱이 분별하면서
분별하는 생각을 내지 않으니 / 겁화(劫火)로 바다 밑이 불태워지고
폭풍이 불어닥쳐 산 끼리 부딪쳐도 / 이것이 진상(眞常)이며 적멸락(寂滅樂)이라
열반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내 이제 억지로 말을 지어서 / 너에게 삿된 소견 버리게 하니
말을 따라 알음알이 내지 않으면 / 소분(少分)이나 알았다 허락하리라.”
지도가 게송을 듣고 크게 깨닫고 뛸 듯이 기뻐하며 절을 하고 물러갔다.
(~~ 여기까지는 강의 생략)
행사(行思)선사는 성이 유(劉)씨니 길주(吉州) 안성(安城) 사람이다.
조계의 법석이 성황함을 듣고 곧바로 와서 참예하면서 조사에게 물었다.
“마땅히 어떻게 힘써야 계급에 떨어지지 않으오리까?”
“너는 이제까지 어떻게 지어왔느냐?”
“성제(聖諦)도 또한 짓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무슨 계급에 떨어졌느냐?”
“성제도 오히려 안하옵거늘 무슨 계급이 있사오리까!”
‘계급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힘을 써야 하느냐’고 물으니 ‘이제까지 어떻게 지어왔느냐고 반문합니다.
‘성스럽다 하는 것(聖諦)도 짓지 않았다’ 하니 ‘너는 무슨 계급에 떨어졌느냐’고 또 묻습니다.
그러니 ‘성스럽다 하는 것도 짓지 않았는데, 무슨 계급이라 하는 것이 있겠느냐’고 대답합니다.
계급이라는 게 없으면 떨어질 데가 없습니다, 떨어질 데가 없으니 안 떨어지려고 노력할 것도 없습니다.
이 문답이 이해가 됩니까? 그럼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안심입명의 도를 구하러 왔습니다’, 이건 ‘지금 내 마음이 불안하다’는 말이지요,
‘이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편안하게 할 수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불안한 마음을 이리 내 놔라’ 하니까,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답합니다.
불안한 마음이 없다면 불안한 것을 편안하게 할 필요도 없으니, ‘내 이미 네 마음을 편안하게 했도다’ 이렇게 답합니다.
‘편안하게 했도다’ 란 편안하게 할 게 없다는 얘기입니다.
‘어떻게 해야 계급(지옥)에 떨어지지 않습니까?’하니까,
‘너는 무엇을 짓느냐?’, ‘저는 성스럽다 하는 것도 짓지 않습니다’,
‘그럼 너는 어디에 떨어졌느냐?’, ‘성스럽다 하는 것도 짓지 않는데 무슨 지옥이니 천당이니 하는 것을 짓겠습니까?’
성스럽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데 무슨 지옥이니 천당이니 하는 생각을 내겠습니까?
지옥이라는 생각도 내지 않으니 떨어질 지옥도 없고, 떨어질 지옥이 없으니 지옥에 안 떨어지는 방법을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모래로 밥을 하면 몇 시간 만에 됩니까?’라 물으면 ‘밥이 안 됩니다’라 대답하면 되지요,
모래로 밥을 지을 수 있다면 몇 시간이라 대답해야겠지만 밥이 안 되니 그런 말은 필요가 없습니다.
‘성제도 오히려 안 하옵거늘 무슨 계급이 있사오리까?’, 계급이라는 게 없다는 말이지요,
계급이라는 게 없으니 ‘어떻게 하면 계급에 안 떨어지느냐’ 이런 말이 필요 없지요, 필요 없으니 문답이 그걸로 끝난겁니다.
‘이 세상은 누가 창조했습니까?’,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누가’라는 번뇌가 일어나지만,
이 세상의 한 물건도 만들어 진 것은 없는 줄 아는 사람에게는 ‘누가’라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질문을 하면서 거기에 대해 대답해주기를 원할 것입니다.
물론 지식적인 것은 대답을 해야 하지만, 그 질문이 번뇌일 때는 제가 다른 걸 물어봅니다.
‘왜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딴 질문을 합니까, 묻기는 내가 물었는데 왜 되묻습니까?’ 처음엔 이렇게 생각하는데,
몇 번 되묻다보면 자기 질문 자체가 번뇌이고 망견인 줄을 알게 됩니다,
망견에는 답이 없습니다, 망견이 망견인 줄 알면 그걸로 끝이지요.
이에 조사께서 그가 법그릇(法器)됨을 깊이 인정하시고 행사를 대중의 상수(上首)로 삼으셨다.
그후 어느 날 행사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제부터 마땅히 일방을 나누어 맡아 교화하여 이 법이 끊어지지 않게 하라” 하셨다.
행사는 법을 받고는 드디어 길주 청원산(靑原山)에 들어가 법을 펴고 크게 교화하였다.
(~~ 여기까지 강의 생략)
회양(懷讓)선사는 금주(金州) 두(杜)씨의 아들이다.
처음에 숭산(崇山) 안국사(安國師)를 찾아갔더니 안국사는 회양을 조계로 인도하여 조사에게 참배하게 하였다.
조사께서 물었다 “어데서 왔느냐?”
“숭산에서 왔습니다.”
“어떤 물건이 이와 같이 왔는가?”
회양선사는 출가하여 다른 스승 밑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 스승이 혜능대사를 소개해줬습니다.
오기는 분명 왔는데,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니 대답할 말을 찾지를 못합니다.
‘회양이 왔다’ 하면 이름이 온 것이고, ‘몸뚱이가 왔다’ 하면 시체가 온 것이고,
‘혼이 왔다’ 하면 귀신이 온 것이 되니, 대답할 말이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돌아갔다가 몇 년이 지난 뒤에 다시 왔습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고 말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그것은 물건이라고도 이름 붙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혜능의 법을 계승했습니다.
“가이 닦아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냐?”
“닦고 증득함이 없지는 않사오나 때 묻거나 물들여지지는 않습니다.”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때 묻지도 물들지도 않는 이것이 모든 부처님께서 두호하여 생각하시는 바이시니라.
네가 이미 이러하고 내가 또한 이러하다.
서천 반야다라(般若多羅)존자가 예언하시기를 <네 발밑에 한 망아지가 나와서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이리라>하였으니
너는 마땅히 명심하고 속히 법을 펴려고 서두르지 말라.”
이에 양이 활연히 계합하고 조사를 좌우에서 모시기를 15년에 이르면서 날로 깊고 오묘한 경지를 더하여 갔다.
후에 남악(南嶽)으로 가서 선종을 크게 드날렸다.
(~~ 여기까지는 강의 생략)
영가현각(永嘉玄覺)선사는 젊어서부터 경론을 배워 천태지관(天台止觀) 법문에 정통하였는데 유마경을 보다가 심지(心地)를 밝혔다.
마침 조사의 제자 현책(玄策)과 서로 만나 법을 담론하니 그의 하는 말이 은근히 여러 조사의 뜻에 맞음을 보고 현책이 말하였다.
“인자의 법사는 누구입니까?”
“제가 방등경론(方等經論)을 배울 때는 각각 스승이 계셨으나 뒤에 유마경에서 불심종(佛心宗)을 깨치고는 아직 증명하신 분이 없습니다.”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에는 그럴 수도 있었지만 위음왕불 이후에는 스승 없이 혼자 깨친 것은 모두가 천연외도(天然外道)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인자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 주십시오.”
“나의 말로는 경솔하오. 지금 조계에는 육조대사가 계셔서 사방에서 학자가 운집하여 법을 받는 터이니 만약 인자가 가겠다면 함께 가리다.”
영가 현각선사는 젊어서부터 천태종 수행을 익혀 정통했지만 유마경을 보다가 자기 심지를 밝힌 분인데,
다른 경 공부 할 때는 여러 스승이 계셨지만, 유마경은 혼자서 깨우쳤으니 증명해준 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현책은 육조 혜능을 찾아가서 검증(인가) 받도록 권유합니다.
이에 현각이 드디어 현책과 함께 와서 조사께 참예하였는데 각은 조사를 세 번 돌고 석장(錫杖)을 떨치고 서 있었다.
그 때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대개 사문(沙門)이라는 자는 3천 위의(威儀)와 8만 세행(細行)을 갖추어야 하는데
대덕은 어디에서 왔기에 이와 같이 큰 아만을 부리는가?”
각은 대답하였다 “생사(生死) 일이 크며 무상이 신속합니다.”
“어찌하여 남이 없음을 체달(體達)하여 신속한 무상이 없음을 알지 못하느냐?”
“체달한 즉 남(生)이 없고 요달한 즉 본래로 빠름이 없습니다.”
보통은 엎드려 절을 해야 하는데 현각은 세 바퀴 돈 후 서있기만 하니 왜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현각 : 생사를 뛰어넘는 게 발등에 떨어진 불인데 무슨 예의범절 같은 소리를 하십니까?
혜능 : 남이 없는 줄 알면 생멸은 뛰어넘을 것도 없다, 그러면 신속한 무상이 없음을 알지 않느냐,
현각 : 그것을 체달하게 되면 남도 없고 요달도 없습니다, 즉 생멸도 없고 빠르고 더딤도 없습니다.
조사께서 “옳다. 옳다” 하시니 이에 현각이 위의를 갖추어 예배하고 곧 하직을 드리니 조사가 말씀하셨다.
“너무 속하지 않느냐?”
“본래 스스로 동함이 없거니 어찌 속함이 있겠습니까?”
“누가 동하지 않는 것을 아느냐?”
“스님께서 스스로 분별을 내십니다.”
“네가 참으로 무생(無生)의 뜻을 알았구나!”
“무생에 어찌 뜻이 있겠습니까?”
“뜻이 없는 것을 누가 분별한다는 말이냐?”
현각은 이렇게 단박에 알아들었고, 이제 깨쳤으니 돌아가면 되지요,
인가를 받으려 왔고 받았으니 가면 되는데, 당장 가겠다니까 대사가 물어봅니다,
혜능 : 너무 빠르지 않느냐?
현각 : 본래 움직임이 없는데 무슨 빠르고 더딤이 있겠습니까?
혜능 : 동함이 없는 줄을 내가 안다는 것은 벌써 분별이다, 네가 지금 분별하지 않느냐?
현각 : 제가 분별 낸다고 하는 분별을 스님께서 내고 계십니다.
혜능 : 네가 정말 나지 않는 그 뜻을 알았구나.
현각 : 무생이란 남이 없는 것입니다, 남이 없는데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혜능 : 뜻이 없다 하는 분별을 네가 또 내고 있지 않느냐?
“분별이 또한 뜻이 아닙니다.”
“좋다. 하룻밤 쉬어 가거라.”
이로부터 사람들은 현각을 일숙각(一宿覺)이라 하였으며, 각은 후에 증도가(證道歌)를 지었는데 세상에 크게 성행하였다.
선자(禪者) 지황(智隍)은 처음 오조께 참예하고 스스로 삼매를 얻었다 생각하여 암자에서 20년 동안을 장좌(長坐)하고 있었는데
조사의 제자 현책이 행각하던 중 하삭(河朔)에 이르러 지황의 이야기를 듣고 암자를 찾아가서 물었다.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시오?”
황(隍)이 대답하였다. “정(定)에 드오.”
“당신이 정에 들 때 유심(有心)으로 들어가오? 무심(無心)으로 들어가오?
만약 무심으로 든다 할진대 생각없는 일체 초목이나 돌부스러기까지 모두가 마땅히 정을 얻었을 것이요,
만약 유심으로 정에 든다 한다면 일체 생명있는 것이 모두 정에 얻을 것이 아니겠소?”
“내가 바로 정에 들 때는 있다 없다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있다 없다 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지 못한다면 이것은 바로 항상 변함없이 있는 정인데 여기에 어찌 출입이 있다 하겠소?
만약 출입이 있으면 이것은 참으로 큰 정은 아닌 것이 아니겠소?”
황이 이에 이르러 아무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 있더니 책에게 물었다.
“스님은 누구의 법을 이었습니까?”
“우리 스님은 육조이십니다.”
“육조께서는 무엇으로 선정을 삼습니까?”
“우리 스님이 말씀하시는 바에 따른다면 묘하게 맑고 두렷하고 고요하여 체(體)와 용(用)이 여여(如如)하고
오음(五陰)이 본래 공하며 육진(六塵)이 있는 것이 아니며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아니며 정(定)도 아니며 어지러움(亂)도 아니니
선성(禪性)이 머뭄이 없으므로 머뭄을 여의어 선적(禪寂)하며
선정이 남(生)이 없으므로 남을 여의고 선상(禪想)하니
마음이 허공과 같되 또한 허공이라는 헤아림도 없습니다.”
황이 이 말을 듣고 곧 바로 조사에게 와서 뵈오니 조사께서 물으셨다.
“인자는 어찌 왔는가?”
황이 앞서의 인연을 자세히 말씀드리니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지황스님이 오조의 문하였다는 것은 혜능대사보다 먼저 공부를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좌란 허리를 땅에 붙이지 않고 공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참으로 그 말과 같다. 다만 네 마음을 허공과 같이하되 공했다는 견해에도 집착하지 아니하면 사물에 응하고 씀에 걸림이 없으며
동정(動靜)에 무심하여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생각이 없어져 능(能, 주관)과 소(所, 객관)가 다 함께 없어지며
성품과 모양이 여여하여 정이 아닌 때가 없게 되리라.”
이에 황이 크게 깨달으니 20년 동안 닦아 얻은 마음이 도무지 그림자조차 없었다.
그날 밤 하북에 살던 선비와 백성들이 공중에서 소리가 나기에 들으니, “황선사가 오늘 도를 얻었다” 하였다 한다.
그 뒤 황은 조사를 하직하고 다시 하북으로 독아가 4중을 교화하였다.
현책은 지황과 문답을 하는 중에 아직 완전히 해탈하지 못한 것을 알고 혜능대사를 찾아뵙도록 권합니다.
지황은 혼자 오랫동안 공부를 했지만 완전한 해탈을 얻지 못하다가
혜능을 만나 몇 가지 문답을 통해 자기 마음속에 가려있는 근본을 깨치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루벨라 가섭은 나이가 120살이 되고 세속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비록 35살 먹은 부처님과 신통력 경주를 하면 지긴 했지만 속으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불을 지피는데 불이 붙지 않는다고 와서 보고를 합니다,
그 때 부처님이 옆에 계시다가 ‘이미 불이 붙었는데요’ 하여 가보니 정말 불이 붙어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우루벨라 가섭은 오늘 큰 대중이 모이는 있는데 무슨 장난이나 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날 부처님은 하루 종일 안보였고, 그날 행사는 무사히 잘 끝났습니다.
우루벨라 가섭은 부처님께 ‘오늘 참 좋은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어디 갔느냐?’고 하니
부처님은 ‘당신은 내가 없기를 원하지 않았느냐’고 대답합니다.
우루벨라 가섭은 깜짝 놀라며 ‘내가 언제 그런 얘기를 했느냐?’ 했더니,
부처님은 ‘당신은 질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질투심이 있는 한 해탈을 할 수가 없습니다’,
즉 바깥으로 아무리 신통이 자재해도 마음 속 깊이 질투심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얻으려하는 생각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이제까지 알지 못했는데, 부처님이 지적을 받고 자기 마음을 봤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속에 남아있던 그 미혹을 놔버렸고, 그러자 해탈을 한 겁니다.
그래서 120살이나 먹은 유명한 수행자가 부처님께 엎드려 제자되기를 간청했습니다.
한 승이 조사께 물었다. “황매의 뜻을 어떤 사람이 얻었습니까?”
“불법을 안 사람이 얻었느니라.”
“그러면 화상께서는 얻으셨습니까?”
“나는 불법을 알지 못하느니라” 하였다.
‘황매(오조 홍인대사)의 법을 누가 계승했습니까?’ 라고 물으니,
‘불법을 아는 사람이 얻었다, 그러나 법은 본래 얻을 것이 없음이다, 얻었다고 하지만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조사께서 어느 날 받으신 법의를 세탁하려고 하였으나 마땅한 샘이 없었다.
절 뒤로 약 5리쯤 가시니 숲이 우거지고 서기가 감도는 곳이 있었다.
조사께서 그곳에 이르러 석장(錫杖)을 떨쳐 땅을 찍고 손을 드시자 샘이 솟구쳐 나와 삽시간에 못을 이루었다.
조사께서 무릎을 꿇고 돌 위에 옷을 빠시는데 이때 홀연히 한 승이 앞에 와서 예배하고 말씀드렸다.
“제자는 이름을 방변(方辯)이라 하옵는데 서촉(西觸)사람이옵니다.
어제 남천축국에서 달마대사를 뵈었더니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속히 당토로 가거라. 내가 전한 대가섭(大迦葉)의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승가리(가사)가
현재 소주 조계의 제6조대에 전하여져 있으니 너는 가서 참배하라>고 하시기에 이제 제가 멀리서 왔습니다.
바라건대 우리 조사가 전하신 의발을 보여 주십시오.”
조사께서 곧 내보이셨다. 그리고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을 익혔는가?”
“소상(塑像)을 잘합니다.”
조사가 정색하며 말씀하시기를 “너 내 모양을 만들어 보라.”
하시니 방변이 망설이다가 며칠 만에 진상을 만드니 높이는 약 7촌인데 묘하기가 곡진하였다.
조사에게 바치니 조사는 웃으시면서 “너는 다만 흙을 빚는 도리(塑性)만을 알고 불성을 모르는구나.”
하시고 손을 펴 방변 이마를 만지시면서 “길이 인간과 천상의 복전이 되라” 하셨다.
(~~ 여기까지는 강의 생략)
어떤 승이 와륜(臥輪)선사의 게송을 외는데 이르기를
“와륜은 기량(伎倆)이 있어 / 능히 백가지 생각을 끊네.
경계를 대하여도 마음 일지 않으니 / 보리가 나날이 자라도다” 하였다.
조사께서 이를 듣고 말씀하시었다.
“이 게송은 아직 마음자리(心地)를 밝히지 못한 것이니 만약 이에 의지해서 행하면 더욱 결박만 더할 것이다.”
하시고 이에 한 게송을 보이셨다.
“혜능은 기량이 없어 / 온갖 생각을 끊지 않네.
경계 대함에 마음 자주 일어나니 / 보리(菩提)가 어찌 자라랴!”
얼른 생각하면 이상한 것 같지만 잘 살펴보세요,
‘와륜은 기량(伎倆, 재주)이 있어 능히 백가지 생각을 끊네’, 생각을 끊는다는 것은 생각이 있다는 것이고,
‘혜능은 기량이 없어 온갖 생각을 끊지 않네’, 기량도 없고 생각도 없으니 끊을 것도 없다는 겁니다.
깨달음의 세계는 일어나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그런 세계입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일으켜 사량분별을 내고 얻으려는 생각으로 갖가지 모양을 짓는다면
어리석은 자가 보면 그럴듯할지 몰라도 안목이 열린 자가 볼 때는 망념에 불과한 겁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창조되었고 종말이 오면 어떻고 이런 얘기도 듣기는 그럴 듯하지만
그것은 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이 생각 자체가 망념입니다,
망념을 제하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시작이니 끝이니 할 게 없고, 시작과 끝이 둘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시작과 끝이라는 망념을 일으켜 상을 짓고 거기에 이유를 붙여 갖가지 해설을 하고 그럴듯하게 장식을 해도,
그것은 마치 꿈속에 대궐같은 집을 짓고 왕노릇을 한 것처럼 눈뜨고 나면 다 헛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을 일으켜 갖가지 사량분별을 하는 것은 꿈과 같은 겁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얘기를 하고 그럴듯한 모양을 지어도 사실은 자기도 속고 남도 속이는 얘기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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