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육조단경 여덟 번째 강의시간이 되겠습니다.
7. 남돈과 북점
오조 홍인대사의 법을 계승한 분들은 많은 곳에서 법을 전했습니다.
그 중 신수대사는 북쪽에서 포교를 했고, 혜능대사는 남쪽으로 내려가 법을 전했습니다.
즉, 남돈이란 남쪽 혜능대사의 가르침이고, 북점이란 북쪽 신수대사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신수대사의 가르침은 점수, 점점 닦아서 깨닫는다는 그런 가르침이고,
혜능대사의 가르침은 돈오, 단박에 깨닫는다는 가르침인데,
두 분의 가르침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물론 혜능대사의 제자들이 기록한 책이니 당연히 혜능대사의 가르침이 우수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실제로도 혜능의 가르침이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때에 조사께서는 조계의 보림사(寶林寺)에 계셨고, 신수(神秀)대사는 형남(荊南)의 옥천사(玉泉寺)에 계셔서
양종이 크게 교화하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남능 북수(南能北秀)>라 하였다.
그러므로 남북 2종이 있어서 돈(頓)과 점(漸)으로 나뉘니 배우는 이들이 그 종지의 취향을 알지 못하였다.
남능북수, 남쪽에는 혜능이요 북쪽에는 신수다,
남쪽 사람들은 주로 혜능에게 배우고, 북쪽 사람들은 신수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당시엔 서로 교류가 없다 보니 서로 비교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겠지요,
조사께서는 대중에게 이르시기를
“법은 본래 한 종이건만 사람이 남북을 두고, 법은 곧 한가지인데 지견이 늦고 빠름이 있느니라.
무엇을 돈점(頓漸)이라 하는가?
법에는 돈점이 없건만 사람에게 영특과 우둔이 있으므로 돈점의 이름이 있게 되느니라.” 하였다.
‘돈’이란 단박에 깨닫는 것이고, ‘점’이란 점점 닦아서 깨닫는 것이니, ‘돈’이 더 우수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영특한 사람은 바로 깨닫고 어리석은 자는 늦게 깨닫는 것이다 하니까
‘점수’를 하는 사람은 어리석고, 혜능 문하의 사람은 다 똑똑하다 이렇게도 되지요,
대승이란 단어도 소승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데,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는 말은 대승에서 만든 말이지 소승이 만든 말이 아닙니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하니 선이 더 우수한 것 같지만
이것도 선종에서 만든 말이지 교종에서 만든 말이 아닙니다.
혜능의 가르침은 돈오이고 신수의 가르침은 점수다 라는 말도 혜능의 제자들이 만든 것이지 신수대사가 하신 말이 아닙니다.
단박에 깨닫느냐 점점 깨닫느냐 이런 문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깨달음의 순간만 본다면 사람이 하루아침에 탁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제까지도 살인자였는데 부처님 말씀 한 마디 듣고 사람이 180도로 확 바뀌니
깨달음이란 것은 꿈을 깨듯이 순간에 오는 것이구나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았다고 하지만 그 사람의 습관이나 행동 등은 서서히 개선되어 가는 것이고,
뭔가 자각하고 깨달았다 해도 세월이 지나면서 더 크게 깨닫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즉, 법의 이치는 단박에 깨달을 수 있지만 과거의 습기는 점점 닦으며 버려야 하니 점수가 실제의 표현이다 라고 말하기도 하고,
점점 닦는다는 것은 아직도 닦을 것이 있다는 것이니 덜 깨달았다는 얘기다,
깨달으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지 깨달아버린 경지에 무슨 닦을 게 있느냐,
이렇게 논쟁이 되기도 하는데, 잘 살펴보면 그 차이는 무엇을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변화를 기준으로 보면 변하는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부모가 죽어 울고 있는 사람은 옆에서 아무리 위로하고 설득해도 울음을 그치지 않지만,
누군가 ‘뽕!’하고 방귀를 뀐다면 그 소리에는 순간 웃을 수 있습니다,
점점 울음이 그치고 슬픔이 가셔서 웃은 게 아니라 순식간에 변한 것, 돈오입니다.
그러나 습관 같은 것은 다릅니다,
깨달은 것 같고 행동이 바뀐 것 같지만, 그 습기는 남아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개선되어 갑니다.
자각하고 깨닫는다는 것은 순간에 탁 변하는 겁니다,
여러분의 의식도 점점 변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내려놓으면 순식간에 바로 바뀌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람이란 점점 변해가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관찰도 뭘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돈오의 선에서는 한 생각 돌이키는 것, 마음의 변화를 기초로 두고 보지만,
남방불교에서는 계율을 중요시 하니까 행의 변화를 더 중요시 합니다.
법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이라도 자기에 사로잡히면 순간적으로 짜증낼 수 있는데,
남방불교에서는 짜증을 내거나 성질을 내는 것은 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남방불교에서는 술 먹거나 결혼하는 것은 계행을 지키지 않은 것이니 절대 도가 아니라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게 뭐 그리 중요하냐,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도라 정하고 관찰하느냐에 따라 똑같은 것도 평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유명한 선사라도 술 먹고 여자 만난다면 남방불교에서는 속인과 다름없다고 평가할 것이고,
남방불교의 계행을 철저히 지킨 사람이라도 앞뒤가 꽉 막혀있으면 선에서는 형식주의자라고 평가할 것입니다.
평가기준에 따라 다른 것인데 우리는 어떤 게 낫다 나쁘다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가 소속된 집단, 종파, 종교, 나라에 갇혀서 본다면, 깨달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집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상을 여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까지도 넘어서서 사물을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수의 문도들은 왕왕 남종조사를 비방하기를 “글 한 자도 모르니 무엇이 그리 대단한 것이 있으랴”
하였으나 수(秀) 대사는 말하기를,
“그 분은 스승없는 지혜를 얻고 깊이 상승의 법을 깨달았으나 나는 그러하지 못하며,
또한 나의 스승이신 오조께서 친히 의법을 전하신 것이 어찌 공연하랴!
내가 찾아가서 친근하지 못하고 헛되이 국은을 받으니 한스러울 뿐이다.
너희들은 여기에 머물러 있지 말고 조계에 가서 배워 의심을 끊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고 문인 지성(志誠)에게 명하기를
“너는 총명하고 지혜가 많으니 나를 위하여 조계에 가서 법을 들어라.
네가 법문을 듣고 모두 잘 기억해 두었다가 돌아와 나에게 일러 달라” 하였다.
지성이 명을 받고 조계에 이르러 대중을 따라 참청하였는데 온 곳을 밝히지 않았다.
그 때 조사께서 대중에게 이르기를 “지금 법을 훔치러 온 자가 이 모임 가운데 숨어 있다” 하시니 지성이 곧 나와 예배하고 사실을 갖춰 말씀드렸다.
조사가 말씀하셨다.
“네가 옥천에서 왔다니 필시 염탐꾼이겠구나.”
지성이 대답하였다. “아니올시다.”
“어찌하여 그렇지 않다 하느냐?”
“말씀드리기 전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렸사오니 그렇지 않습니다.”
경전을 읽고 좌선을 하고 점점 깨닫는 것은 하근기 중생을 위하여 하는 것이니,
똑똑하고 머리 좋고 영리한 자는 단박에 깨닫는 이리로 모여라 하는 게 남쪽의 주장이고,
글자도 한 자 모르는 무식쟁이가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 하는 게 북쪽에서의 얘기입니다.
당시 신수대사는 측천황후의 국사로서 따르는 사람도 많았고 장안에서 포교활동을 했으니 주류에 속했고,
혜능대사는 지방에 있으면서 세력도 별로 크지 않았으니 아류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간혹 신수대사 문하에서는 못 깨닫다가 여기 와서 깨달은 사람도 있을 거고,
혜능의 문하에서는 마음의 문을 못 열다가 거기 가서 득도한 사람도 있었겠지요,
여기 기록에는 신수대사의 문하였지만 혜능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크게 깨달은 사람 두 분이 나오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신수대사 쪽에서 일부러 보낸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혜능대사께서 ‘지금 법을 훔치러 온 자가 이 모임 가운데 숨어있구나’ 그랬더니,
지성이 나와 예배를 하면서 오게 된 연유를 말씀을 드립니다.
대사께서 “네가 옥천에서 왔다니 필시 염탐꾼이겠구나.” 하고 말을 던졌더니
지성은 ‘이미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염탐꾼이 아닙니다.’라고 받아칩니다.
딴 절에서 이 절에 법문 들으러 왔다고 염탐꾼이라고 질타한다면 스승 자격이 없겠지요,
혜능대사는 정말 염탐꾼이어서 염탐꾼이라고 말한 게 아니라 한 번 툭 던져 본겁니다.
그런데 그런 말에 흥분해 펄쩍펄쩍 뛰지 않고 척 받아내니 문답을 할 만 하지요, 그러니 이제 물어봅니다.
“너의 스승은 어떻게 대중에게 가르치느냐?”
“항상 대중에게 이르시기를 <마음을 마음에 머물고 고요를 관하여 눕지 말고 항상 앉아 지어가라>고 하십니다.”
“마음에 머물고 고요를 관하는 이것은 병이요 선이 아니다.
마냥 앉아있는 것은 몸을 구속하는 것이니 무슨 이익이 되랴!
내 게송을 들어라.
첫째 마음에 머물고, 둘째 고요를 관하고, 셋째 눕지 말고 항상 앉아 용맹정진하라,
옳은 말 같지만 혜능대사의 관점, 지혜의 관점에서는 말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마음에 머무는 것은 이미 머무는 병에 든 것이고, 고요를 관한다는 것은 이미 본다는 병에 든 것입니다.
살아서는 앉아서 눕지 아니하고 / 죽어서는 누워서 앉지 못하네.
한 구(具)의 냄새나는 뼈다귀로 / 어찌 공과(功果)를 세운다 하랴.”
장좌불와, 눕지 않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는 수행이라 할 수 없다,
그것만으로는 도를 이룰 수도 없고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다, 굉장한 질타입니다,
마음에 머문다 하면 이미 마음이 요동을 친다는 얘기이고,
고요를 관한다 하는 것은 이미 보는 자가 있고 보이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관하면 고요해 지는 거지 고요라는 상을 지어 관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병이다,
한 번도 눕지 않고 마냥 앉아있는 것은 몸을 구속하는 것이다,
참으로 자기가 공부에 집중한다면 앉고 서고 눕는 것에 구애 받지 않아야 된다,
(제23강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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