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7. 육조단경

[법륜스님의 '육조단경'] 제24강 남돈과 북접 3

상원통사 2021. 11. 8. 17:48

(~~ 제23강에서 계속)

 

다음은 지철스님에 대한 얘기입니다,

지성스님과 지철스님은 혜능대사가 열반에 드실 때까지 주위에서 모셨던 십대 제자입니다.

십대 제자란 43명의 법제자 가운데서 열반에 드실 때 주위에서 마지막 법문을 듣고 모신 분들이지만,

가장 뛰어난 제자인 청원 행사 같은 분은 곁에 안 계셨습니다.

이런 분들은 와서 듣고 바로 깨쳐 자기 갈 길로 가버렸습니다.

법을 계승한다는 것이 스승과 꼭 같이 살고 끝까지 모셔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을 계승하면 이미 독립된 인격체라 할 수 있습니다.

독립된 인격체로서 스승을 모시고 같이 있을 수도 있고 떨어져 따로 지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승 지철(志徹)은 강서(江西) 사람이다. 성은 장()씨 이름은 행창(行昌)이며 젊었을 때에는 임협(任俠)이었다.

 조사와 신수가 남북의 둘로 나뉘어 교화하면서부터 비록 두 종주(宗主)는 피아가 없었어도 그 문도들은 서로 다투어 편당심을 품고 미워하였다.

 그때 북종의 문인들은 스스로 수대사를 세워서 제6조로 삼는 한편 조사께서 법의를 전수하셨음이 천하에 알려짐을 꺼렸다.

 그래서 행창을 시켜서 조사를 해치게 하였다.

 조사께서는 타심통으로 미리 이 일을 아시고 돈 열 냥을 자리 밑에 준비하고 계셨다.

 밤이 깊어지자 행창이 조사실에 뛰어들어 조사를 해치려고 달려들었다.

 조사가 목을 내미시니 행창은 칼을 휘둘러 세 차례 조사의 목을 내리쳤다.

 그러나 조금도 다치지 않는다. 오히려 조사는 말씀하셨다.

 “바른 칼은 삿되지 않고 삿된 칼은 바를 수 없나니 나는 너에게 다만 돈을 빚졌을 지언정 목숨 빚은 지지 않았느니라.”

 행창은 놀래어 쓰러졌다가 한참 만에 깨어나서 슬피 울며 허물을 뉘우치고 출가를 원하였다.

 조사는 창에게 돈을 내어 주시면서

 “너는 우선 가거라. 대중이 너를 해칠까 두려우니라. 뒷날 모양을 바꾸어서 오너라. 내 마땅히 너를 받아들이리라

 하시니 행창은 조사의 뜻을 받고 밤중에 달아났다.

 

 그 후 행창은 출가하여 승이 되었다.

 하루는 조사의 말씀을 생각하고 멀리서 와 찾아뵈우니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다린지 오래니라. 어찌하여 이다지도 늦었느냐 하시며 반기셨다.

 창이 여쭙기를

 “전날에 화상께서 죄를 용서하여 주신 은덕은 비록 지금 출가하여 고생한다 하더라도 마침내 갚을 길이 없사옵니다.

  다만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법을 전하여 중생을 제도함 뿐인가 하옵니다.

  제자가 일찍부터 열반경을 지송하오나 아직 상()과 무상(無常)의 뜻을 알지 못하니

  바라옵건대 화상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간략히 가르쳐 주십시오 한다.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무상이라 함은 곧 불성을 말함이요, 유상이라 함은 곧 모든 선악의 제법과 분별심이니라.”

 “화상께서 설하시는 말씀은 경문에 크게 어긋납니다.”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하거니 어찌 불경을 어길까 보냐?”

 “경에는 불성 이것이 상이라 하였사온데 화상께서는 도리어 무상이라 하시며,

  선악 제법과 내지 보리심까지도 이것이 무상이온데 화상께서는 도리어 상이라 말씀하시니

  이것은 경문과 다르므로 학인은 의혹이 더욱 더하옵니다.”

 “열반경은 지난날 무진장 비구니가 한 편을 독송하는 것을 듣고 곧 그에게 강설한 적이 있느니라.

  나의 말은 한 자나 한 뜻도 경문에 어긋남이 없었으니 이제 또한 너에게도 두 말이 있을 리 만무하니라.”

 “학인은 아는 바가 얕고 지혜가 어둑하오니 바라옵건대 화상께서는 자세히 말씀하여 주십시오.”

상이란 영원한 것을 말하고 무상이란 영원하지 않고 변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알겠는데,

어떤 것이 항상하는 거고 어떤 것이 변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 조사께 여쭈었습니다.

대사는 무상이 곧 불성이요 선악과 제법 등 분별심이 곧 유상이다 고 대답했는데,

불성은 영원불멸하고, 선악 같은 제법 분별심은 늘 변하는 것이라 알고 있는 지철의 생각과는 정반대입니다.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아느냐? 불성이 만약 상이라면 다시 어떻게 선악 제법을 설명할 것이며,

  또한 겁()을 다하더라도 한 사람도 보리심을 발할 사람이 없으리라.

  이 까닭에 내가 무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참된 상의 도리니라.

  또한 일체 제법이 무상일진대 사물 하나하나가 제각기 자성이 있어서 생사를 받아들일 것이니

  그렇다면 진상(眞常)의 성품은 두루하지 않은 곳이 있으리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상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참된 무상의 뜻이니라.

불성이 고정불변한 것이라면 어떻게 불성으로부터 선하고 악한 세상의 제법이 나올 수 있느냐,

물에서 거품이 이는 것처럼 선하니 악하니 하는 것도 다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상이란 것은 이런 원리를 말하는 거다,

  평소에 범부와 외도는 그릇된 상(邪常)에 집착하고 모든 2승들은 상에서 도리어 무상을 계교하여 함께 팔도(八倒)를 이루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열반요의교(涅槃了義敎) 가운데서 그들의 그릇된 편견을 타파하여 진상(眞常진아(眞我진정(眞淨)을 밝혀 말씀하셨거늘,

  너는 이제 말에만 의지하여 참뜻을 모르고 단멸(斷滅)의 무상과 죽은 상(死常)으로써 부처님의 원묘(圓妙)하고 가장 깊은 최후의 가르침을 그릇 알아들으니

  그러고서야 비록 천 편을 독송한들 무슨 소득이 있겠느냐?“

(~~ 여기까지는 강의 생략)

 

 이에 행창이 홀연히 대오하고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무상한 마음을 지킴으로 인하여,        / 부처님은 유상인 성품 말씀한 것을

  이것이 방편임을 알지 못하는 이는    / 봄못(春池)에서 조약돌을 줍는 거와 같네

  나 이제 공() 드리지 않고             / 불성이 이렇게 나타났으니

  이것은 스승께서 줌도 아니며          /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제 투철 했구나. 마땅히 이름을 지철(志徹)이라 하라 하셨다.

 철이 절하고 감사하며 물러갔다.

마음이란 무상하여 늘 변하는 것이니, 무상함을 무상한 줄로 알아야 한다,

부처님이 유상인 성품을 말씀하신 것은 단지 방편일 뿐이다,

이러함을 깨닫는다는 것은 줄래야 줄 수도 없고 얻을래야 얻을 수도 없는 것이다.

 

 한 동자가 있었다. 이름을 신회(神會)라 하였는데 양양(襄陽) ()씨의 자손이다.

 나이 30세에 옥천사(玉泉寺)에서 와서 참예하였다.

 조사께서 말씀하였다.

 “네가 먼 곳에서 고생하며 왔으니 근본을 가지고 왔는가?

  만약 근본이 있다면 곧 주인을 알 것이다. 말해보라.”

 신회가 대답하였다. “머무름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니 봄()이 바로 주인이올시다.”

신회도 원래는 신수대사 밑에서 공부하다가 온 사람입니다.

너는 뭘 근본으로 삼느냐 하니까 머무름이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는다, 이건 대사께서 가르치신 것과 똑같은 얘기입니다,

무념으로 종을 삼고 무상으로 체를 삼으며 무주로 근본을 삼는다,

머무름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니 봄()이 바로 주인이올시다,

물으면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대답한다, 맞을까 틀릴까 염려하여 망설이는 것은 정답 맞추기를 하는 것이다,

머뭇거린다는 것은 뭔가 얻으려는 생각이나 스스로 잘났다는 생각이 있어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이 사미(沙彌)가 어찌 경솔하게 말을 하는가 하고 주장자로 세 번 때리니 회가 물었다.

 “화상께서 좌선하실 때 보는 것이 있습니까.”

신회는 찾아와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스승을 테스트하고 있습니다.

자기 공부는 안하고 남에게 당신 좌선할 때 보는가 안 보는가 하고 묻습니다,

왜 이렇게 물었을까요, 본다 해도 걸리고 안 본다 해도 걸리게 되어있습니다.

본다 하면 유념이란 말이고, 안 본다 하면 이건 목석입니다, 즉 올가미를 던진 것입니다.

 “내가 너를 때렸으니 아프냐 안 아프냐?”

스승도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함부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공부하러 온 사람이라면 쉽게 대답해 주겠지만 상에 집착해 아만통을 갖고 스승을 테스트 하러 온 사람이니 가르치려면 깨우쳐줘야 되겠지요,

그러니 거꾸로 묻습니다,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안 하고 내가 아까 때렸더니 아프냐 안 아프냐?

 “아프기도 하고 또한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안 아프다하면 목석이고 아프다 하면 중생이니 빠져나가려 머리를 굴려 대답을 합니다.

 “나도 또한 보기도 하고 보지 못하기도 하느니라.”

 “어떤 것을 보기도 하고 보지 못하기도 하는 것입니까?”

 “내가 보는 것은 항상 자심의 허물을 보는 것이요, 타인의 시비(是非) 호오(好惡)를 보지 않나니,

  이러므로 또는 보고 또는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본다는 것은 내 허물을 보는 것이고, 내가 보지 않는다는 것은 남의 시비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다 하는 것도 보지 않는다 하는 것도 슬쩍 빠져나갔습니다.

  너는 말하기를, 아프기도 하고, 또한 아프지 않다고도 하니 이것은 어떤 것이냐?

  네가 만약 아프지 않다면 이것은 목석과 같은 것이요, 만약 아프다면 즉 범부와 같으니 곧 성이 나고 원통한 생각이 나리라.

  네가 앞서 말한 보기도 하고 안보기도 한다는 것은 이것은 이변(二邊)이며,

  아프기도 하고 안 아프기도 하다는 것은 이것은 생멸이니 네가 자성을 아직 보지 못하고 감히 그런 희론을 하느냐?”

보기도 하고 안 보기도 한다는 것은 사실은 이변, 양 극단에 치우친 것이다,

네 본성도 보지 못하면서 어디서 그런 헛소리나 하고 다니느냐?

 신회는 다시 예배하고 깊이 뉘우치며 사과드렸다.

 조사께서 다시 말씀을 이으셨다.

 “네가 만약 마음이 미혹하여 자성을 보지 못하였다면 마땅히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야 할 것이요,

  네가 만약 마음을 깨쳤다면 곧 스스로 견성한 것이니 마땅히 법답게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스스로 견성했다면 남에게 물을 필요가 없고 자기가 모르면 겸손하게 물어야지, 보느냐 안 보느냐고 시비를 해서 되겠느냐,

  그런데 너는 스스로 미혹하여 자심을 못 보았으면서도 도리어 나에게 와서 보고 안 보고를 물으니

  내가 보는 것은 내 스스로 아는 것이거늘 어찌 너를 따라 내가 미혹할까 보냐.

네가 말하는데 내가 끌려가고 네가 가는 구렁텅이에 나까지 빠지겠느냐,

  또한 네가 만약 스스로 자심을 보았다면 어찌 나의 미혹을 네가 대신하랴.

  그런데 너는 어째서 스스로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나에게 보고 안 보고를 묻는 것이냐?”

 이에 신회는 다시 일어나 백여 번 절을 한 다음 허물을 사죄하였고 지성을 다하여 조사를 모시며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네 공부는 안 하고 왜 그렇게 세상 돌아다니면서 남에게 시비만 하느냐,

이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세상의 도인을 찾으러 다닌다면서 사실은 도인을 점검하러 다니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자기가 깨쳤다면 스스로 알 것이니 돌아다니면서 남에게 인가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고,

또 깨우쳤다면 도를 묻는 사람만 깨우쳐주면 되지, 묻지도 않는 사람에게 가서 시비를 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을 탑 옆의 소나무라 합니다, 탑 옆의 소나무는 탑에게 시비하지 않습니다.

시비도 안 하지만 탑과 소나무는 조화를 잘 이룹니다.

탑은 탑대로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자기 할 일을 합니다.

바른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공부에 여념이 없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의 공부가 잘되고 안 되고 시비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이 시비하더라도 제 허물인양 받아들여야지 남에게 시비해서는 안 됩니다.

소나무는 탑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시비거는 것도 아니라 그냥 조화를 이룹니다.

여러분들도 모르면 물어야 하고 선지식을 찾아가 배우기는 할지라도 시비는 하지 마십시오,

도를 이기고 지는 검술같은 것으로 생각하니 누가 도가 더 높을까 이런 생각을 하지요,

이 스님과 저 스님 중 누가 더 도가 높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옳지가 않습니다.

도라는 것은 내려놔버리는 것이니 거기엔 높고 낮음이 이미 사라져버린 세계입니다.

 

 하루는 조사께서 대중에게 이르셨다.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으며 앞도 없고 등도 없다. 너희들은 알겠느냐?”

 그 때 신회가 나와서 대답하였다. “그것은 제불의 본원이며 신회의 불성입니다.”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다>하였는데, 너는 곧 근본이니 불성이니 하니

  앞으로 네가 종사가 되더라도 다만 지해종도(知解宗徒)밖에 되지 않으리라.”

혜능대사가 정말로 이렇게 말했을까,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에 남종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북종선을 비판하며 활동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신회입니다.

그는 아주 지혜롭고 똑똑했지만 제자들 중에 도인이 많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논쟁에 거의 가담하지 않았던 청원 행사스님이나 남악 회양선사의 제자 중에는 수많은 도인들이 나왔습니다.

이 경은 혜능대사 당시뿐만 아니라, 대를 내려가면서 수도 없이 편집되다 보니까,

신회는 똑똑하기는 하지만 깨달음은 부족하다, 지해종도다 이런 말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상식적으로 스승이 제자에게, ‘너는 나중에 뭐 밖에 안 되겠다 이런 말은 안하겠지요,

만약 제자의 앞날을 알 수 있다고 하면 해탈의 길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왜냐, 다겁생으로 악을 지어 지옥에 떨어질 악인도 한 생각 돌이키면 해탈한다고 그랬는데,

언제 해탈할지 모르는 제자에게 너는 앞으로 깨달아도 뭐 밖에 안 되겠다 이렇게 정한다는 것은 선의 종지에도 안 맞습니다.

 

 회는 뒤에 서울에 들어가 크게 조계의 돈교을 넓혔고 또한 현종기(顯宗記)를 지으니 세상에 유행하였다.

 조사께서는 여러 종문들이 조사의 난문(難問)에 모두가 악심을 품고 회하에 많이 모여듦을 보시고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말씀하셨다.

여러 종문이란 홍인대사 문하의 다른 제자들이나 교종의 여러 종파들을 말합니다.

혜능은 교종이나 다른 선종의 관념적이고 형식주의적인 것들을 사정없이 비판했습니다,

비판하려고 비판한 게 아니라 근본 관점이 아주 투철해서 비판한 것인데,

이런 조사의 난문(어려운 말)에 다른 종파 사람들이 모두가 악심을 품게 된 것입니다.

조사께서는 이렇게 모여든 이들을 불쌍히 여겨 말씀하십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일체의 착한 생각이나 악한 생각을 다 마땅히 없이 하여야 하느니라.

  이름을 무엇이라고도 붙일 수 없는 것을 자성이라고 하느니라.

  둘이 아닌 성() 이것이 실성(實性)이니 이 실성위에 일체 교문(敎門, 가르침의 문)이 건립되는 것이니라.

  너희들은 모름지기 언하에 스스로 보아야 하느니라.”

 모든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모두다 절을 하며 조사를 스승으로 섬기기를 청하였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악한 생각을 한다면 도인이라고 할 수가 없다,

우리들의 본바탕이 둘이 아니듯, 종파라는 것도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서울 가는 길이 어느 쪽이라고 본래 정해져 있던 게 아니라,

인천 사람에게는 동이라 하고 춘천사람에게는 서라고 하듯, 중생의 근기따라 이런 말씀도 저런 말씀도 계셨다

그런 것들이 화엄경이 되고 법화경이 되고 아함경이 되고 유마경이 되고 승만경이 되고 온갖 경전이 되었다,

또 거기에 따라서 돈문도 있고 점문도 있고 여러 문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그 한 문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

자기 본성을 봐서 위에서 내려다보듯이 봐야 한다, 이게 중요한 것이다,

그랬더니 모든 사람들이 크게 깨닫고 조사의 제자가 되었다 이런 얘기입니다.

신라의 원효대사와 똑같이 말씀입니다, 원효대사는 더 분명하게 말씀하셨지요,

이 세상의 갖가지 종파가 열 가지 문을 만들어서 이게 옳다 저게 옳다 싸우는데,

각 종파의 요점(종요)를 뽑아놓고 보면 깨달음의 길로 가는 오직 한 가지 목적밖에 없다,

그러니 다툴 아무런 이유도 없고 우열도 없다, 그래서 십문화쟁론을 썼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공부하는 사람들이니 더 이상 종파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나는 종파가 없는 무종파다, 하면 그것도 또 하나의 종파가 됩니다,

자기가 소속된 곳, 조계종이면 조계종, 천태종이면 천태종에 그대로 있으면서,

그러면서도 마음은 종파를 뛰어넘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종파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