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5강에서 계속)
다음은 자성의 용, 자성이 작용을 하면서 일어나는 것에는 19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장단(길고 짧은 것), 돈황본에는 장단 대신 고하(높고 낮음)가 들어있습니다.
사와 정, 이건 자성의 작용이라 할 수 있는데, 쉽게 얘기하면 주관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치혜(어리석음과 지혜로움), 이것도 주관작용에 속하지요, 우지(미련함과 슬기로움), 난정(어지러움과 고요함),
자독(자심과 독심), 자심은 아끼고 사랑하고 베푸는 것이고 독심은 남을 해치고 훔치는 것을 말하는데 원본에는 없습니다.
계비, 계는 바른 것을 청정히 지키는 것이고 비는 잘못을 행하는 것이니,
선을 바르게 행하면 계라 말할 수 있고, 잘못을 저지르면 비라 말할 수 있습니다.
직곡(곧음과 굽음), 번뇌와 보리, 상과 무상(영원한 것과 변하는 것),
비해, 비는 슬퍼하고 가슴아파하고 사랑하는 그런 마음이고 해는 남을 해치는 걸 말합니다.
희진, 희는 얼굴이 환하게 기쁜 것을 말하고 성내는 것을 진이라 말합니다.
다음은 줌과 아낌, 평등하게 베푸는 것이 줌이고 자기만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낌입니다.
진퇴(나아가고 물러섬), 생멸(생기고 사라짐), 법신과 색신, 화신과 보신, 이런 것들이 서로 대대한다,
이걸 19가지 대대라 하는데 원본에는 이것 외에도 체용이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체란 등잔이고 용은 불꽃, 체가 금덩어리라면 거기서 나온 빛은 용이다,
또는 금덩어리는 체이고 금가락지는 용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성상, 우리들의 본래 청정심은 性이고 그것이 바깥으로 드러난 갖가지 모양은 상이다,
유정 무정, 생명이 있으면 유정이고 없으면 무정, 이 외에도 대대한 것은 많이 있겠지요.
조사께서 말씀을 이으셨다.
“만약 이 36 대법을 잘 알아 쓰면 곧 도(道)가 일체 경법(經法)을 꿰뚫어 출입함에 곧 양변(兩邊)을 여의어 온전히 자성을 동용(動用)하리라.
또한 사람과 더불어 이야기할 때에는 밖으로 상(相)에서 상을 여의며 안으로 공(空)에서 공을 여의어라.
만약 온전히 상(相)에 착하면 곧 사견(邪見)이 자랄 것이며, 혹 온전히 공을 집(執)하면 곧 무명(無明)이 자라리라.
공을 집착하는 사람은 경을 비방하면서 곧 문자를 쓰지 않는다 하나,
만약 이미 문자를 쓰지 않을진대 사람과 말하는 것도 마땅하지 않다 하겠으니 말이 또한 바로 문자의 상(相)임을 어찌하랴!
또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하나 이 세우지 않는(不立)다는 두 글자도 또한 문자인 것이니
대개 이런 사람은 남이 말하는 것을 보고 곧 그를 비방하면서 말하기를 <문자에 집착한다> 하느니라.
상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문자에 얽매여 글자 한 자 한 자에 진리가 들어있다고 해석하고,
공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필요 없다, 문자도 필요가 없다 이렇게 말합니다.
말을 글로 표현한 것이 문자이니 말도 문자의 일종이라 할 수 있으니,
‘문자를 쓰지 말아야 한다’면 ‘문자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하지 않아야’ 되고,
문자를 쓰지 말아야 한다면 불립문자라는 글자도 아예 쓰지 말아야 된다.
너희들은 마땅히 알아라. 스스로 미혹한 것은 오히려 가(可)하거니와 어찌 부처님 경전을 비방하랴!
부질없이 경을 비방하지 말아야 하니 이러한 자는 그 죄장(罪障)이 헤아릴 수 없느니라.
만약 상에 착하며 밖을 향하여 작법(作法)하며 참(眞)을 구하거나 혹은 넓은 도량을 세우고 유·무의 허물을 말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몇 겁을 다하여도 견성하지 못할 것이니 너희들은 다만 법을 듣고 법에 의지하여 수행하라.
또한 일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을 수행이라 하지 말라. 도성(道性)이 막히고 장애가 되리라.
만약 법을 닦지 아니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도리어 삿된 생각(邪念)이 나게 하나니
다만 법에 의지하여 수행하여 상에 머무름이 없이 법을 베풀도록 하라.
너희들이 만약 깨달아 이에 의지하여 말하며 이에 의지하여 쓰며 이에 의지하여 행하며 이에 의지하여 지으면 곧 근본 종지를 잃지 않으리라.
경을 읽어라 읽지 마라 이런 얘기도 해서는 안 되고 경을 비방해서는 안 된다,
혜능은 1300년 전에 이미 불립문자를 내세우며 경을 비방하는 풍조를 나무랐는데,
오늘날에도 선을 얘기하면서 경을 비방하는 자들이 있으니 한심한 노릇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너에게 법의 뜻을 묻되 유(有)를 물으면 무(無)로써 대하고 무(無)를 물으면 유(有)로써 대하고
범(凡)을 물으면 성으로 대하며 성(聖)을 물으면 범(凡)으로 대하여 두 도(二道)가 서로 인하여 중도(中道)의 뜻이 살아나게 하라.
너희가 이와 같이 한번 물음에 한번 대하되 다른 물음에도 한결같이 이와같이 하면 곧 법리(法理)를 잃지 않으리라.
대대법은 양안(양변)에 속하는 것이다, 그 둘을 떠나버려야 중도로 나아가게 된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열반경에는 일체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있다’에 집착하는 사람은 ‘없다’라 하여 이쪽으로 잡아당겨야 되고,
‘없다’에 집착하는 사람은 ‘있다’고 하여 저쪽으로 잡아당겨야 됩니다.
서울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됩니까?
인천사람이 물으면 동쪽으로, 수원사람에게는 북쪽으로, 춘천사람에게는 서쪽으로 가라고 해야 합니다.
참선만 하고, 경만 읽고, 몸뚱이 움직이기 싫어하는 사람일수록 절을 시켜야 됩니다,
사리분별을 따져 옳으니 그르니 하는 사람이나 부부간에 싸우는 사람도 절을 많이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참선을 시키면 ‘나는 참선한다’ 하는 아만이 생기니 먼저 절부터 시켜야 됩니다.
그러나 절병에 걸려 삼천 배 하는 걸 자랑삼는 사람은 마음을 숙이라 해야 합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봐서는 안 됩니다, 뭘 가리키고자 하는 지 뭐가 문제인지를 깨달아야 됩니다.
혹 어떤 사람이 묻기를 <무엇이 어두운 것이냐?> 한다면 답하기를
<밝음은 바로 인(因)이요, 어둠은 바로 연(緣)이니 밝음이 없어진 것이 곧 어둠이다>라고 하라.
이는 밝음으로써 어둠을 나타내며 어둠으로써 밝음을 나타내는 것이니 오고 감이 서로 인하여 중도의 뜻을 이루나니
다른 물음에 대하여도 모두 다 이와 같이 하라.
너희들이 이후에 법을 전할 때에는 마땅히 이와 같이 서로 교수(敎授)하여 종지를 잃지 않도록 하라.”
(~~ 여기까지 강의 생략)
(제27강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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