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7. 육조단경

[법륜스님의 '육조단경'] 제27강 불법을 대로 말하다 3

상원통사 2021. 11. 15. 13:39

(~~ 제26강에서 계속)

 

10. 유통을 부촉하다

 

 조사께서 태극(太極) 원년(서기 712) 임자 7월에 문인에게 명하여 신주(新州) 국은사(國恩寺)에 탑을 세우게 하시고

 또한 공사를 서둘러 다음해 늦은 여름에 낙성하였다. 7 1일 문도대중을 모아 말씀하셨다.

 “나는 8월이 되면 세간을 뜨고자 한다.

  너희들이 의심이 되는 것이 있거든 일찌기 다 물어라.

  너희들의 의심을 풀어 주어 너희들로 하여금 미혹이 없게 하리라.

  만약 내가 떠난 뒤에는 너희들을 가르칠 사람이 없으리라.”

나는 8월에 열반에 들려고 하니 모르는 게 있으면 빨리 물어라,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도 이러셨습니다.

여기에 집착해서 부처님도 혜능대사도 그랬는데 왜 우리 스님은 갑자기 돌아가셨을까,

우리 스님은 도인이 아닌가봐,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분은 그렇게 돌아가고 이 분은 이렇게 돌아가고, 이분은 앉아서 돌아가고 저 분은 서서 돌아가고,

사람은 반듯이 누워서 죽을 수 있고 옆으로 누워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이 옆으로 누워서 돌아가셨다 하니까 죽을 때는 전부다 옆으로 누워야 된다 하고,

또 누구는 앉아서 죽었다 하니까 그냥 골골하다가 누워서 죽은 사람도

병풍 치고 다리 꼬아 앉히고 등받이 해서 우리 스승은 앉아서 돌아가셨다 이럽니다.

그렇게 해서 도인 났다 하고, 사리라도 나오면 신도들 몰려 오겠지요, 그럼 누가 이익볼까요, 우리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 것은 불법이 아닌데, 우린 이렇게 상을 짓고 이것을 불법이라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법해(法海) 등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울었는데 오직 신회(神會)만이 마음이 동하는 기색이 없었고 또한 울지도 않았다.

 조사께서는 말씀하셨다.

 “신회 소사(小師)가 도리어 좋은 일 궂은 일 등 헐고 칭찬하는데 동하지 아니하고 슬픔이나 기쁨이 나지 않는구나!

  나머지는 모두 그렇지 못하니 수년이나 산중에 있으면서 마침내 무슨 도를 닦았느냐!

  너희들이 이제 슬퍼하고 우는 것은 누구를 걱정해서 그러느냐?

  만약 내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함을 근심할진대 나는 스스로 갈 곳을 안다.

  내가 만약 갈 곳을 알지 못한들 미리 너희들에게 알리지 못했을 것이다.

  너희들이 슬퍼함은 대개 내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만약 가는 곳을 안다면 슬퍼할 리가 없다.

  법성(法性)은 본래 생멸이나 거래가 없는 것이다.

  너희들 모두 앉아라. 내 너희들에게 한 게송을 주리라.

  이름을 진가동정게(眞假動靜偈)라고 하니 너희들이 이 게송을 외면 나의 뜻과 같아질 것이며

  이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종지를 잃지 않을 것이다.”

 하시니 모든 대중이 다 일어나 절을 하고 게송을 설하시기를 청하였다.

 

 조사께서 게송을 이르셨다.

 “일체 만법 그 중에 진()이란 없으니                     / 그러므로 진()이 있다 여기지 말라.

  만약 진()이 있다고 보면                                  / 이러한 견해는 모두 다 진()이 아니다.

  만약 능()이 스스로 진이라 할진대                      / 거짓()을 여읨이 곧 마음의 진이다.

  제 마음 거짓을 여의지 않고서는                          / 진이란 없거니 어디에서 진을 찾으랴.

일체만법에는 산하대지, 모든 경문, 사람의 생각 등 모든 것이 다 포함되는데, 그 중에 참이라 할 만한 게 없다,

어떤 산에, 어떤 바위 밑에, 어떤 나무 밑에, 어떤 책속에, 어떤 모양에, 어떤 사람에 진리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마라,

산이나 바위 속 하늘 땅 책 절 불상 말 문자 등에 진이 있다고 본다면 이런 견해는 다 잘못된 거다,

법륜스님이 머리를 길었든 깎았든 어떤 옷을 입었든 음식을 뭘 먹든 그것은 진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다,

진이란 게 딴 데 있는 게 아니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거짓을 여의는 것이 진이다,

 

  유정(有情)은 제대로 동()하거니와                     / 무정물(無情物)은 도무지 동()하지 못하니

  어떤 사람은 부동행(不動行)을 수행으로 삼는다면    / 이것은 무정물의 부동(不動)과 같으리.

  만약 참된 부동 찾으려 하면                               / 움직임 그 위에 부동이 있음을 알라.

  움직이지 않음이 부동이라면                              / 무정에는 원래로 불() 종자 없느니라.

  능히 모든 상을 잘 분별하되                               / 1()엔 동함이 없으니

  다만 이 같은 견해 가지면                                  / 이는 바로 진여(眞如)를 씀이로다.

유정은 사람이나 동물처럼 움직이는 것을 말하고 무정은 돌이나 나무처럼 못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있는 것으로 수행을 삼는다면 그건 돌맹이와 같은 것이니 그런데 현혹이 돼서는 안 된다.

정말 부동이란 게 뭔지를 알고자 하거든 늘 움직이는 그 속에 부동이 있음을 알아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손으로 만지는 속에도 경계에 집착하지 아니하는 것을 부동이라 한다,

몸뚱이를 움직이지 않고 생각을 안 하는 것으로 참부동을 구한다면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분별하지 말라니까 콩인지 팥인지도 구분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모든 상을 잘 분별하되 옳으니 그르니 하는 상을 짓지 않으면 제1의 근본 자리에서는 동함이 없다,

 

  내 모든 학도인에게 이르노라                             / 모름지기 힘써 이를 조심하라

  대승문(大乘門)에서 공부하면서                          / 도리어 생사지(生死智)를 잡지 말라.

  만약 언하에 상응(相應)했거든                            / 그때에 불법을 의논하거니와

  만약 실다이 상응 못하였으면                             / 공손히 합장하고 환희심 내라.

이걸 조심해서 기본을 잡고 공부를 해야지 안 그러면 공연히 몸만 괴롭히고 세상 사람만 수고롭게 만든다,

대승공부는 본래 불생불멸의 도리를 공부하는 것이니 생사에 빠지는 그런 지혜를 잡지 말라,

만약 이 말을 듣자마자 가슴에 다가왔거든 그 때에 부처님 법을 의논하거니와

확연하게 다가오지 않았거든 합장하고 그저 겸손하게 공부를 해라,

알음알이 몇 개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이게 정법이니 저게 정법이니 이러지 마라,

 

우리나라 조계종을 보면 좋은 점이 참 많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가족을 버리고 출가해서 혼자 살면서 공부하겠다고 발심도 하고,

산속에서 세상 인연을 끊고 선정에 드는 사람도 있고,

행자 한다고 들어가서 부엌일하고 빨래하면서 시간 보내는 그런 분도 있습니다.

전세계 어디에도 이런 분위기는 별로 없습니다,

중국에 가면 관운장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무슨 여신상 앞에서 복비는 것 밖에 없고,

일본 가면 무슨 동전이나 경망스럽게 던지고 그러지 법문 듣고 수행하겠다 이런 열의는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조계종 스님이나 신도들에게 좋은 점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단점도 있습니다.

그게 뭐냐, 나 조계종 중이다, 나 결혼 안 했다, 나 조계종 신도다, 나 선방 다닌다, 이렇게 상이 굉장합니다, 겸손한 바가 없습니다.

다른 종파라면 불교인 취급도 안 합니다, 태고종이라고 하면 무슨 대처승 절에 다니나, 이렇게 취급합니다.

그런 게 무언중에 깔려 있습니다, 타종교인, 소위 말해서 기독교인에게는 찍도 못쓰면서,

기독교 목사들 다 결혼했고 일본 불교 스님들 다 결혼했는데 무슨 문제 있습니까?

또 복을 구한다 하면 굉장히 무시합니다, 기복하는 게 불교냐 이러면서.

여기 정토회 다니는 사람들도 조심해야 될 게 있습니다.

정토회만 정법이고 딴 데는 정법이 아니다, 이런 것은 스님의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대로 중생의 고통이 있는 곳에 성실하게 행할 뿐이지,

남을 두고 옳으니 그르니 맞니 틀렸니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물으면 이런 길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있고,

부처님은 이렇게 가르쳤는데 이건 조금 문제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얘기할 수야 있겠지요.

 

왜 종단 화합이 안 되느냐, 조계종이 뭐든지 다 독차지하려고 해서 그런다고 생각합니다.

방송국 만들어 놓으면 조계종 방송국이 되고, 협의체도 만들어 놓으면 조계종 것이 되버려,

우리나라 불교는 조계종밖에 없다, 조계종이 제일 낫다 이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불교만 사는 세상이 아니고 다른 종교도 있고 종교 없는 것도 있습니다.

조계종이 아닌 다른 종파라 할지라도 다른 종교보다 나은 점이 많이 있는데,

다른 종교인은 존경하면서 다른 종파 사람은 존경하지 않는다, 그럼 안 됩니다.

조계종 스님들의 또다른 문제는, 태고종이나 일본 스님들에게는 스님으로 깎듯이 예의를 갖추면서,

자기 절의 신도나 신도회장은 속인이라고 아주 무시합니다, 똑같이 결혼해서 사는데 차이가 뭐가 있어요?

우리 종파 사람이니 껴안고 우리 불교인이니 다른 종교보다 더 껴안자 이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다른 종교라고 맹목적으로 비판하거나, 반대로 자기들 안에서 정과 사를 나눠 무조건 내치는 것은 옳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법을 바르게 행하는 사람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한다는 것은 분별도 하지 마라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부처님 법과 아닌 것을 분별하되 거기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시비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대승문(大乘門)에서 공부하면서 도리어 생사지(生死智)를 잡지 말라,

화합을 가르키는 불법, 평화를 가르키는 불법에서 도리어 분별을 일으켜

정법이니 아니니 해서 도리어 분쟁을 일으킨다면 그게 생사지에 떨어진 것입니다.

 

  이 문 안에 본래로 다툼 없으니                           / 만약에 다툰다면 도()의 뜻 잃으리.

이 문 안에는 본래로 다툼이라는 게 없다, 만약 다툰다면 그건 법이라는 데 집착한 것이다.

또한 다른 종파 사람들이나 다른 것을 믿는 사람도 존중해줘야 합니다,

무당을 찾는 시어머니를 비난해서는 안 되고, 그 분의 신앙을 존중해야 합니다,

존중하는 위에서 그것으로 문제해결이 안 될 때 이렇게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이 테이프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더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법을 전해야 됩니다.

그건 틀렸어요, 이거 들어보세요’,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사람은 다 나름대로 신앙이 있고, 무종교인 사람도 종교를 갖지 않는다는 종교를 갖고 있는 겁니다,

기독교인들이 여러분들을 무시하면 기분이 나쁘지요, 그러니 다른 사람의 신앙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럼 이 좋은 법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요? 그 사람에게 이익이 되게 전해야 됩니다.

부처님이 전법선언에서, ‘자 전도의 길을 떠나거라, 세상 사람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그가 힘들고 괴로울 때 그것보다는 이게 낫지 않겠소, 이렇게 얘기해서 받아들이도록 해야 합니다,

 

  잘못이다 국집이다 서로 법문을 다툰다면               / 자성은 도리어 생사에 들리라.”

법을 두고 잘못됐다 잘됐다, 집착을 한 거다 안 한거다 이렇게 서로 법문을 다투지 말라,

싸우고 싶은데 억지로 참고 싸우지 말라는 게 아니라, 안으로 돌이키면 싸울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 때에 문도대중이 게송 말씀하심을 듣고 모두 일어나 절하고,

 함께 조사의 뜻을 받들어 각각 마음을 가다듬어 법()답게 수행하고, 다시는 감히 다투지 아니하였다.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을 수 있지요, 왜 모여 있느냐는 근본을 놓치면 다투게 됩니다,

사람은 살다보면 견해가 다를 수 있고, 견해가 다르면 다툴 수 있습니다,

다툴 수도 화낼 수도 짜증낼 수도 울 수도 슬플 수도 욕심낼 수도 어리석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나와 너의 견해가 다르고, 부부라 하더라도 생각이 다릅니다,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렇게 따로 놀자는 게 아니라,

서로 자란 환경이 다르니 생각도 다를 수가 있다 이걸 인정하자는 겁니다.

서로 다를 수 있고 다르다 보니 다툴 수도 있습니다,

다투는 것을 불편해 하는 건, 사람은 다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선불교만 무조건 옳다고 하는 것은 선불교적 입장이 아닙니다,

다른 종파의 가르침도 수용하고 이해하고, 다른 종교까지도 이해할 수 있어야 진정한 선이고 참 불법입니다.

도란 자유로워야 합니다.

때로는 밥을 안 먹는 게 도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밥을 먹는 게 도가 되기도 하고,

파란 불에 차가 갈 때 도가 될 때도 있고 파란 불에 차가 가면 아닐 때도 있습니다,

그때그때 인연을 따라서 동이 되고 서가 되고 남이 되고 북이 되는 게 도입니다.

남편과 문제가 있다면 여러분이 먼저 고개 숙여도 되고,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헤어져도 괜찮습니다.

남편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고, 자유로운 사람끼리 도반이 되어야 참사랑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속박 받고 살면 결국은 자기 위상을 놓치게 되고 그것이 또 남편에게 큰 짐이 됩니다.

스스로 깨달아서 자유인이 되면 남편의 어깨에 있는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것이고,

나 또한 그로부터 묶여있는 사슬을 풀게 되어 참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도반이 되어야 참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애들 문제로 걱정하거나 남편문제로 시비하기 보다, 내가 먼저 해탈하고 내가 먼저 자유로워져야 됩니다.

내가 먼저 감옥에서 나와야 남편도 애들도 풀어줄 수 있지 자기가 갇혀 있으면서 어떻게 남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걸 꼭 명심하고 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