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육조단경 여섯 번째 강의시간이 되겠습니다.
좌선이란 앉거나 앉지 않는 것과 같은 형상에 있지 않고 바로 마음에 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다 선(禪)이 된다,
이렇게 ‘앉는 것’에 대해 비판하니 ‘그럼 앉을 필요가 없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보시할 때 ‘대가를 바라려면 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것은 보시하지 마란 얘기가 아니라 대가를 바라지 말고 보시하란 얘기이고,
‘중이 마음을 닦아야지 머리만 깎는다고 중이 되냐’는 말은 머리 깎지 마란 얘기가 아니라 머리 깎는 의미를 제대로 알고 수행하라는 뜻이지요.
형상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 ‘앉아야만 된다’는 것도 상이고, ‘앉을 필요가 없다’는 것도 상입니다.
4. 좌선법을 가르치다
대사께서 대중에게 이르셨다.
“선지식아! 어떠한 것을 좌선이라 하느냐?
이 법문 중에는 걸림도 없고 막힘도 없나니
앉아서 그 마음을 고요히 해서 선정에 드는 것을 일반적으로 좌선이라 합니다.
그러려면 우선 앉는 연습을 해야 된다, 가부좌를 틀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턱을 잡아당기고, 입술은 입천정에 대고, 숨은 고르게 쉬고, 눈을 코끝이나 무릎 한 치 앞을 봐야 된다,
다음은 마음가짐이다, 망상을 없애고, 화두를 챙겨라,
이렇게 배운 것에 대해 우리가 상을 짓고 있으니 거기에 대한 비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좌선을 가르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것은 나의 법문도 되지만 달마대사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단박 깨달아 해탈하는 법문이다,
이 법문은 그 무엇에도 걸리지 않는다, 나라 하는 것에도 걸리지 않고 법이라 하는 것에도 걸리지 않는다,
밖으로 일체 선악경계를 당하여도 심념(心念)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좌(坐)가 되며
안으로 자성이 원래 동함이 없음을 보는 것이 선(禪)이 되느니라.
일체 선악경계란 내 맘에 드는 것이든 아니든 바깥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말하고,
심념이란 마음에 어떤 생각을 내는 것, 뭔가를 일으켜서 모양을 짓는 것을 말하므로,
육근 경계에 당하여도 어떤 상도 짓지 않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좌라 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도 어떤 상도 짓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좌라 한다,
그런걸 ‘앉는다’고 할 만하지 몸뚱이가 앉는 것만 갖고는 좌가 되지 앉는다 이 말입니다.
또 내 마음이 바깥 경계를 당해서도 희로애락에 빠지거나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선이다.
선지식아! 어떠한 것을 선정(禪定)이라 하느냐?
밖으로 상(相)을 여의면 선(禪)이 되고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定)이 되니
만약 밖으로 상에 착하면 곧 안으로 마음이 어지럽고 만약 밖으로 상을 여의면 곧 마음이 어지럽지 않느니라.
본성은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定)에 있는 것이건만
다못 경계를 대하고 경계를 생각하므로 곧 어지러워 지나니
만약 모든 경계를 보아도 마음이 어지럽지 않으면 이것이 참된 정(定)이니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면서 상을 짓게 되는데, 거기 집착하지 않고 상을 여의면 이것이 선이고,
경계에 끄달리지 않아 마음이 고요하여 희로애락이나 탐진치 삼독에 물들지 않는 상태를 정이라 말한다,
우리들의 본마음은 스스로 깨끗하고 고요하여 본래로부터 괴로워할 일도 속박받을 일도 없는데
경계를 대할 때 마음이 상을 짓고 거기에 집착하기에 괴롭고 어지러워진다,
어떤 게 선정일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남편이 저녁에 퇴근해서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다,
그래서 좌선이나 하자 생각하고 방에 앉아 하기는 하는데 머릿속은 복잡하다,
몇 시에 오려고 그러나, 술이나 먹고 있지 않을까, 어느 술집에서 시간을 보낼까,
이런 생각을 하니 선정에 들어지지 않고 머리가 복잡하다,
겨우 마음이 진정되고 가라앉으려 하니 대문을 탕탕 두드린다,
문을 열어주고 방에 들어와 고요함을 맛보려고 앉아 있는데 또 잔소리를 한다,
방에 가서 조용히 잘 것이지 안방에 들어와서 술주정을 하니 선정에 방해가 된다,
이러니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살맛도 안 나게 된다,
이렇게 애쓰면서 하는 것이 선정일까요? 혜능대사는 그런 건 좌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럼 어떤 게 좌선일까,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것이 좌선입니다.
대문을 두드리면 누가 들어오려 하는구나 생각하고 그냥 문을 열어준다,
똑같이 경계를 대하는 것이지만 끄달리지 않으니 내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
술주정이란 불만이 있거나 할 말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못하고 있다가
술에 취하면 무의식적으로 나오거나 술 먹은 힘을 빌어 말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환자 상태임을 알자,
자신이 아내가 아니라 심리학자나 정신분석가라고 생각하면 이 또한 좋은 연구소재가 된다,
겉은 번듯한데 술 먹고 하는 걸 보면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이고 어린애 같은 짓이다,
이 사람이 평상시는 괜찮다가 술만 먹으면 왜 그럴까, 그 심리를 연구하자,
이렇게 하면 똑같은 일이라도 내 마음이 불안하거나 초조하고 짜증나지 않고 편안하다,
즉 경계에 착하지 않고 상을 짓지 않는 심리, 이러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선정 또는 좌선이라 할 수 있다,
앉아 있다고 선정이나 좌선이 아니고, 마음을 고요히 하려고 해서 고요해 지는 게 아니다,
경계에 집착하지 않고 상을 여의면 바로 그것이 좌요, 그래서 마음의 동요가 없는 게 선이다, 그것이 정이다,
선이란 이렇게 해석하고, 좌란 이런 것이고 정이란 저런 거구나 이렇게 사전식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좌선이든 선정이든 공이든 고요든 중도든 그것은 이름에 상관없고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경계에 집착하지만 않으면 저절로 마음이 고요에 이르게 됩니다, 알아듣겠습니까?
좌선은 허리가 아플 때는 서서하고 남편이 대문을 두드리면 가서 열어주면서도 할 수 있지만,
가만히 앉아있으면서도 여러 가지 번뇌 때문에 좌선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선정에 들지 못하는 것은 바로 색성향미촉법 중에 법에 집착해서,
자기가 일으킨 알음알이에 집착해서 그런 것입니다.
대문간에서 남편을 보고 성질을 내는 것은 눈에 보이는 색에 집착해서 그런 것이고,
남편의 술주정에 짜증나는 것은 귀에 들리는 소리에 집착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선지식아! 밖으로 상을 여의면 즉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으면 곧 정이니
밖으로 선하고 안으로 정한 것이 바로 선정(禪定)이 되느니라.
[정명경]에 이르기를 <즉시 활연하면 도리어 본심을 얻는다> 하였으며
[보살계경]에 이르기를 <나의 본성이 원래 스스로 청정하다> 하였느니라.
선지식아! 일체 생각 생각 중에 스스로 본성의 청정을 보아 스스로 닦고 스스로 행하여 스스로 불도를 이루게 하라.
그러나 이 법문의 좌선은 원래 마음에 착하지 않으며 또한 깨끗함에도 착(著)하지 않으며 또한 동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라.
만약 마음에 착한다면 마음은 원래 이것이 망령된 것이니 마음이 환(幻)과 같은 것임을 아는 고로 집착하지 않느니라.
만약 깨끗한 것에 착한다면 원래 사람의 성품은 청정하나 다만 망념으로 말미암아 진여가 덮힌 것이니 망상만 없애면 성품은 스스로 청정하거늘
다시 마음을 일으켜 청정에 착한다면 이것은 도리어 정망(淨妄)을 일으키는 것이니라.
망(妄)은 본래 처소가 없는 것인데 이제 착한다면 이것은 망이요,
청정은 형상이 없는 것인데 도리어 깨끗하다는 상(淨相)을 세워서 이것을 공부로 삼는다면
이런 견해를 짓는 자는 스스로 본성을 막고 도리어 정박(淨縛)이 되느니라.
좌선은 마음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집착하지 않는다 것은 깨끗하다는 것에도 더럽다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쉽게 말해서 깨끗하다는 상도 짓지 않고 더럽다는 상도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생각 불러 일으켜 깨끗하다 더럽다는 모양을 지어놓고
거기에 집착해 더러운 건 버리고 깨끗한 건 취하고 더러운 걸 싫어하고 깨끗한 걸 좋아하는데
이건 사실은 마음이 청정한 게 아니라 청정하다는 망념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즉 깨끗하다는 것에 대해 속박을 받고 있기에 ‘정박’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바깥에서 떠든다, 누가 문을 두드린다, 전화가 온다고 좌선에 방해된다고 성질을 내는 것은
좌선이라는 것에 속박 받고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바깥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게 좌선인데, 좌선 때문에 바깥경계를 시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을 좋아하지만 술로 인해 갖가지 괴로움을 겪기에 술을 그만 두려 했다면, 그냥 그만 두면 되는데,
술 먹는 사람을 보거나 술을 보면 성질을 내는 것은 술을 그만 둔다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술을 그만 두라 하면 술을 그만 두면 그걸로 끝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그런 것은 생각도 할 것도 없습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건 ‘황금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누가 우리 집에 황금을 실어다 놓으면 어떻합니까?’, 그런 일은 죽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으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깨달은 뒤에는 어떻게 합니까?’, 그건 깨닫고 난 뒤에 물으면 됩니다.
‘눈 뜨면 바깥세상이 어떻게 보입니까?’, 물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얘기입니다.
그건 눈 뜨면 자연히 알 수 있는 일이고, 지금은 눈 뜨려고 애 쓰는 게 중요합니다.
집에 가면 뭐가 있을까, 집에 가면서 그런 생각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가서 문 열어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생각해 이런저런 답을 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선지식아, 또한 부동을 닦는 자는 다못 모든 사람을 볼 때에 다른 사람의 시비와 선악과 허물을 보지 않나니 이것이 곧 자성부동(自性不動)이니라.
부동이란 몸뚱이를 가만히 둔다든지 아무 생각도 안 한다든지,
생각을 안해야 되는데 왜 자꾸 생각이 날까 이러면서 괴로워하는 게 아니다,
남의 허물을 보지 않으면 저절로 마음이 고요해진다.
선지식아! 미혹한 사람은 몸은 비록 부동이나 입만 열면 곧 타인의 시비 장단과 호오(好惡)를 말하여 도(道)와 등지니
만약 마음에 집착하거나 청정에 집착한다면 도리어 도를 막느니라”
몸은 부동하지만 입으론 다른 사람이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도와 등지는 것과 같고,
마음이든 청정이든 뭔가에 집착하는 것은 도리어 도를 막는 것과 같다.
경을 읽고 그 가르침을 따르며 해탈의 길로 가야 되는데 경에 집착해 갖가지 부작용을 일으키거나,
선정을 닦아라 하면 그냥 선정에 들면 되는데 그 방법론에 집착하고 옳다 그르다 시비하고,
선정이 되느니 안 되느니 잘 됐니 잘못 됐니 시비하는 것은 삿된 법일 따름이다,
(제17강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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