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4강에서 계속)
3. 정과 혜는 일체임
대사께서 대중에게 이르셨다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정혜(定慧)로써 근본을 삼느니라.
대중은 미혹하여 정(定)과 혜(慧)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혜는 일체요 둘이 아니니 정은 이것이 혜의 체(體)요 혜는 이것이 정의 용(用)이니라.
혜에 즉할 때 정이 혜에 있고, 정에 즉할 때 혜가 정에 있나니 만약 이 도리를 알면 정혜를 함께 배우게 되리라.
대개 도를 배우는 이들이 정을 먼저 하고 다음에 혜를 일으킨다거나
혜를 먼저하고 다음에 정을 일으킨다거나 하여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와 같은 견해를 갖는 자는 법에 두 모양이 있는 것이니라.
이는 입으로는 선하나 마음속은 선하지 아니함이니 공연히 정혜가 있다 하고 정혜가 같지 않은 것이요,
만약 말과 마음이 함께 선하여 내외가 한가지면 곧 정과 혜가 한가지리라.
스스로 깨닫고 수행함은 입다툼에 있는 것이 아니니라.
만약 먼저다 후(後)다 하여 다툰다면 이는 곧 미혹한 사람과 같으니
승부를 끊지 못하고 도리어 아(我)에 대한 국집만 더해가니 사상(四相)을 여의지 못하리라.
(~~ 여기까지는 강의 생략)
선지식아, 일행삼매(一行三昧)라 하는 것은 어느 곳에서나 행주좌와(行住坐臥)에 항상 한결같은 곧은 마음을 행하는 것이니라.
정진을 할 때는 가고 오고 앉고 눕고에 상관없이 한결같은 자세로 해야 한다,
일할 때나 밥 먹을 때나 화장실에 갈 때에도 화두를 놓지 않아야 짧은 시간 안에 자기 본성을 볼 수 있다,
놓을래야 놓을 수가 없어야 화두이다, 들었다 놨다 하면 그건 화두라 할 수가 없다,
정명경(유마경)에 이르기를, <곧은 마음 이것이 도량(道場)이며, 곧은 마음이 정토(淨土)>라 하였으니
마음으로는 첨곡(諂曲, 삐딱함)하면서 입으로는 다만 곧은 것을 말하며,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나 직심(直心)은 행(行)하지 않는 일이 없어야 하느니라.
다만 직심을 행하여 일체법에 집착을 갖지 말아라.
미혹한 사람은 법상(法相)에 착하여 일행삼매에 국집하면서 곧 말하기를,
<앉아 동(動)함이 없고 망령되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즉 일행삼매라> 하나니,
이와 같은 견해를 갖는 자는 곧 무정물(無情物)과 같으니 이는 도리어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 되느니라.
마음으로는 삐딱하게 하면서 입으로만 곧은 것을 말하고,
어떤 법상이나 가르침에 집착해 거기에 국집하는 것은 삿된 것이다,
미동도 하지 않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일행삼매다 하면 이것은 삿된 도리다,
우리들의 마음이 육근을 통해서 육진을 보고 느끼지만,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을 때 그것이 바로 일행삼매다.
선지식아! 도는 모름지기 흘러 통하여야 하거늘 어찌하여 도리어 체(滯)하랴.
마음이 법에 머물지 아니하면 도가 곧 통하여 흐르고 만약 마음이 법에 머무르면 이것을 스스로 얽매인다 하느니라.
제가 감옥에서 있을 때의 일을 얘기했지요,
그 사람들이 나를 속박하고 그 사람들이 나를 괴롭힌 것 같은데,
안으로 돌이켜보니 내가 나를 얽어매고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던 겁니다.
자기가 어리석은 줄 깨닫게 되면 자기가 자기를 해방시키고 괴롭힘에서 벗어나게 한다.
만약 앉아 동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면 저 사리불과 같이 숲속에서 좌선하고 있다가 도리어 유마힐의 꾸짖음을 당하리라.
유마경에 보면, 유마거사가 몸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누워있으니 부처님께서 문병 사절단을 파견하려 합니다,
부처님이 제일제자인 사리불에게 물었더니 ‘전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하며 이유를 설명합니다.
제가 옛적에 숲속 나무 아래 조용히 좌선하고 있는데, 유마힐이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리불이여, 반듯이 앉아있다고 해서 좌선하는 게 아니다,
좌선이라고 하는 것은 삼계에 몸과 뜻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며
무심한 상태 그대로 있으면서도 온갖 행을 다 나타내야 한다,
마음이 안에도 머물지 않고 밖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 좌선이고,
외도 즉 다른 종교나 다른 사상과 어울려 갖가지 논의를 하면서도 거기에 물들지 않고,
번뇌를 끊지 않고서도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좌선이다,
이렇게 좌선하는 것이라야 부처님이 인가하신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제가 그 때 이 말을 듣고 잠자코 있었을 뿐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에게 문병을 갈 수 없나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지식아! 또 어떤 사람이 좌선을 가르치되 마음을 보고 고요를 관하며 동하지 아니하고 일어나지 아니하여 이것으로 공부를 삼는다 하거늘
미혹한 사람은 알지 못하고 곧 이에 국집하여 전도(顚倒)하게 되나니
이와 같은 자들이 적지 아니하여 이와 같이 서로 가르치니 그러므로 이것은 크게 그릇됨을 알아야 하느니라.
조용한 데 가만히 앉아 자기 마음을 관찰하면서 자기 마음을 고요히 한다는 것도 삿된 견해라 말씀하십니다.
여기 지금 계신 분들 육조단경 배우고 나면 생각을 좀 바꿔야 됩니다,
오늘날 참선하면 좋다고 많이들 따라 하는데, 수행과 수련이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호흡법 배우고, 기수련하고, 육체와 정신을 집중시켜 단련하는 것과 불교의 수행은 다릅니다.
몸을 고도로 단련하면 보통 사람보다 몇 배의 힘이 나오듯, 정신 집중 훈련을 하면 갖가지 신통력도 나옵니다.
수행이란 놓아버리는 겁니다, 집중시키는 게 아니고 놓아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세속의 때를 벗지 못해서 자꾸 뭔가를 얻으려고 합니다.
수행을 했더니 몸이 건강해지고 재수가 있고 자식이 시험에 합격도 했다, 이런 걸 불교로 삼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수행은 해탈과 열반으로 가고자 하는 것이고, 참 행복과 참 자유를 얻고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무엇을 얻는데 있는 게 아니라 가진 것을 놔버리는데 있는 겁니다.
그러니 수행이 잘됐다, 수행이 안 됐다, 수행이 잘 안 되어 괴롭다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괴로움을 없애는 게 수행인데, 수행이 안 돼서 괴롭다는 것은 이미 수행병에 걸린 겁니다.
수행이라는데 집착하니까, 얻으려는데 못 얻으니까 괴로움이 생기는 겁니다.
돈 못 벌어서 한탄하듯 도(道) 못 얻었다고 한탄하는 사람은 불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선지식아, 정혜는 무엇과 같을까?
비유하면 마치 등불과 같으니 등이 있으면 빛이 있고 등이 없으면 곧 어두우니 등은 빛의 본체요 빛은 등의 작용이라.
이름은 비록 둘이나 체는 본래 동일하니 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선지식아, 정교(正敎, 바른 가르침)에는 본래 돈점(頓漸, 빠르고 더딤)이 없건만
사람따라 성품이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어 미혹한 이는 점차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번에 닦아서 스스로 본심을 알게 된다.
그러나 본성을 봄에는 차별이 없으니 여기서 돈점이라는 거짓 이름이 있게 되느니라.
뱀을 잡아라 하면 어떤 사람은 바로 잡고 어떤 사람은 벌벌 떨다 잡는다,
단박에 잡은 사람과 몇 시간 헛되이 보내다 잡은 사람을 보면 시간적으로는 빠르고 더딤이 있지만 잡고 나면 다 같은 것이다,
무섭고 징그럽다고 느끼는 것은 뱀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짓는 바다,
그러니 빠르고 더디다는 것, 그걸 그리 중요시 하면 안 된다.
그런데 돈이니 점이니 그걸 갖고 또 논쟁을 합니다,
저 사람은 단박에 쥐는데 왜 나는 단박에 못 쥡니까, 왜 나는 어리석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데, 어리석다 하지만 어리석다 할 만한 게 별도로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는 한 생각 붙들고 있고 그 사람은 금방 놔버린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놔버리는 건 제법이 공한 줄을 아는 것이고, 붙잡고 있는 건 상을 떠나지 못한 겁니다.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위로부터 내려오면서
먼저 무념(無念)을 세워서 종(宗)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으며 무주(無住)로써 본(本)을 삼느니라.
무상이라 함은 상에서 상을 여읨이요, 무념이라 함은 생각에서 생각이 없음이요,
무주라 함은 사람의 본성이 세간이 선이나 악이나 밉거나 곱거나 원수거나 친하거나 모질고 거친 말을 하거나 속이고 다툼을 당하거나 할 때
그 모두를 공(空)으로 돌려버리고 상대하여 해칠 생각을 하지 않고 생각 생각 중에 앞 경계를 생각하지 않음이니라.
만약 먼저 생각, 지금 생각, 뒷 생각이 생각마다 상속하여 끊임이 없으면 이것을 얽매임이라 하는 것이요
만약 모든 경계를 대함에 생각 생각에 머물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니 이 까닭에 무주가 근본이 된다 하느니라.
나의 이 법문은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이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무념이란 한 생각도 일어나기 이전을 말합니다.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이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선이니 악이니 옳으니 그르니 분별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선이니 악이니 옳으니 그르니 자기가 일으킨 생각으로 분별을 해놓고
선은 선의 실체가 있고 악은 악의 실체가 있다 이렇게 모양 짓는 걸 상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실체를 만들었으니 그 실체에 집착을 할 수밖에 없지요,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이 정말 있다면 누구나 가치 있는 것을 취하겠지요, 상이 있기 때문에 집착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근데 가치 있는 것도 없고 가치 없는 것도 없고, 가치란 내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존재 자체에는 가치 있는 것도 없고 가치 없는 것도 없다고 하는,
상이 본래 없음을 깨쳐버리면 집착할래야 할 수가 없습니다, 허공 같은 걸 누가 집착하겠어요,
상이란 다 내 마음이 일으킨 것이지 존재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무념을 으뜸으로 삼고, 무상을 몸뚱이로 삼고, 무주로 근본을 삼는다,
이것이 혜능대사의 핵심사상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이 중 무상을 말하고 무주를 집중적으로 말하다가 나중에 무념을 말하지요,
응무소주 이생기심이 바로 무념입니다.
선지식아, 밖으로 일체 상을 여읨을 무상이라 하나니 능히 상을 여의면 곧 법체가 청정하니라.
이 까닭에 무상으로 체를 삼느니라.
선지식아, 모든 경계에 마음이 물들지 않는 것이 무념이니
스스로의 생각이 항상 모든 경계를 여의어 경계에서 마음을 내지 않느니라.
그러나 만약 다만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모든 생각을 없애어 버리면
한 생각마저 끊어지면서 곧 죽게 되어 다른 곳에 몸을 받는다 한다면 이는 큰 잘못이라,
도를 배우는 사람은 경계하여야 하느니라.
만약 법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하면 자기 혼자 잘못되는 것은 오히려 어쩔 수 없거니와 다시 타인에게 권하여 그르치게 하며,
또한 자기가 미혹한 것은 알지 못하고 오히려 부처님 경전을 비방까지 하게 되니 이 까닭에 무념을 세워서 종을 삼느니라.
선지식아, 어찌하여 무념을 세워서 종을 삼는다 하랴.
다만 입으로만 견성하였다 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서 생각을 내게 되어
생각 위에서 문득 사견을 내니 일체 진로 망상이 이로부터 생기느니라.
자성은 본래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는 것을 만약 얻을 바가 있다하여 망령되이 화복을 말한다면 이것은 곧 진로며 사견이라.
그러므로 이 법문은 무념을 세워서 종을 삼느니라.
선지식아! 무(無)라 함은 무엇이 없는 것이며 념(念)이라 함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무라 함은 두 가지 상(二相)이 없는 것이니 모든 번거로운 망상이 없는 것이요,
념이라 함은 진여본성(眞如本性)을 생각함이니 진여는 곧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곧 진여의 작용이니라.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킴이요 눈이나 귀·코·혀가 능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니
진여에 성품이 있으므로 생각이 일어날 수 있거니와 만약 진여가 없다면 눈이나 귀나 빛깔이나 소리가 당장에 없어지리라.
약이 있고 독이 있다 할 때, 이 물질에는 약성이 있고 이 물질에는 독성이 있다고 하는 게 상을 짓는 겁니다.
부처님이 동쪽으로 가라 하셨다고, 동쪽을 가는 것이 서울 가는 핵심이라 생각하는 게 법집이다,
상이 있는 한 우리가 집착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습니다.
깨끗한 것이 따로 있고 더러운 것이 따로 있다면 우리는 깨끗한 것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집착을 못 놓는 것은 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착을 놓으려 해도 놔지지 않는 겁니다.
상이 있든지 말든지 집착을 탁 놔버리면 해결이 됩니다.
놔지지 않는 것은 바로 실체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지식아, 진여 자성이 생각을 일으킴으로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닫고 앎이 있더라도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아니하며 진성(眞性)이 항상 자재하니라.
이 까닭에 경에 이르기를 <능히 모든 법상을 밝게 분별하나 제일의(第一義)에 있어서는 동함이 없다> 하였느니라.”
고요함 속에서 갖가지 차별이 나왔기에, 갖가지 차별의 제현상이 돌이켜 돌아가면 상이 없는 적정한 경지로 돌아가게 된다,
‘진여자성이 나와서 육근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하니까 내 마음 속에 무슨 구슬 같은 본성이 있다고 생각하면 또 그르치게 된다,
‘진여자성이라 할 때 진여자성이라 할 것이 없고, 다만 그 이름이 진여자성이다’ 하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서울 가는 길은 무엇이라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그 모든 길을 다 알고 계시다가 일러준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어떤 의지도 생각도 내지 않고 계시다가, 다만 중생이 물으면 근기 따라 법을 설하신 것이다,
이것을 꼭 명심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자성을 찾는다 성품을 찾는다 해서 허공을 헤매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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