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7. 육조단경

[법륜스님의 '육조단경'] 제12강 본심을 알면 곧 해탈이다 3

상원통사 2019. 12. 20. 09:15

(~~ 제11강에서 계속) 

 

 

  만약에 도를 떠나 도를 찾으면   목숨은 다하여도 도는 못보리

  부질 없이 바쁘게 일생 보내다   백발이 찾아드니 뉘우치누나.

자기를 떠나서 해탈의 길을 찾으면 결코 부처를 볼 수가 없는데, 우리는 늘 바깥에서 행복을 구하고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돈을 쫒고 지위를 쫒고 명예를 쫒고 집 평수 늘리려 헤매고 바쁘게 삽니다.

나이 칠팔십 되어서 가만히 누워서 과거를 한 번 돌아보세요,

예쁜 여자 만나고 학벌 높이고 집 평수 키우는 것이 과연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요,

그런 것들은 지나고 나면 다 보이지만 그 땐 보이지 않습니다.

현명한 사람만이 미리 볼 수 있는 겁니다.

  

  만약에 참된 도를 보고자 하면  /  행이 바름이여 이것이 도니

  만약에 스스로 도심 없으면     어둠 속을 감이라 도는 못보리.

 

  참되게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 사람 허물을 보지 않나니

  만약 다른 사람 허물을 보면    도리어 제 허물이 저를 지나니

  다른 사람 그르고 나는 옳다면  내가 그르게 여김이 제 허물되리.

참되게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남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

다른 사람 허물을 본다면 도리어 그것이 제 허물이 된다,

다른 사람은 그르고 나는 옳다고 하면, 다른 사람이 그르다 하는 그 자체가 내 허물이 된다.

 

  다만 스스로 비심(非心) 버리면   번뇌는 부서져 자취는 없고

  밉고 곱고에 마음 안 두니         두 다리 쪽 펴고 편히 쉬도다.

여기서 비심은 허물을 보는 마음을 말합니다.

 

  만약에 다른 사람 교화하려면    모름지기 기틀 따라 방편을 써서

  저들의 의심뭉치 버리게 하라    즉시에 청정자성 들어나리라.

 

  불법은 세간 중에 있는 것이니   세간을 여의잖고 깨닫게 하라.

  세간을 여의고서 보리 찾으면    흡사 토끼 뿔을 구함 같니라.

불법은 세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간을 떠나지 않고 깨닫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없는 토끼 머리에서 뿔을 찾는 것과 같이 죽을 때까지 헤매도 못 찾는다.

 

  정견(正見)은 세간에서 뛰쳐남이요      사견(邪見)은 세간 속에 파묻힘이라.

  사()와 정()을 모두 다 쳐 물리치니   보리자성 완연히 드러나누나.

뛰쳐남이란 사로잡힘에서 벗어났다는 뜻이고, ‘파묻힘이란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세간에서 뛰쳐나는 것을 출세간, 세간 속에 파묻히는 것을 세속이라 말하는데,

도는 세간과 출세간을 나누는 데 있지 않다, 세간과 출세간이 바로 양변이다,

양변을 다 던져버리면 보리자성 완연히 드러난다.

 

  이 게송의 가르침이 바로 돈교며     또한 이름하여 대법선(大法船)이니

  미()하고 들으면 겁()을 지내고   바로 들어 깨친즉 찰나 사인져

돈교는 단박에 깨닫는 것, 대법선은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큰 배입니다.

한 생각 사로잡혀 있으면 몇 겁을 지나도 알지 못하고, 돌이키면 즉시에 깨닫게 된다.

 

대사께서 다시 이르시기를

이제 대범사에서 이 돈교를 설하니 바라건대 널리 법계 중생이 언하에 견성 성불 하여지이다하였다.

  이때에 위사군과 모든 관료와 도속들이 대사의 설법을 듣고 깨우치지 않는 이 없었으니 모두 다 일시에 일어나서 예배하면서 찬탄하기를

기쁘다! 어찌 영남에 부처님이 출세하심을 짐작이나 하였으랴하였다.

이분이 바로 부처이구나, 이 시골에 부처님이 출현하심을 어찌 짐작이나 했겠느냐,

설법을 들은 대중들은 이렇게 감복을 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2. 공덕과 정토를 밝히다

  

다음날, 위자사가 대사를 위하여 큰 재회를 베풀었는데 자사가 재를 마치자 대사에게 청하여 법상에 오르시게 하였다.

이에 관료와 선비와 대중들이 일제히 위의를 가다듬고 엄숙히 재배드렸다.

여기서 재회는 노는 잔치가 아니라,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베푼 잔치를 말합니다.

오늘 법회는 첫 날 청한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달라졌지요,

전에는 도인이 났다 하니 그냥 와서 법문을 한 번 들은 것에 불과했는데, 이제는 정중히 법상에 모시고 합장공경하고 묻습니다 

 

그 때에 자사는 물었다

제자가 화상의 설법을 듣자옵건데 참으로 불가사의 하옵니다. 이제 작은 의심이 있사오니 바라옵건데 재자비로 해설하여 주십시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의심이 있으면 물어라. 내 설하여 주리라

위공이 말하였다 화상께서 설하시는 법은 달마대사의 종지(宗旨)가 아닙니까?”

대사 말씀이 그렇다하였다.

()이 이르기를

제자가 듣자오니 달마대사께서 처음 양무제(梁武帝)를 교화하실 때 무제가 묻기를

  <짐이 일생동안 절을 짓고 스님을 공양하고 널리 보시(布施)를 하고 재()를 베풀었는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하니,

  달마대사의 말씀이 <실로 공덕이 없느니라> 하셨다 하옵는데 제자는 그 이치를 알지 못합니다.

  바라옵건데 화상께서는 말씀하여 주십시오하였다.

자사는 세속사람이다 보니 세속사람의 시각으로 묻습니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왔을 때, 양무제가 불교를 위해 온갖 일을 다 했는데 이 공덕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달마대사가 없다고 했습니다.

왜 달마대사가 그렇게 대답했을까,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실로 공덕이 없느니라. 옛 성인(달마대사)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라.

  무제가 마음이 삿되어 정법을 알지 못하고 절을 짓고 공양을 올리고 보시를 하며 재를 베푸니

  이것은 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이 공덕이 될 수는 없느니라.

  공덕은 법신 중에 있는 것이요 복을 닦는데 있는 것이 아니니라.” 하시고 다시 말씀하셨다.

성품을 보는 것이 공()이요 평등은 이것이 덕()이니

  생각 생각 막힘이 없어 항상 본성의 진실묘용(眞實妙用)을 보는 것이 공덕이 되는 것이니라.

  안으로 마음이 겸양하여 낮추면 이것이 공이요 밖으로 예()를 행하면 이것이 덕이며,

  자성이 만법을 건립하는 것이 공이요 심체(心體)가 생각을 여읜 것이 덕()이며

  자성을 여의지 않는 것이 공이요 응용에 물들지 않는 것이 덕이니,

  만약 공덕 법신(法身)을 찾으려면 다만 이에 의하여 지어야 이것이 참 공덕이니라.

이건 후대 사람이 만든 것 같습니다, 일자무식꾼 혜능의 말로 보기에는 너무 어렵습니다.

이렇게 하면 오히려 스승을 욕보이는 것이 됩니다.

다음 문장이 오히려 혜능대사의 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공덕을 닦는 사람은 마음이 가볍지 아니하여 항상 널리 공경하나니

  만약 마음으로 항상 남을 업수이 여기고 나를 내세우는 마음을 끊지 않으면 즉 스스로 공이 없는 것이요

  자심이 허망 부실하면 즉 스스로 덕이 없는 것이니 이것은 나를 내세우는 생각이 스스로 커져서 항상 일체를 가벼이 여기기 때문이니라.

이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

왜 양무제가 했던 게 공덕이 없겠느냐,

그러나 양무제가 진실한 불자라면 내가 이러이러 했는데 내 공덕이 얼마 만큼이냐이렇게 묻지 않아야 된다,

정말 제 꼬라지를 아는 사람이면,

불법이 이 땅에 전래한 지 이미 수백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중생들이 미혹하여 부처님 법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다가 이제야 조금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만백성이 먹고 살기도 힘들고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다 ~~

(이후 955초 분량은 녹화 안됨)

 

 

선지식아 생각 생각이 끊임이 없는 것, 이것이 공이요 마음을 평등히 하고 ㅡ곧게 쓰는 것이 덕이며

스스로 성품을 닦는 것이 공이요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덕이니라.

선지식아! 공덕이란 모름지기 자성 안에서 볼 것이요 보시나 공양올리는 데서 구할 바가 아니니라.

이와 같이 복과 공덕이 다른 것인데 무제가 진리를 알지 못하였을 뿐 우리 조사의 허물이 아니니라.”

   

(제12강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