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7. 육조단경

[법륜스님의 '육조단경'] 제9강 불성에는 본래로 차별이 없다 3

상원통사 2019. 12. 13. 10:20

(~~ 제8강에서 계속)


  

선지식아, 만약에 깊은 법계와 반야삼매에 들고자 하면 모름지기 반야행을 닦고 금강반야경을 지송하라. 곧 견성하리라.

마땅히 알라. 이 공덕이 무량 무변함을 경 가운데서 분명히 찬탄하셨으니 이를 다 말할 수 없느니라.

이 법문은 이것이 최상승(最上乘)이라. 큰 지혜 있는 사람을 위하여 설한 것이며, 상근인(上根人)을 위하여 설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지혜가 적고 근기(根機)가 얕은 자는 이 법문을 들어도 마음에서 믿음이 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비유를 들건대 큰 용이 염부제(閻浮提)에 큰 비를 내린다면

성읍이나 마을이 모두가 마치 대추나무 잎을 띄운 것과 같이 떠내려가겠지만

만약 큰 바다에 비를 내린다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나니

이와 같이 만약 대승인이나 최상승인이 금강경 설함을 들으면 곧 마음이 열려 깨치리라.

이 까닭에 마땅히 알지라.

원래 본성에는 스스로 반야의 지혜가 있어서 스스로의 지혜로써 항상 관조하므로 문자를 빌지 않나니, 비유하면 비와 같은 것이니라.

비는 본래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 이것은 용이 일으켜서 일체 중생과 일체 초목과 유정 무정으로 하여금 모두 다 윤택케 하고

모든 냇물은 바다로 흘러들어 마침내 하나로 합치게 되나니 중생본성의 반야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선지식아, 근기가 낮은 사람이 이 돈교법문을 들으면

마치 뿌리가 약한 초목이 큰 비를 맞으면 모두 다 쓰러져 자라지 못하는 것처럼 근기가 낮은 사람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원래 반야 지혜를 갖추고 있기는 큰 지혜 있는 사람과 조금도 차별이 없거니 어찌하여 법문을 듣고 스스로 개오하지 못할까?

이는 사견과 중한 업장과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니

마치 큰 구름이 해를 가리었을 때 바람이 불지 않으면 햇빛이 드러나지 않는 것과 같느니라.

반야의 지혜는 크고 작은 것이 없으나 일체 중생의 마음이 미()와 오()가 같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미혹하여 밖을 보고 수행하며 불을 찾으므로 자성은 보지 못하니 이것은 근기가 낮은 것이니라.

만약 돈교를 깨달아서 밖을 향하여 닦는 것을 국집하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 마음에서 정견(正見)을 일으켜서 항상 번뇌의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면 이것이 곧 견성이니라

(~~ 여기까지는 강의 생략)

 

선지식아, 안과 밖에 머물지 아니하고 가고 옴이 자유로와 능히 집착심을 버리면 일체에 통달하여 걸림이 없으리니,

능히 이 행을 닦으면 반야경과 더불어 본래로 차별이 없으리라.

경계를 그으면 안과 밖이 있게 되고, 안과 밖이 있으면 가고 옴이 있다,

경계가 없으면 안팎이 없고 가도 옴이 없으니, 이것을 우리가 자유롭다고 한다.

안팎의 경계를 짓고 거기 집착할 때 걸림이 있고 오지도 못하고 가지도 못하게 되는데,

그것을 놔버리게 되면 오고감이 자유로워진다,

능히 이 행을 닦으면 바로 반야심경(금강반야경)과 더불어 본래로 차별이 없다.

 

선지식아, 일체 수다라(修多羅)와 모든 문자인 대소이승(大小二乘)12부경이 사람으로 인하여 있는 것이며,

지혜의 성품으로 말미암아 능히 건립된 것이니 만약 세간 사람이 없으면 일체 만법이 본래로 있을 수 없느니라.

여기서 수다라란 인도어로 수트라(Sutra), 경전(経典)이라는 뜻입니다.

경전은 우선 대승경전과 소승경전으로 나누고, 소승경전은 다시 12부경으로 나누는 데,

12부경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문을 12가지로 분류한 것으로, 모든 경전을 말합니다.

12부경, 84천 부처님 말씀은 부처님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중생으로 인하여 있는 것이다,

이것 참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건 다른 종교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일체의 만물이 다 하느님을 위해 있고, 우린 그의 종이고 별 가치가 없는 존재인데,

불교에서는 모든 법문은 부처님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 다 우리들을 위해 있는 것이라 말합니다.

부처님의 84천 법문은 중생의 84천 번뇌 따라 설해진 것입니다,

중생의 번뇌가 없다면 부처님의 법문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법문은 다 우리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 까닭에 알아라. 만법이 본래 사람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임을!

일체 경서도 사람을 위하여 설하게 되니 그 사람 가운데는 어리석은 자도 있고 슬기로운 자도 있어서

어리석은 자는 소인이라 하고 슬기로운 자는 대인이라 하느니라.

어리석은 자는 지혜있는 사람에게 묻고, 지혜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과 더불어 법을 설하므로

어리석은 사람이 홀연히 마음이 열려 깨치게 되면 곧 지혜있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느니라.

선지식아, 깨닫지 못하면 불이 곧 중생이요, 한 생각 깨달을 때 중생이 곧 불이니라.

일체중생이 다 평등하다,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불이니 중생이니 할 뿐이다,

이런 말을 했으니 맞아 죽을 만도 하지요.

 

이 까닭에 알아라.

만법이 모두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자심 중에서 바로 진여(眞如) 본성을 보지 못하는가.

자기를 살펴서 깨닫지 못하고 왜 밖으로 찾아 헤매고 다니느냐,

진리는 산에 있는 것도 절에 있는 것도 책에 있는 것도 아니니 찾아 해맬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는 살피지 않고 밖으로만 찾아 헤맨다면 기독교와 차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바깥으로 진리를 구한다면 바깥의 하느님을 찾는 이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지난번에 초청한 목사님도 하느님을 안으로 찾았지요, 하느님도 안으로 찾으면 이미 깨달음에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법이 교회에 있느냐 절에 있느냐가 아닙니다, 안으로 보면 사탄도 천사가 될 수가 있고 밖으로 보면 천사도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하시는 육조대사도 참 위대한 분이지만,

스승과의 문답에서 깨친 육조대사보다 해골바가지 물 먹고 깨달은 원효대사가 더 통쾌합니다.

작은 나라에 태어난 죄로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러고,

제 조상은 시덥잖게 생각하고 남의 조상을 더 좋아해서 그러지 원효대사야 말로 정말 위대하신 분입니다.

제 족보는 못 외우면서 이스라엘 족보는 달달 외우는 사람들, 정신나간 사람 아니겠습니까.

 

보살계경(菩薩戒經)에 이르기를 나의 본원 자성이 본래 청정하니 만약 자심을 알면 견성이라. 모두가 불도를 이루리라하였으며,

또 정명경(淨名經)에 이르기를 즉시에 활연(豁然)하면 도리어 본심을 얻는다하였느니라.

선지식아, 내가 인() 화상 휘하에서 한 번 듣고 언하에 문득 깨달아 직하에 진여본성(眞如本性)을 보았으니

그러므로 이 교법을 널리 펴 내려가 도를 배우는 자로 하여금 보리를 단번에 깨닫도록 하여

각기 스스로 마음을 보고 스스로 본성을 보게 하느니라.

만약 스스로 깨닫지 못하거든 모름지기 최상승법을 아는 대선지식을 찾아서 바른 길의 가르침을 받아라.

보살계경은 법만경이고, 정명경은 유마경을 말합니다.

자기 성품을 보면, 자기 마음의 실체를 보면 참모습은 무아다, 아라 할 것이 없어 공하다.

인화상은 홍인대사를 말하는데, 중국 사람들은 늘 이렇게 끝자리를 부릅니다,

혜능은 능, 신수는 수, 홍인은 인으로 쓰곤 합니다.

문득 깨닫는다’, ‘단번에 깨닫는다’, 이런 말 때문에 혜능의 선을 돈오라 말합니다.

 

이러한 선지식은 큰 인연이 있어서 이른바 중생을 교화하고 인도하여 견성토록 하나니

일체 선법은 모두 선지식으로 인하여 능히 일어나느니라.

3세 제불의 12부경이 모든 사람의 성품 가운데에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으나

이를 능히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모름지기 선지식의 가르침을 구하여야 바야흐로 보게 되려니와

만약 스스로 깨친 자는 밖으로 구할 것이 없느니라.

자기 성품을 보게 되면 다 깨달을 수 있으니 그렇게 하면 좋지만, 그렇게 못하면 선지식의 도움을 얻어라.

밖으로 구할 것이 없다’, 경전 끝날 때까지 혜능대사는 수십 번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들을 때뿐이고 바깥에 한 발짝만 나가면 밖으로 구하는 게 일입니다.

이렇게 법문 듣고 나가다가도 누가 어디가면 좋은 일이 생긴다 하면 한 사람도 안 남고 다 거기 갈 것이고,

용한 사람이 미래를 알려 준다, 사업 잘 되는 비법 가르쳐 준다 어쩐다 하면 이런 법문 하나 마나입니다.

일 순간에 다 사라져 버립니다, 왜 그럴까, 그저 얻으려는 생각, 욕구불만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만약 일향 모름지기 다른 선지식의 지시를 기다려 해탈을 바라볼 수 있다고 국집한다면 이도 또한 옳지 않으니

왜냐하면 자기 마음속에 선지식이 있어서 스스로 깨닫는 것인데,

만약 삿되고 미혹한 마음을 일으켜 망념으로 전도하면 비록 밖으로 선지식의 가르침이 있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느니라.

우리가 깨닫지 못했을 때는 다른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는 게 좋다고 했지만,

나는 선지식이 가르침을 못 받았기에 못 깨달았다고 생각하면 이것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또 자기 맘에 있다니까 배울 게 뭐 있나, 나 혼자 쳐다보고 내 맘만 깨치면 되지, 이렇게 해도 안 된다,

어리석을 때는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야 되지만 그것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늘 자기가 스스로 살펴야 한다.

삿되고 미혹한 마음을 일으켜 망념으로 전도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물러서는 마음입니다,

나는 몰라요, 저는 절에 온 지 며칠 안 되요, 저는 늙어서요, 나는 가정주부라서요, 이렇게 물러서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다 안다는 생각, 나는 절에 다닌 지 20년 됐다, 나는 큰 스님 밑에서 배웠다, 이 두 가지가 큰 문제입니다.

 

만약 바르고 참된 반야를 일으켜 관조 한다면 1찰나 간에 망념이 모두 없어지나니

만약 자성을 알아 한 번 깨달으면 단번에 불지(佛地)에 이르느니라.

단번에 불지에 이른다, 이 말에 집착해서 복권 당첨되듯이 단박에 깨닫겠다고 욕심내서는 안 됩니다,

단박에 깨닫는다는 말은 자기를 바로 돌이키는 즉시 해탈한다는 얘기입니다.

마음을 돌이키면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이지, 밖으로 구해서 복권 당첨되듯이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