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육조단경 네 번째 강의시간이 되겠습니다.
선지식아, 지혜로 비추어 보면 안과 밖이 밝게 사무쳐서 자기의 본심을 아나니 만약 본심을 알면 이것이 곧 본해탈이며,
색깔 있는 안경을 끼고 보면 안경 색깔에 의해서 세상이 왜곡되게 보이고,
눈을 감고 더듬으면 일부분만 알 수 있는 데 그것이 세상의 전체인 양 생각하는 것도 왜곡이고,
또 작은 대롱을 통해서 세계를 보면 그 대롱만큼만 보이게 되는데 그것이 세계의 참모습인양 생각해도 또한 왜곡이 됩니다.
지혜로 비춰본다는 것은 이런 안경을 벗어버리고, 눈을 뜨고, 대롱을 버려버리고,
자기 경험의 세계,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그런 것을 벗어나서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지혜로 비추어 보면 안과 밖이 밝게 사무쳐서 자기의 본심을 아나니,
자기의 본래 모습, 참모습, 본심을 알면 이것이 곧 해탈이다, 그럼 본심이란 뭘까요?
본심은 본심이라 할 것이 없는 바로 텅 빈 것입니다,
나라 할 것이 없는 줄 알면 우리는 구할 것도 없고 희로애락에 찌들 것도 없다,
무엇인가 상을 지어 그것을 나로 삼고 거기 집착하기 때문에 갖가지 분별과 제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 해탈을 얻었으면 곧 그것이 반야삼매(般若三昧)며 또한 이것이 무념(無念)이니라.
어찌하여 무념이라 할까? 만약 일체법을 보더라도 마음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이 무념이라.
여기서는 ‘무아’라는 말을 쓰지 않고 ‘무념’이라는 말을 주로 씁니다.
‘마음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는다’, 육근경계에 끄달리지 않는다 또는 어떤 상도 짓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작용을 일으킨즉 일체처에 두루 하되 일체처에 집착하지 않으며
마음을 일으키면 모든 곳에 다 그대로 작용을 하는데, 거기에 집착하거나 물들지 아니하며,
다만 본심을 깨끗이 하여 육식(六識)으로 하여금 육문(六門)으로 나오더라도 육진(六塵) 중에 물들지 아니하고 섞이지도 아니하며,
오고 감에 자유롭고 통용에 걸림이 없으니 이것이 즉시 반야삼매며 자재해탈이니 그 이름이 무념행이니라.
육식은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 육문은 안·이·비·설·신·의, 육진은 색·성·향·미·촉·법입니다.
불교에서는 우주 존재를 육식, 육문, 육진을 합쳐 18계로 분석합니다.
여섯 가지의 인식작용인 육식이 우리 몸의 육문(눈 귀 혀 코 몸 뜻)으로 나와서, 눈앞의 경계(대상)인 육진을 보는 것입니다.
즉, 눈으로는 물질을 보고, 귀로는 소리를 듣고, 코로는 냄새를 맡고, 입으로는 맛을 보고,
몸으로는 감촉을 느끼고, 마음으로는 생각을 하여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주는 이렇게 18계로 이루어졌고, 이 18가지를 만법이라 하고, 만법이란 세상의 모든 존재를 의미합니다.
금강경에서는 색성향미촉법에 집착하거나 머무르지 아니하고 보시하고 생각을 내는 것,
이것을 함이 없는 행, 무위의 행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무념행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생각을 끊는다면 이것은 법박(法縛)이며 변견(邊見)이니라.
‘아무 생각도 안 해야 돼, 생각을 끊어야 돼’, 이런 것은 법에 집착해 법의 속박을 받는 것으로 법박이라 하고,
중도가 아닌 이쪽이나 저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변견이라 합니다.
무념행이란 ‘아무 생각도 안하고 모든 생각을 다 끊어버리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가 생각을 끊어야 된다’ 할 때는 생각을 끊어야 된다는 의지 작용이 일어나 행을 불러 일으키기에 이미 망념이 됩니다.
고요해지려고 하는 것은 혼란스럽다는 것이고, 번뇌를 끊어야 되겠다는 것은 이미 번뇌를 일으키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마음이 불안하다, 그럴 땐 불안한 마음을 없애려 하지 말고 그냥 살피세요,
그래서 그것이 망념으로부터 일어나는 줄을 알게 되면 그냥 저절로 사라져 버립니다.
번뇌도 번뇌인줄 그냥 알아차려야지, 번뇌를 없애야 되겠다 하면 이미 또 하나의 번뇌를 불러 일으키는 겁니다,
번뇌를 일으켜 그 번뇌 위에서 일으킨 분별을 따라 가면 안 되고, 번뇌를 일으키는 그 자체를 바로 직시해야 되는 겁니다.
선지식아, 무념법을 깨달은 자는 만법에 걸림없이 통하며, 무념법을 깨달은 자는 제불 경계를 보며, 무념법을 깨달은 자는 불 지위에 이르느니라.
선지식아, 뒷날 나의 법을 얻은 자가 이 돈교법문을 가지고 견해를 같이 하며 행을 같이 하기로 원을 발하며,
받아 지니기를 부처님 섬기듯이 하며 종신토록 물러서지 않는다면 결정코 성인 지위에 들리라.
일체 만법을 보더라도 마음에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무념이라고 한다,
눈을 감고 보지 않고 귀를 막고 듣지 않는 것이 무념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되, 보고 듣는 것을 모양 짓지 않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무념이다,
그리고 나의 법을 얻은 자는 모름지기 위로부터 내려오면서 말없이 분부하심을 모두 전수하여 정법을 숨김이 없이 하라.
그러나 만약 견해가 같지 않고 행이 같지 않아 다른 법에 있는 자이거든 법을 전하지 말라.
그의 앞 사람을 손해하고 마침내 아무런 이익이 없으리니
저 어리석은 사람이 알지 못하고 이 법문을 비방하므로써 백겁(百劫) 천생(千生)으로 부처 종자를 끊을까 두려우니라.
이 법은 전혀 새로운 법은 아니라 역대 조사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니 숨김없이 하라.
그러나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시비분별 짓고 그런 망상으로 진리를 논하는 자에게는 전하지 말라.
선지식아! 나에게 한 무상송(無相頌)이 있으니 모름지기 각기 외워지녀라.
재가인이든 출가인이든 다만 이에 의하여 닦아라.
만약 스스로 닦지 아니하고 오직 내 말만 왼다면 또한 아무 이익이 없느니라.
무상송이란 모양이 없는 노래를 말합니다.
혜능대사는 내용에 충실하지 않고 ‘내가 한 말’ 만 외워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11강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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