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7. 육조단경

[법륜스님의 '육조단경'] 제11강 본심을 알면 곧 해탈이다 2

상원통사 2019. 12. 19. 09:09

(~~ 제10강에서 계속)

 

 

나의 송(頌)을 들어라.

 

  무애설법(無碍說法) 진여(眞如) 마음 모두 통하니   태양이 허공에 있음과 같네.

무애설법이란 걸림이 없는이란 뜻이고, ‘진여 마음은 참 마음, 본심을 말합니다.

태양이 허공에 있음과 같네, 태양은 허공에서 일체 차별을 하지 않고 그냥 내려 쪼인다,

또는 태양이 허공에 있어 보려고 하는 자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처럼 다 통하는 거다.

 오직 견성하는 이 법 전하여                         세간에 들어내어 사종(邪宗) ()일세

밖이 아니라 자기에게로 돌려 본심을 보는 이 법을 전하여 이 세상에 드러내어 삿된 가르침을 깬다,

삿된 가르침이란 진리가 밖에 있는 줄 알고 밖을 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법인즉 돈()도 점()도 없는 것인데              /   중생의 미오(迷悟) 따라 늦고 빠르네

법에는 빠르고 더딤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좋은 것 나쁜 것, 유치원 과정 대학원 과정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은 그냥 중생의 근기 따라 법을 설했을 뿐입니다.

깨닫고 못 깨닫는 것은 중생이 어리석냐 지혜롭냐에 따라 느리기도 하고 빠르기도 합니다.

 성품 보아 부처 되는 이 수승한 문을               / 어리석은 무리들이 어찌 다 알까?

성품보아자기를 돌이킨다는 뜻입니다.

원효대사가 아침에 토하면서 해골 물이니 토하는구나!’ 이러고 그냥 끝날 수도 있었는데,

어제 밤에 마셨던 인연과 오늘 것을 결부시키면서 모든 게 내 마음에 있구나하고 깨우친 겁니다.

  

  말로 하면 만 가지로 벌어지지만                  이치에 들어서면 모두가 하나

드러내면 만법으로 벌어지고, 돌이켜 돌아가면 바로 일심으로 돌아간다,

원효대사는 일심이 일어나니 만법이 일어나고 일심이 사라지니 만법이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번뇌의 안개 속 어두운 집안에                     지혜의 밝은 태양 항상 빛내라.

어리석은 상태가 마치 번뇌의 안개 속 어두운 집안과 같지만, 한 생각 돌이키면 지혜의 밝은 태양 항상 빛난다.

 

  사념(邪念)일 때 번뇌가 이는 것이며             정념이면 번뇌가 가시는 지라

  사()와 정() 모두 여의어 쓰지 않을 때       생멸 없는 청정지에 이르렀더라.

자기가 일으킨데 사로잡혀 있는 것을 이름하여 사념이라 합니다.

시작과 끝이란 본래 없습니다, 근데 시작과 끝이 있다고 한 생각 망념을 일으키고,

그 생각 위에서, 왜 시작이 있느냐, 창조된 것이다, 끝나면 어떻게 되느냐, 종말이다 하고,

그럼 누가 창조했느냐, 종말이 오면 어떻게 되느냐, 이렇게 수도 없이 답을 만들어 나가는데 그게 다 망념입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난 이후에 시작과 끝이 있는 거지 한 생각 일으키기 전에는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사념일 때 번뇌가 이는 것이며 정념이면 번뇌가 가시는지라,

눈을 감고 꿈을 꾸면 온갖 악몽이 일어나지만 눈을 뜨면 전부다 사라져버린다,

사와 정 둘 다 버리면 일어날 것도 없고 사라질 것도 없다, 그래서 생멸 없는 청정지에 이르게 된다.

 

  보리는 본래로 이 자성이니                   마음을 일으킬 때 즉시 망()이라

  정심(淨心)이란 망념 중에 있는 것이니          다만 정심(正心)이면 삼장(三障)이 없네.

깨달음이란 스스로 자기를 보는 것이다, 한 생각 일으키면 벌써 꿈이고 거짓이다.

한 생각 일으켜 깨끗하다 더럽다 둘로 나누고, 더러운 마음 버리고 깨끗한 마음 가져야 된다거나,

더러운 마음을 닦아 깨끗한 마음이 되어야 된다고 하면 벌써 망념이 된다.

여기서 앞의 정심(淨心)은 깨끗하고 더러운 걸로 나누어진 것 중의 깨끗한 마음이고,

뒤의 정심(正心)은 둘을 떠난 바른 마음을 말합니다.

이 때 바르다는 것도 바르다, 바르지 않다는 이분법적인 개념에서 사용하면 이 또한 망념이 됩니다.

삼장이란 수행하는데 장애가 되는 세 가지를 말하는데,

번뇌를 일으켜서(번뇌장), 거기에 따라 업을 짓고(업장), 거기에 따라 과보를 받는(보장) 것입니다.

다만 정심이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니 업을 지을 일이 없고, 업을 짓지 않으니 과보가 따르지 않는다.

 

  세간 사람 만약에 수도 하는 데는       일체 세간사에 방해 안되니

  항상 스스로 제 허물 보면               도와 더불어 서로 맞으리.

혜능대사는 법문을 듣는 사람들이 대부분 재가신자였기에 세상 사람들의 수행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수도를 하는 데는 직장, 직업, 결혼생활, 부모 자식 등이 아무런 방해가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그것들이 방해된다고 할 수도 있는데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좋은 길 가려는데 처자가 있어서 못 간다면 아내와 자식은 내 좋은 길을 막는 마구니가 되는 겁니다, 처자가 마구니는 아니잖아요?

그것들이 아무 방해가 안 된다면 뭐가 문제일까, 눈을 밖으로 돌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출가한 중이든 재가 신도든, 기독교도든 이슬람교도든 상관없이 눈을 자기에게로 돌려라,

안으로 돌려야 제 허물을 볼 수 있습니다.

항상 스스로 제 허물을 보면 도와 더불어 서로 맞는다,

여러분들 상담와서 마누라 땜에, 남편 땜에, 자식 땜에, 부모 땜에 못 살겠다고 하는데,

이게 다 밖으로 보고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돌이켜서 자기로 향하게 되면 도와 더불어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일체 중생 제각기 도가 있으니   서로서로 방해 없고 괴로움 없으리.

모든 중생이 다 아무런 허물이 없고 그대로 부처될 수 있는 성품이 있는데,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분별에 따라서 허물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애들 보고 공부 못한다고 구박하는데 공부 못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은 공부 못한 사람들이 일을 해서 유지되는 것이지 공부 잘한 놈이 위에 앉아있어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쓸 데 없는 공부하기 싫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현대의 학교란 아이들을 틀에 집어넣어 규격인간으로 만드는 곳입니다.

규격상품을 대량생산하듯이 규격인간을 대량생산하는 것이 학교 교육입니다.

현재의 학교교육은 산업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을 키우는 제도이지, 미래사회에 적합한 교육 시스템이 아닙니다.

자기 특성에 맞게, 즉 자기를 깨닫고 창조적인 인간이 되도록 키워야 됩니다.

지금 아이들이 사회에서 주요 활동을 하는 나이는 마흔 정도, 25년쯤 후일 것입니다.

25년 후에 이 세상이 얼마나 바뀔지 상상이나 해봤습니까?

학교교육도 아이들이 흥미를 갖도록, 창조적인 인간을 키울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합니다.

일체중생 제각기 도가 있으니’, 다 그대로 아무 흠집이 없는 것이다,

괜찮아요, 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고 부처가 될 수 있고 그런 성품을 갖고 있습니다.

서로서로 방해 없고 괴로움 없으리’, 아무 문제가 없다,

아무 문제가 없으니 괴로울 일도 없고 속박 받을 일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속박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지만 눈을 바로 뜨고 보면 벗어날 것도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문제가 없다는데 전제를 두고 시작해야 합니다.

고친다 하더라도, 나쁘기 때문에 고치는 게 아니라 안 맞거나 입장이 달라 고친다 이런 각도에서 봐야 합니다.

나쁘다고 보면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서로서로 방해 없고 괴로움 없다, 일체 중생이 다 그대로 부처니 누가 누구를 괴롭히고 방해하겠는가.

 

(제12강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