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강에서 계속)
선지식아, 심량이 광대하여 법계에 두루하니 작용을 하면 요요분맹하여 응용함에 곧 일체를 알며,
일체가 곧 하나요 하나가 곧 일체여서 거래에 자유로와 심체가 막힘이 없는 것이 이것이 반야니라
선지식아, 일체의 반야지는 모두가 자성에서 나(生)는 것이요,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니,
그릇 생각하지 않는 것을 참성품을 스스로 쓴다 하는 것이리라.
하나가 참되매 일체가 참되느니라.
일체가 다 자기로부터 나는 것이니 진리(깨달음)를 밖에서 찾으면 안 된다,
마음이 공한 줄 깨달아 그 본성품을 보게 되면 일체가 다 청정한 것이다
마음은 큰일(大事)을 헤아리고 작은 도행(道行)도 행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는 종일 공을 말하고 마음에서 이 행을 닦지 않는 이런 일을 하지 말지니
이는 흡사 범인(凡人)이 국왕을 자칭하는 것과 같아서 아무 소용없나니 이런 자는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마음으로는 온갖 생각을 다 하지만 몸으로는 작은 도행도 행하지 않는 것은
보통 사람이 입으로만 ‘내가 왕이다’ 라고 큰 소리 치는 것과 같다,
그처럼 종일토록 입으로 공을 말해봐야 남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이렇게 혜능대사는 입으로 공을 말하는 자를 계속 비판하고 있습니다.
왜냐, 당시 중국불교는 공을 논하는 불교, 철학으로서의 불교로 변해버렸기에 거기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식아, 무엇을 반야라 할 것인가? 반야라 함은 여기 말로 지혜라.
일체처 일체시에 생각 생각 어리석지 아니하여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이 곧 반야행이니라.
한 생각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어짐이요, 한 생각 슬기로우면 곧 반야가 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을 반야라 할 것인가, 생각 생각이 어리석지 않는 것이 반야행이라 할 것이다,
혜능대사의 관점은 일반 불교인들과 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한 번 반야를 증득하면 그 다음부터는 영원히 반야지가 빛난다,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한 번 깨달으면 영원히 빛이 난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즉 깨달음이란 것을 정태화시키고 고정불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 생각 바르게 내면 그게 깨달음이고, 한 생각 어리석게 내면 그게 중생입니다,
중생이 따로 있고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면 중생이 되어 서로 다투고 욕심내어 온갖 괴로움이 생기지만,
어리석은 줄 깨우치면 일체의 번뇌가 그 자리에서 바로 사라져 버립니다,
깨우침을 얻는 것이 지혜이며 깨달음이고, 한 생각 사로잡히는 것이 어리석음이고 중생입니다,
즉, 깨달음을 정태적으로 보지 않고 동태적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깨달음을 정태적으로, 고정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중생과 부처를 구분합니다.
못 깨달은 사람은 이쪽에, 깨달은 사람은 저쪽에 놔 놓고 이것과 저것은 차이가 난다,
경계선을 넘은 자는 영원히 깨달은 자가 되고 못 넘은 자는 영원히 중생이다,
우리는 아무리 해도 그냥 중생일 뿐이고, 저 분은 깨달은 자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잠자는 중생이 그대로 눈 감고 자고 있으면 중생이지만 자다가 눈을 뜨면 부처가 되고,
부처라 할지라도 깨어 있을 때 부처이지 깼다가 다시 잠들면 중생이 됩니다.
불이 한 생각 어리석으면 중생이라 하고 중생이 한 생각 바로 일으키면 부처라 한다,
이걸 스스로 자각하면 늘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사로잡히면 어리석어지고 마음을 사로잡히지 않게 되면 지혜로워지는 것이다,
주리반특 같은 바보도 한 생각 바르게 일으켰기에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생각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어짐이요, 한 생각이 슬기로우면 곧 반야가 나는 것이다,
‘도인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고행하는 것은 결과에 집착해 과정을 괴롭게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면 부처님이 왜 6년간의 고행을 버렸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깨달음을 얻을 줄 알았는데 해보니 그것이 깨달음의 길이 아니었고,
세속에 있을 때 온갖 것을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지만 그 길도 행복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생각을 일으켜서 뭔가 얻으려고 할 때 거기에는 해탈의 길이 없습니다.
해탈의 길은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사로잡힌 상태를 자각해서 놔버리면 바로 자유로워집니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어짐이요 한 생각 슬기로우면 곧 반야가 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고 미혹하여 반야는 보지 못하면서 입으로만 반야를 말하며
마음속은 항상 어리석으면서 항상 말하기는 내가 반야를 닦는다고 한다.
생각 생각마다 공을 말하나 진공(眞空)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반야는 형상이 없는 것이라 지혜심이 바로 이것이니 만약 이와 같이 알면 곧 반야지라 할 것이니라.
바라밀이란 무엇일까?
이는 서쪽나라 말이니 여기 말로는 피안(彼岸)에 이르렀다는 말이라 생멸을 여의었다는 뜻이니라.
경계를 집착하면 생멸이 이(生)나니, 이는 물에 물결이 이는 것과 같아서 이것이 곧 이 언덕이요,
경계를 여의면 생멸이 없나니 이는 물이 항상 자유로이 통해 흐르는 것과 같아서 이것이 곧 피안이 됨이라.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이는 것과 같고 경계를 여의게 되면 곧 생멸이 없는 것과 같다,
피안에 가는 것은 요단강을 건너가거나 반야용선을 타는 것이 아니다,
경계에 집착이 없으면 바로 저쪽 언덕에 가는 것이고, 경계에 집착하면 이미 이쪽 언덕에 와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라밀이라 하느니라.
선지식아,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만 외우므로 외고 있을 때에는 망(妄)도 있고 비(非)도 있지만
만약 생각 생각마다 행하면 이것이 곧 진성(眞性)이니라.
이 법은 깨달으면 이것이 반야법이요, 이 행을 닦으면 이것이 반야행이니라.
닦지 않으면 즉 범부요, 일념 수행하면 자신이 불과 같으니라.
선지식아, 범부가 곧 불이요, 번뇌가 곧 보리니
전념(前念)이 미혹하면 즉 범부요, 후념(後念)이 깨달으면 즉 불이라,
깨어나면 부처요 잠자면 범부입니다.
잠자는 사람 따로 있고 깨어있는 사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깬 사람이 잠들면 잠자는 사람이 되는 거고, 잠자는 사람이 깨면 깬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전념이 미혹하면 범부요 후념이 깨달으면 불이다, 한 생각 미혹하면 범부요 한 생각 깨달으면 부처다.
혜명이 발우에 욕심을 내 거기까지 쫓아 올 때는 중생 중에도 상중생이었지만,
무릎 꿇고 ‘법을 구하러 왔다’고 할 때엔 이미 구도자로 변한 것이다,
한 마음 안에서도 이렇게 두 가지가 벌어집니다.
두 가지가 따로 있다가 한 번 이게 튀어나오고 한 번은 저게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본래 텅 빈자리로부터 한 생각 사로잡히면 악심이 일어나고 깨달으면 선심이 일어나는 겁니다.
지금까지 어리석은 생각을 냈더라도 이 순간부터 탁 놔버리면 다 불보살이 되고, 인생이 태평성대가 됩니다.
전념이 경계에 집착하면 번뇌가 되고 후념이 경계를 여의면 즉시 보리니라.
번뇌가 따로 있고 보리가 따로 있고, 부처가 따로 있고 중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중생되기 쉬운만큼 부처 되기도 쉬운 것이다,
오늘날은 이런 법문에 익숙하니까 그렇지, 당시 중국에서 이런 법문은 파격에 해당합니다,
다생겁래로 억겁을 두고 갖가지 고행을 해도 부처가 될까 말까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이런 설법을 했으니 두들겨 맞고 쫒겨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선지식아, 마하반야바라밀이 가장 높고 가장 위며 가장 으뜸인
현재도 없고 과거도 없으며 또한 미래도 없으니 3세제불이 이 가운데서 나오느니라.
마땅히 대지혜를 써서 오온(五蘊) 번뇌 망상을 타파하라.
이와 같이 수행하면 결정코 불도를 이루리니 삼독(三毒)이 변하여 계정혜(戒定慧)가 되느니라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다 뛰어넘어버리니, 과거라 할 것도 미래라 할 것도 현재라 할 것도 없다,
대승경전에 말세란 말이 나오지만, 마음이 미혹해서 말세가 되는 것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시간에 길고 짧은 것도 없는데 무슨 말세가 따로 있겠느냐, 중생이 어리석으면 이름하야 말세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면 탐진치 삼독이 변해서 바로 계정혜 삼학(三學)이 된다,
어떤 경계에 탐착하고 거기에 집착해서 욕심을 일으키는 것이 탐욕이고,
내 생각만 옳다는 데 집착하면 화나고 짜증나고 성이 나는 것이 진심(嗔心)이다,
이 어리석음을 돌이키는 순간 일체가 사라져 버리는데 그것이 고요이고 정이다,
나라고 할 것이 있는 줄 착각하고 거기에 사로잡히면 세상 만상이 다 별개로 보이지만,
텅 비어 나라 할 것이 없는 줄 알면 천하만물이 본래 청정한 걸 알게 된다, 그것에 혜다.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한 반야로부터 팔만사천의 지혜를 내느니라.
무슨 까닭일까?
세간 사람이 팔만사천의 진로(塵勞)가 있기 때문이니 만약 번뇌가 없으면 지혜가 항상 드러나 자성을 여의치 않느니라.
이 법을 깨달은 자는 곧 생각도 없고 기억도 없고 집착도 없어서
거짓과 망령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진여성(眞如性)을 써서 지혜로 일체법을 관조하여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않나니 이것이 곧 견성이요, 불도를 이룸이니라.
경계에 집착하면 갖가지 번뇌가 일어나고, 집착을 놓게 되면 번뇌가 사라져 지혜가 스스로 드러난다.
이 법을 깨달은 자는 무념 무상 무주(無念 無相 無柱)의 상태가 되는데,
이걸 이름하여 견성이다 불도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후는 제9강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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