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7. 육조단경

[법륜스님의 '육조단경'] 제7강 불성에는 본래로 차별이 없다 1

상원통사 2019. 12. 11. 14:55

오늘은 육조단경 세 번째 강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하루는 생각하니 때가 바로 마땅히 법을 펼 때라 더 숨어 있을 것이 아니므로 드디어 산에서 나와 광주(廣州) 법성사(法性寺)에 이르렀다.

마침 인종(印宗) 법사가 <열반경(涅槃經)>을 강하는 중이었다.

그 때 바람이 불어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고 한 중은 말하기를 바람이 움직인다하고,

다른 한 중은 깃발이 움직인다하며 의론이 끊이지 않는다.

그 때 내가 나서서 말하기를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라, 당신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요하였더니 모여있던 대중이 모두가 놀랬다.

이윽고 인종이 나를 상석으로 맞아 깊은 뜻을 묻고 추궁하였다.

나의 대답이 말은 간략하고 이치는 합당하며 문자에 말미암지 않는 것을 보고 인종이 말하기를

행자님은 정말 비상한 분이십니다.

 오래 전부터 황매의 의법이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말을 듣고 있사온데 행자님이 바로 그분이 아닙니까?” 한다.

내가 그러하외다하니 인종이 제자의 예를 갖추어 절을 하고 전래의 의발을 대중에게 내어 보이기를 청하고 다시 묻기를

황매에서 부촉하실 때의 가르치심이 어떠한 것이옵니까?” 한다.

내가 대답하였다 가르침이란 없고 다만 견성(見性)만을 논할 뿐 선정해탈(禪定解脫)을 논하지 않았습니다.”

인종이 또 물었다 어찌하여 선정해탈을 논하지 않습니까?”

이법(二法)이 되기 때문이니 이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불법은 둘이 아닌 법입니다.”

인종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둘이 아닌 도리입니까?”

내가 말하기를

법사가 열반경을 강설하매 불성이 이 불법의 둘 아닌 법임을 밝게 보니

  저 열반경에 고귀덕왕보살(高貴德王菩薩)이 부처님께 사루기를

  <사중금계(四重禁戒)를 범한 이나 오역죄(五逆罪)를 지은 이나 또는 일천제(一闡提) 등은 마땅히 선근불성(善根佛性)이 끊어집니까?> 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근에 둘이 있으니 하나는 상()이요, 둘은 무상(無常)이라>하셨으니

  불성은 상도 아니며 무상도 아니요, 이런 고로 끊어지지 않는 것을 둘이 아님이라 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는 선()이요, 둘은 불선(不善)이니, 불성은 선도 아니며 불선도 아니니 이런 고로 둘이 아니라 하는 것이며,

  또한 온()과 계()를 범부는 둘로 보나 지혜 있는 사람은 그 성()을 요달하여 둘로 보지 않으니 둘이 아닌 성품이 곧 불성입니다.” 하였다.

인종이 내 말을 듣고 환희 합장하여 말하기를

제가 경을 강의하는 것은 마치 깨어진 기와장과 같고 인자(仁者)의 논의는 진금(眞金)과 같습니다.” 하였다.

이에 인종이 나로 하여금 머리를 깎게 하고 나를 스승으로 섬기기를 원하니 드디어 내가 보리수 하에 동산(東山) 법문을 열게 되었느니라.

내가 동산에서 법을 얻은 후 갖은 신고를 모두 받으면서 목숨이 마치 실낱에 달린 듯했더니,

금일 사군과 관료와 승니도속들과 더불어 이와 같이 모임을 함께 하게 되니 이것이 어찌 누겁의 인연이 아니랴.

또한 이것은 과거 생중에 제불에 공양하고 함께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제 바야흐로 돈교의 법을 얻는 인()을 얻은 것이다.

이 가르침은 먼저 성인께서 전하신 바요, 결코 이 혜능 스스로의 지혜(自智)가 아니니,

옛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기를 원하는 이는 각기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자세히 듣고 각기 스스로의 의심을 제하라.

선대 성인과 다름이 없으리라

(~~ 여기까지는 강의 생략)

    


대사께서 다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식아, 보리반야의 지혜는 세간 사람이 다 본래부터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인데

  다만 마음이 미혹하여 스스로 깨닫지 못할 따름이니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가르침과 인도함을 빌어서 견성하여야 하느니라.

여기서 보리라는 말도 깨달음이고, 반야라는 말도 깨달음이고, 지혜라는 말도 깨달음이니,

보리반야의 지혜최상의 깨달음이나 완전한 깨달음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완전한 깨달음, 최상의 깨달음에 이르는 지혜는 모든 사람이 다 본래부터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미혹하다는 것은 자기 경험에 사로잡혀 그것만이 세계의 모든 것인 양 규정짓고 그 울타리 안에 갇혀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진다고 할 때, 다리를 만진 경험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지만,

그 경험을 전체화 시켜 코끼리는 기둥같이 생겼다고 한다면, 그를 미혹한 중생, 어리석은 중생이라 합니다.

스스로 미혹하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들 학교 다닐 때엔 다 똑똑한 사람이었겠지만 결혼 후에는 가정에만 갇혀서.

오직 집안일 하고 남편과 자식에게 매달리다보니 범위가 확 좁아져 좀생이가 되어버립니다,

반면에 남자들은 본래부터 속이 넓은 사람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활동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생각도 많이 하고 여러 경험을 하기에 그렇게 변한 것입니다.

남자는 큰 경험을 갖고 있고 여러분들은 작은 경험을 갖고 있는데 자기 경험의 세계 안에서 얘기를 하니,

여러분들이 죽자고 얘기해봐야 바가지 긁는다, 잔소리한다,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한다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내가 어리석고 싶어 어리석은 게 아니고, 내가 경험한 것이 그뿐이어서 그런 것인데 말이지요.

출가한 스님들도 자기 경험 속에 빠지게 되면, 산중에서 고기도 못 먹고 나물 먹는 주제에 무슨 나물이 더 좋다고 다투게 될 수도 있고,

별 값어치도 없는 무명옷 갖고 좋은 것 나쁜 것 따질 수도 있고, 벼슬이랄 것도 없는 중벼슬 갖고 다투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경험한 것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빠져 그 잣대로 바라보면 더 넓은 세계를 보지 못하고 세계의 큰 흐름을 보지 못합니다.

율곡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할 때 조정에서는 네 파니 내 파니 거기만 바라보고 있으니

일본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도 모르고, 그런 눈으로 일본에 가서 보니 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다툼에서 빠져 나온 사람이라야 넓은 세계가 보이게 됩니다.

 

보리반야의 지혜는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지만 다만 마음이 미혹하여 스스로 깨닫지 못할 따름이니,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가르침과 인도함을 빌어서 견성하여야 합니다.

선지식이 뭘 주는 게 아닙니다, ‘너는 너만의 경험 세계에 빠져있다고 알려줄 뿐입니다.

이 때 내가 여기에 빠져있었구나하고 자각하게 되면 깨달음의 문이 열리지만,

네가 뭘 안다고 그러냐고 고집하게 되면 세세생생이 흘러도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그 얘기를 귀담아 듣게 되면 안목이 금방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알라. 어리석은 자와 지혜 있는 사람이 불성에는 본래로 차별이 없는 것이요, 다만 미혹함과 깨친 것이 다를 뿐이다.

불성이라 하니 가슴속에 다이아몬드 같은 구슬이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지 마세요,

깨어있는 사람이나 자는 사람이나 사람으로서 갖고 있는 성질이나 성품은 다 같습니다,

자고 있는 사람도 깨서 눈 뜨면 눈 뜬 사람과 똑같이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고 있고 한 사람은 깨어있을 뿐, 두 사람이 본래부터 다른 사람은 아닙니다,

자고 있고 깨어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본래로 같은 사람입니다,

잠자는 사람도 깨면 깨어있는 사람과 똑 같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까닭에 어리석음도 있고 슬기로움도 있는 것이다.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자고 있는 사람과 깨어있는 사람은 많이 다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온갖 걸 다 할 수 있지만 잠자고 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못 합니다.

 

내 이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여 너희들로 하여금 각기 지혜를 얻게 하리니 지극한 마음으로 자세히 들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설하리라.

선지식아, 세상 사람이 입으로는 종일 반야를 외나 자성 반야를 알지 못하니

마치 말로만 음식 이야기를 아무리 하여도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아서

다만 입으로만 공()을 말한다면 만겁을 지내더라도 견성하지 못하리니 마침내 아무 이익이 없느니라.

입으로만 마하반야바라밀을 왼다고 해서 소득이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종일토록 음식을 말하면서 한 점 먹어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18공이니 팔불중도설이니 아무리 얘기 해봐야, 제법이 공한 줄 꿰뚫어 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선지식아, 마하반야바라밀이라는 말은 이것이 범어이니 여기 말로는 큰 지혜로 피안(彼岸)에 이르렀다는 말이니라.

이는 모름지기 마음에서 행하는 것이요, 입으로 외는데 있는 것이 아니니,

입으로 외우더라도 마음에서 행하지 않는다면 꼭두각시와 같고 헛깨비와도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아서 실이 없으나

입으로 외고 마음으로 행한다면 곧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할 것이니라.

본성품 이것이 불이니 성품을 떠나서는 따로 부처가 없느니라.

부처가 마음 밖에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우리들의 존재, 참모습 그것이 바로 부처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의 참모습에 깨어있지 못하고, 늘 꿈꾸듯이 자기 생각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

 

다음에 어떤 것을 마하(摩訶)라고 하는가?

<마하>는 크다는 말이니 심량(心量)이 광대하여 마치 허공과도 같아서 가이 없으며

또한 모나거나 둥글거나 크고 작은 것이 없으며 청···백 등 빛깔도 아니며

위아래도 길고 짧음도 없으며 성날 것도 기쁠 것도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으며,

착한 것도 악한 것도 없으며, 머리도 꼬리도 없으니 제불의 국토도 또한 이와 같이 다 허공과 같느니라.

마음이란 모양이 없는 것이다, 네모도 세모도 아니고 붉은 빛깔도 푸른 빛깔도 아니고, 악한 것도 선한 것도 아니다,

한 생각 읽히면 악한 생각을 내고 한 생각을 읽혀서 선한 생각을 낼 뿐, 마음 자체는 공하기에 허공과 같은 것이다.

 

세간 사람의 묘한 성품도 본래 공하여 가이 한 법도 얻을 수 없으니 자성이 참으로 공함이 또한 다시 이와 같느니라.

여기서 성품은 우리들의 마음의 본질(근본)을 말하고, 자성은 나의 참모습을 말합니다.

나의 참모습은 뭔가 있는 것 같지만 알고 보니 텅 비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성품도 본래 공하여 한 법도 얻을 수 없으니 자성이 공함이 또한 이와 같다,

나의 참모습과 성품도, 마음도 몸도 제법도, 부처님의 말씀까지도 다 공한 거다,

거기에는 어떤 상도 지어서는 안 되는데, 상을 지어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거기 집착해서 헤매고 있다,

아니면 마음에 '공이라는 상'을 지어놓고, 입으로만 공이다 떠들고 다닌다.

 

선지식아, 내가 지금 공을 설하는 것을 듣고 공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라.

무엇보다 첫째로 공을 집착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만약 마음을 비워 고요히 앉는다면 곧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리라.

제법이 공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공이라는 상을 짓거나 그 상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정진할 때 보통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앉아라하는데, 거기에 집착하다 보면 무기공에 떨어질 수 있다,

왜냐, ‘마음을 비운다하면 비우는 자가 있고 비울 마음이 있고 비울 대상이 있게 된다,

즉 주와 객이 나눠지게 된다,

또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마음에 뭐가 있어 그것을 몰아내는 것이 될 수도 있기에,

마음을 텅 비우고 자세를 바르게 하고 고요히 앉아라하면 이 자체가 망념이 될 수 있다.

 

선지식아, 세계 허공이 능히 만물과 색상(色像)을 갈무리하고 있어

일월성숙(日月星宿)과 산하대지와 샘이나 물골이나 또한 개울이나 초록 총림과

악인·선인·악법·선법·천당·지옥이며 일체 대해와 수미(須彌) 제산이 다 허공 가운데 있는 것과 같이

세인의 성품이 공한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공하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다, 공한데서 천하만물이 다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이라는 속에 온갖 것들이 들어 있다가 밖으로 드러난다는 것이 아니다,

서울 가는 길은 공하여 어느 방향이라 말할 수 없지만, 사람의 인연에 따라서 천 가지 만 가지로 일어나는 것과 같다.

 

선지식아. 자성이 능히 만법을 머금고 있는 것이 이것이 큰 것이니, 만법이 모든 사람의 성품 중에 있느니라.

크다 하는데 어떤 것이 정말 큰 것이냐,

우주가 아무리 크다 해도 더 큰 것에 비하면 작은 것이지만, 마음은 공하여 텅 비었기에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자성은 만법을 머금고 있고 만법은 사람 마음 가운데 있다, 다 사람 마음에서 나온 거지 존재에 있는 게 아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하는 일에 선이나 악을 볼 때 모두들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또한 물들거나 집착하지도 아니하여

마음이 마치 저 허공과 같은 것을 이름하여 크다 하는 것이니 이 까닭에 <마하>라 하느니라.

선악이 본래 없는 줄 알면 선을 취하지도 악을 버리지도 아니하고, 거기에 물들지도 집착하지도 아니한다,

또 마음은 허공과 같고 거울과 같아서, 물건이 오면 비추지만 지나가면 아무런 형상이 없다,

즉 상을 그리지 않으면 거기에 집착하지도 아니하니,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크다 할 것이다.

 

선지식아,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만 말하고 지혜있는 사람은 마음으로 행하느니라.

또한 미혹한 사람이 있어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앉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스스로 큰 것이라고 일컫는다면

이러한 무리와는 더불어 말조차 하지말라. 지견(知見)이 삿되기 때문이니라.

고요히 앉아 마음을 비우고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는 것은 수행이 아니라 사도를 행하는 거다,

마음이란 텅 빈자리이기에 본래 비울 것이 없는 것이다,

고요히 앉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는 애씀이 있기에 이건 이미 유위의 행이 된다,

마음이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을 고요하다 하는 것이지, 자리에 앉고 서고 눕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이후는 제8강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