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강에서 계속)
별가는 말하였다,
“당신은 다만 게송이나 외우시오. 내가 당신을 위하여 쓰리다.
당신이 만약 법을 얻으면 먼저 나를 제도하여 주시오. 이 말을 잊지 마시오” 한다.
별가가 이 말을 듣고 뜨끔해가지고 써주겠다 했는데, 사람 마음이란 참 묘합니다,
무시하다가도 이런 소리를 들으면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내가 게송을 읊었다.
“보리에 나무 없고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거울 또한 거울이 아니다.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본래 한 물건 없거니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
어느 곳에 티끌 일어나랴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
보리에 나무 없고 거울 또한 거울이 아니다, 깨달음의 지혜에는 실체가 없고 마음 또한 마음이라 할 것이 없다,
본래 한 물건 없거니 어느 곳에 티끌 일어나랴, 본래 그 어디에도 실체가 없는데 어디에 때 끼고 먼지가 앉으랴.
탁 트인 소리입니다.
보리에 나무라 할 것 없고 거울에 거울이랄 것이 없다, 즉 제법이 공하다 이 말이지요,
제법이 공한 것을 이름하여 청정하다고 합니다,
깨끗해서 청정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텅 빈 자리를 청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본래로부터 텅 비었으니, 어떻게 먼지가 앉고 때가 끼겠느냐,
돈황본 육조단경에 보면 다른 게송이 있습니다.
신수대사는 신시 보리수 심여 명경대, 몸이 곧 보리수요, 마음이 거울과 같다고 했는데,
혜능대사는 심시 보리수 신여 명경대, 마음이 보리수요 몸이 명경대라고 딱 뒤집어 놨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몸을 보리수라 하고 마음을 거울이라 해야 맞을 것 같은데 왜 뒤집었을까?
몸이란 것은 본래로 공한 것입니다.
몸이란 본래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어리석은 것도 깨닫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몸이야 말로 거울과 같고 거울은 본래로부터 청정한 것이니, 몸이란 본래로부터 청정한 것이다,
제법이 본래 공하고 제법은 본래 청정한 것인데,
어리석은 마음으로 보면 갖가지 때가 묻은 사바세계가 되고 제대로 보면 청정불국토가 되는 것이다,
이 게송을 쓰고 나니 대중이 다 놀라 혹은 감탄하고, 혹은 의아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서로 말하기를 “기이하다. 겉모양만으로 사람을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어찌 우리가 오랫동안 저런 육신보살을 부렸던가!” 하였다.
조사께서 모든 대중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는 것을 보시고 사람들이 해칠까 염려하시어
그 게송을 신으로 문질러 지워버리며 “이것도 또한 견성 못했다” 하시니 비로소 대중이 의심을 놓았다.
눈이 똥그래져 ‘이게 무슨 소린가’ 하다가 오조대사께서 ‘이것도 아무 것도 아니야’ 이러고 지워버리니까 ‘그러면 그렇지’ 하고 다 흩어져버렸다,
눈 어두운 사람은 이렇게 늘 형상에 집착을 합니다.
세상에 유명해지거나 사람이 구름떼처럼 몰리면 굉장한 것처럼 난리법석을 피우다가,
언론에서 형편없는 놈이다 하면 그놈 죽일 놈이구나, 이게 상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세상이 떠받들 때도 그 다른 모습을 봐야 하고, 세상이 짓밟을 때도 그의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조금 다른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제가 70년대 청소년 불교운동 할 때에 불교에 대해 엄청나게 불만이 많았습니다.
불교는 이런 것이 나쁘다, 다 때려 부숴야 돼, 개혁해야 돼, 혈기왕성하게 생각했었지요.
그러다 80년에 10·27법난이 있고 불교가 망신창이가 되고 세상의 웃음거리가 됐는데,
그 이듬해인 81년 미국 여행을 하는 중에 LA의 어떤 절에 하룻밤 묵으러 갔습니다.
갔더니 웬 노스님이 계시는데 자기도 객이라는 겁니다.
객끼리 모여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기 전 제가 또 노스님께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불교를 다 때려 부숴 버려야 된다, 스님들이 뭐하느냐, 어떻게 하면 개혁할 수 있겠느냐,
나 혼자 두어 시간쯤 떠들었어요, 그랬더니 스님이 다 들으시고 하시는 말씀이,
“여보게 어떤 사람이 논두렁 밑에 가만히 앉아서 그 마음을 청정히 하고 고요히 있으면 그 사람이 중이네, 그게 불교야”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 한 마디 속에서 저는 모든 해답을 찾았습니다.
그동안 저는 형상에 집착해서 불교 아닌 것을 불교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흥분해서 난리법석을 피우고 불교를 떠나버릴까 말까 이런 생각을 하고 지냈던 것입니다.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요 마음이 고요하면 법이요 마음이 청정하면 승이다 하는 본래 가르침은 외면하고,
기와집이 불교인줄 알고 머리 깎은 스님만 스님인줄 알고 그런 형상 형태가 불교인줄 알고,
불교가 타락했느니 망했느니 흥했느니 난리를 피우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온갖 궁리를 했는데,
그 한 말씀에서 제 정신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그분이 누구인줄도 몰랐지만, 그 인연으로 나중에 가까이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우리가 지금 모시고 있는 서암 큰스님입니다.
본래 청정한 줄을 알면, 즉 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사실은 놀랄 일도 없지만,
우리는 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우왕좌왕 하게 된다.
다음날 오조께서 가만히 방앗간에 이르러 내가 등에 돌을 지고 방아찧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도를 구하는 사람은 법을 위하여 몸을 잊는 것이 마땅히 이와 같이 할진저!” 하시며 물으시기를 “방아는 다 찧었느냐?” 하신다.
내가 말씀드렸다, “예, 방아는 벌써 다 찧었습니다마는 아직 체질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방아는 다 찧었는데 아직 겨와 알맹이를 분리하지 못했다,
이미 자기 성품을 보기는 봤는데 스승으로부터 인가는 못 받았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 때에 오조께서 지팡이로 방아를 세 번 치시고 나가셨다.
나는 곧 조사의 뜻을 알고 3경에 당에 들어가니 오조께서 가사로 둘레를 가려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시고 <금강경>을 설하여 주셨는데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하는 데 이르러 내가 언하에 대오(大悟)하니 일체 만법이 자성을 여의치 않았더라.
왜 가사로 문을 가렸느냐, 이 당시는 아주 혼란한 시대였습니다,
홀로 조사당에 들어가 법을 얻었다 하면 목숨이 위태로웠던 그런 시대였기에 그랬을겁니다.
‘자성’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는 ‘나의 참모습’으로 해석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드디어 오조께 말씀드리기를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함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하지 않는 것임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구족함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동요가 없음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능히 만법을 냄을 알았겠습니까?” 하였다.
내 참모습은 본래 스스로 청정하고, 내 참모습은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구하는 바가 있으니 부족한 것이지 구할 바가 없는 줄 알면 천하가 다 갖춰져 있다,
내가 분별을 하니까 오고 가는 것이 있지, 분별을 떠나면 올 것도 없고 갈 것도 없다,
나의 참 모습 나의 참마음 나의 참 성품이 능히 만법을 낸다,
조께서 내가 본성을 깨쳤음을 아시고 곧 장부(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이라 말씀하셨다.
오조께서 ‘깨달은 네가 곧 부처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십대 명호는 여래·은공·정변지·명행족·선서·세간해·무상사·조어장부·천인사·불세존인데,
여기서는 맨 끝의 세 개를 언급했습니다.
이때가 3경인데 법을 받으니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는 돈교(頓敎)와 의발(衣鉢)을 전하시면서 이르시기를
“이제 너를 제6대조로 삼으니 스스로 잘 호렴하고 널리 중생을 제도하여 긴 미래로 유포케 하여 끊임이 없게 하라.
이 당시 선불교는 탄압에서 벗어나 황제가 시호를 내릴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었고,
홍인대사는 제자가 천여 명이나 되는 큰 절의 방장스님이고 조실스님이었습니다.
이렇게 큰 절의 조사 자리를 오래 공부한 승려가 아니라 불 때고 나무하던 부엌떼기한테 인가한다,
아무리 파격을 인정하는 선불교라 해도 다른 제자들이 인정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내 게송을 들어라
유정(有情)이 와서 종자를 심으니 / 인지(因地)에서 도리어 결과가 생긴다.
무정(無情)은 이미 종자 없으니 / 성품도 없고 남(生)도 없느니” 하였다.
한 생각 일으켜 종자를 심으면 반드시 과보가 따르고,
얻으려는 생각이 없으면 종자마저 없는 것과 같아 심어도 나는 게 없고 사라짐도 없다.
오조 다시 말씀하시기를
“저 옛날 달마대사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사람들이 아직 믿음이 없었으므로
이 가사를 전하여서 이로써 믿음의 체로 삼아서 대대로 서로 이어 왔거니와
법인 즉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여 누구나 스스로 깨치고 스스로 알게 함이니
예로부터 부처님과 부처님이 오직 이 본체를 전하였고 조사와 조사가 서로 은밀히 붙인 것이 바로 이 본심이니라.
법의는 이것이 다툼의 실마리가 될 터이니 너에게서 그치고 뒤로 전하지 마라.
만약 이 옷을 전한다면 목숨이 실낱에 매달린 것과 같게 되리라.
너는 어서 빨리 떠나거라. 사람들이 너를 해칠까 두렵다”하신다.
초기 선종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하는 징표로 가사와 발우를 전해주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에도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선불교에서 옷과 밥그릇으로 법의 징표를 삼는다?
이것은 혜가대사도 달마대사께 문제제기를 했었던 것입니다.
이심전심 불립문자인데 무슨 징표가 따로 필요하냐고 물으니,
아직 혼란한 시기이고 법의 체계가 잡히지 않았으니 가사와 발우로써 법을 전하는 징표로 삼는다,
그러나 나중에 자리가 잡히거든 이것은 전하지 않아도 좋다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가사와 발우를 전한 뜻이 뭘까요?
발우란 걸식할 때 음식을 얻는 깡통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걸식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라,
또 부처님께서는 분소의, 시체를 싸서 버린 옷을 입고 사셨다하는 것도 잊지 마라,
이런 의미로 헌 옷과 헌 발우를 제자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선불교가 권위를 가지기 전까지 이것은 뺏고 빼앗기는 물건이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조사자리가 사회적 권위를 나타내고, 이 물건이 있어야 조사임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되자,
이제는 법의 징표가 아니라 세속 투쟁의 도구로 변했습니다.
이것이 탐하는 대상이 되었으니 이걸 가진 사람은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
그러니 너의 대에서 끝내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제6강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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