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7. 육조단경

[법륜스님의 '육조단경'] 제4강 법을 깨닫고 법의를 받다 1

상원통사 2019. 11. 29. 10:00

오늘은 육조단경 두 번째 강의시간이 되겠습니다.

 

오조당 앞에 복도 3칸이 있었는데 그 때 공봉(供奉) 노진(盧珍)에게

능가경(楞伽經) 변상(變相)과 오조혈맥도(五祖血脈圖)를 그리게 하여 전해 내려가며 공양케 하도록 하려 하였다.

공봉이란 기술자나 화가들에게 주는 하위직 벼슬이름, ‘노진은 화가의 이름이고,

능가경 변상이란 부처님께서 능가경을 설하는 장면,

오조혈맥도란 부처님의 법이 전해 내려온 법맥을 그린 그림입니다.

화가 노진에게 부처님께서 능가경을 설하는 장면과 오조혈맥도를 그리게 하였다.

 

신수는 게송을 지어 가지고 화상께 바치려고 여러 차례 당 앞에까지 갔었으나

심중이 황홀하고 온몸에 땀이 흘러 바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이러기를 전후 4일 열세 차례를 오고 갔으나 마침내 게송을 바치지 못하였다.

신수는 이윽고 생각하기를

이럴 것이 아니고 복도 벽에 게송을 붙여 두면 화상께서 지나시다가 보시게 될 것이니

  만약 화상께서 좋다고 허락하신다면 곧 나가 예배드리고 내가 지었음을 말씀 드리기로 하자.

  만약 마땅하지 않다고 하신다면 나는 부질없이 수 년을 산중에 처박혀서 남의 예배만 받고 다시 무슨 도를 닦았다 하랴하였다.

그날 밤 3경에 아무도 모르는 틈을 타 스스로 등을 들고 복도 남쪽 벽에 자기 소견을 썼다.

게송에 이르기를

몸은 보리수요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 

 마음은 맑은 거울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時時勤佛拭(시시근불식)

 때묻지 않도록 하라     勿使惹塵埃(물사야진애)”

(신수대사)가 게송을 써 놓고 곧 당에 돌아오니 아무도 몰랐다.

수 다시 생각하기를

날이 밝아서 오조께서 게송을 보시고 기뻐하시면 법과 내가 인연이 있거니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스스로 내가 미혹하여 숙세 업장이 무거워 법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참으로 성인의 뜻을 짐작 할 수 없구나.”

하며 방에서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불안하게 앉았다 누웠다 하는 동안에 시각은 5경이 되었다.

확연하게 깨달으면 이런 마음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남의 존경을 받고 남을 가르치는 정도에 이른 사람의 심리상태로 볼 수 있지만,

여기서 또 한 가지 다른 각도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수대사가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혜능대사께서 신수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했다는 것은, 이것이 사실이라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아마 이것은 후세의 제자들이 신수의 부족함과 혜능대사의 높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썼거나,

남종선은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지만 북종선은 수준이 낮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이렇게 썼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 대승불교가 흥기할 때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기성불교에서는 대승불교를 비불설(非佛說,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이라고 했고,

대승불교에서는 기성불교를 소승이다, 중생을 이익케하지 못한다, 좁은 소견이다 등등,

부처님의 말씀으로 볼 수 없는 비난과 비하의 표현들이 경전 여기저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법화경에 보면 부처님의 법문을 잘못 알아듣고 스님들 500명이 자리를 떠버리자,

부처님은 이제 알맹이만 남았고 쭉정이는 다 가버렸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아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인격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표현입니다.

당시는 대승은 부처님이 지지하고 있고 소승은 속 좁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랬겠지만,

지금 우리의 눈으로 돌아보면 그런 표현은 없는 게 훨씬 더 품위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혜능대사 당시 시대적 조건에서는 이런 기록들이 의미가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 보면 오히려 육조 혜능의 법의 정도를 흠집을 내는 결과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그 어려움에만 사로잡히면 안됩니다,

세월이 흐른 뒤 후세의 눈 밝은 이는 이런 흠을 금방 보게 됩니다.

신수대사께서 이런 글을 쓰셨는데, 아직 마음의 문이 열리지 못한 것 같아 나는 이런 게송을 썼다’,

구차한 설명 없이 이렇게만 말해도 눈 밝은 이는 다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잘한다고 했지만 지금 보면 오히려 흠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맑은 거울이니,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때 묻지 않도록 하라’,

우리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불교관에서 보면 하나도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우리들의 마음은 맑은 구슬과 같고 거울과 같은 거다,

이것이 육진경계에 부딪혀 때가 묻고 먼지가 끼어서 중생노릇을 하고 있으니

부지런히 털고 마음을 닦으면 자기 본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다,

또는 자기 몸이나 생각이나 마음에 대해 집착했는데 알고 보니 이 몸이 참나가 아니요 나의 것도 아니다,

이 마음 또한 참으로 영원하다 할 수 없고, 나라 할 수도 없고, 나의 것이라 할 수도 없다,

즉 이것은 가짜이고 이제까지 나는 가짜에 홀려서 살았다,

그럼 진짜는 뭘까, 영롱한 본래 부처, 청정한 진아가 나에게 있으니 그걸 찾아야 된다,

대부분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게송은 아무런 흠집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제법무아의 차원, ‘제법이 공하다는 차원에서 보거나,

그 어떤 상도 지어서는 안 된다하는 제상이 비상인줄을 아는 그런 경지에서 보면, 이 게송은 아직은 꿈속의 얘기가 됩니다.

 

먼지를 털고 때를 닦는다 할 때엔 이미 주와 객이 나눠져버립니다.

먼지를 털고 때를 닦는 나라고 하는 주체가 있고, 닦아 내야할 대상인 먼지가 있다,

이것은 불교의 근본사상이나 대승의 근본사상에서 볼 때 한 발짝 벗어난 것입니다.

, 이 게송으로 보면 신수대사의 안목은 확연하게 열렸다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이 있고 악이 있고 깨끗한 것이 있고 더러운 것이 있는데,

악한 짓을 그만두고 선한 행위를 하고, 더러운 것을 버리고 깨끗한 것을 추구해서,

선의 과보를 받고 그래서 청정한 몸이 되라 하는 이런 가르침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수행을 한다면 삼악도에 떨어지진 않고 삼선도에 태어날 수가 있고,

세상에서 존경받는 그런 사람이 되는 길은 틀림없지만, 참해탈의 길은 될 수가 없습니다.

 

오조는 수(신수)가 아직 자성을 보지 못하여 문 안에 들지 못한 것을 아셨다.

날이 밝자 낭하 벽에 그림을 그리게 하시려고 노봉공을 불러 오게 하고 남쪽 낭하에 이르시니

문득 수의 게송을 발견하시고 봉공에게 말씀하셨다.

그림을 그릴 것 없다. 먼 길을 오게 하여 너만 수고롭게 하였구나.

  경에 이르기를 <모든 상()이란 다 이것이 허망한 것이다> 하셨으니,

  다만 여기 이 게송만 남겨 두어 사람들로 하여금 외고 받아 지니게 하리라.

  이 게송에 의지하여 닦으면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큰 이익이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란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목표고 큰 이익을 얻는 것이 목표니까

이런 말씀을 들으면 큰 공덕이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니 그대로 두어라.

 

하시고 문인들로 하여금 게송 앞에서 향을 피워 예경케 하고

이 게송을 모두 외면 견성할 수 있으리라하시니 문인들이 모두가 이 게송을 외면서 참으로 훌륭하다하며 찬탄하였다.

그날 3경에 조사께서 수를 불러 당에 들게 하시고 물었다 저 게송은 네가 지었느냐?”

수가 대답하였다

, 수가 지었습니다.

  이것은 수가 감히 조사 자리를 망령스리 구하는 것이 아니오니 바라옵건대 화상께서는 자비로 살펴주십시오.

  제자가 자그마한 지혜라도 있습니까?”

조사 말씀하셨다

네가 지은 이 게송으로는 아직 너는 본성을 알지 못하였다.

  다만 문 밖에 이르렀을 따름이요, 아직 문 안에는 들지 못하였다 할 것이니

  이런 견해로 무상보리(無上보리)를 찾는다면 마침내 얻지 못할 것이다.

  무상보리는 모름지기 언하에 자기 본심을 알고 자기 본성을 보아야 하느니라.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아니하여, 어느 때나 생각 생각이 만법에 막힘이 없음을 스스로 보고

  하나가 참됨에 일체가 참되어 일체 경계가 스스로 여여(如如)하니, 이 여여한 마음이 즉시 진실이니라.

  만약 이와 같이 볼진댄 곧 무상보리인 자성이라 할 것이니 너 다시 가서 하루 이틀 생각하여 다시 게송을 지어서 나에게 가져 오너라.

  너의 게송이 만약 문에 들어온 것이라면 너에게 의법(依法)을 붙이리라

혜오(慧悟), 아는 지혜는 열렸지만, 돈오(頓悟), 단박에 깨닫는 돈오의 문안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홍인대사는 이렇게 판단하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신수가 예배하고 물러나와 수일이 지나도 게송을 짓지 못하니

심중이 혼란하고 심사가 불안하여 마치 꿈속과도 같으니 서나 앉으나 편하지 않았다.

신수가 정말 이랬을 수도 있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훌륭하나 정작 본인의 마음속에 얻을 것이 있으면 이렇게 됩니다.

이렇게 헐떡거리는 자기 마음을 보면서 내가 왜 이럴까, 내가 조사자리를 넘보고 있구나,

그것은 깨달아서 얻을 자리이지 얻으려 해서 얻어지는 자리가 아니다,

이렇게 스스로 살필 줄 알면 금방 사라지겠지만, 신수대사는 아직 자신을 아직 못 봤다 이런 얘기가 됩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육조 법어록에 이런 것을 싣는 자체가 올바르지 않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시 2일이 지나 한 동자가 방앗간을 지나면서 그 게송을 외는 것을 내가 한 번 듣고 이 게송은 아직 본성을 보지 못한 것임을 알았다.

나는 비록 아직 조사의 가르침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벌써 대의는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동자에게 물었다 외고 있는 것이 무슨 게송입니까?”

동자가 말하였다

이 오랑캐가 그것도 모르는구나. 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이 생사일이 크다. 의법을 전하고자 하니 문인들은 게송을 지어오라.

    만약 큰 뜻을 깨쳤으면 곧 의법을 부쳐 제6조를 삼으리라> 하셨는데

  신수상좌가 남쪽 복도 벽위에 무상게를 써놓으니 대사께서 문인에게 모두들 이 게송을 외우게 하시고

  이 게송에 의지하여 닦으면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셨느니라한다.

동자승이 오랑캐가 그것도 모르는구나라고 말하는 걸 보면

혜능은 스님들뿐만이 아니라 동자승들에게 마저도 천한 나무꾼 출신의 불목하니로 여겨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나도 그 게송을 외워 내생 인연을 맺어 함께 불국토에 나고자 합니다.

  스님이여, 나는 이 방아를 딛고 있은 지가 8개월이 넘는데 아직 조사당전에 가보지 못하였사오니

  바라건대 스님은 나를 그 게송 있는 곳으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나도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하였다.

동자가 나를 게송 앞으로 인도하여 예배하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저는 문자를 알지 못하오니 어렵지만 스님께서 읽어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혜능이 예배드리겠다니까 동자승이 안내를 해줍니다.

 

그 때에 강주(江州) 별가(別鴐)가 와있었는데, 성은 장(), 이름은 일용(日用)이라 하였다.

곧 큰 목소리로 읽었다.

내가 다 듣고 나서 말하기를 나도 또한 게송을 짓겠으니 바라건데 별가는 써주십시오하였다.

별가 말이 이 오랑캐야! 네가 게송을 짓다니! 이 일이 또한 희한하구나한다.

강주란 행정지역 이름이고, 별가는 자사 다음 자리, 부지사나 국장 같은 지위입니다.

동자승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신도에게까지 무시를 당합니다.

니가 절에 왔으면 나무나 하고 예배나 할 일이지 무슨 게송을 짓겠다고 그러냐,

 

내가 별가에게 말하였다

무상보리를 배우고자 할진댄 초학자를 업수이 여기진 말아야 하오.

  하하인(下下人, 낮고 낮은 사람)에게도 상상지(上上智, 높고 높은 지혜)가 있고

  상상인(上上人, 높고 높은 사람)에게도 하하지(下下智, 낮고 낮은 지혜)가 있는 법이오.

  만약 사람을 업신여기면 곧 한량없고 가없는 죄가 되는 줄 아시오.”

불법에서는 두 가지를 늘 경계하는데, 물러서는 마음과 교만한 마음입니다.

물러서는 마음, 저는 모르는데요, 저는 늙었어요, 제가 어찌 그걸 압니까,

이렇게 해보지도 않고 뒷걸음질 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절대로 깨닫기 어렵습니다.

또 다 안다는 사람, 그거 알아, 옛날에 내가 다 해봤어, 이렇게 교만한 사람,

이 두 사람은 바로 들으려고 하지 않고 바로 보려고도 하지 않기에,

하늘에서 비가 오는데 바가지를 거꾸로 든 사람과 같습니다.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바가지를 거꾸로 쥐고 있으면 물이 한 방울도 고이지 않는 것입니다.

 

 

(제5강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