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강에서 계속)
내가 이 말을 듣고 나니 나와 손은 숙세의 인연이 있는 듯 했다.
손은 나에게 은 열 냥을 주어 노모님의 옷과 양식에 충당케 하고, 곧 황매에 가서 오조께 예배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어머님을 편히 모시게 하고 곧 하직하여 30여 일이 채 못 되어 황매에 다다랐다.
5조께 예배하니 5조가 나에게 묻기를 “너는 어느 곳 사람이며 무엇을 구하고자 하느냐?” 하신다.
내가 대답하였다 “제자는 영남 신주에 사는 백성이온데 멀리서 와 스님께 예배드리게 됨은 오직 부처되기를 구할 뿐 다른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조께서 “너는 영남 사람이요, 또는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하신다.
중국은 자기들 외에 동쪽 서쪽 남쪽 북쪽 변방에 사는 사람들을 다 오랑캐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양자강 이남의 저 아래쪽에서 온 촌놈이다 이 말입니다.
내가 대답하기를
“사람에게는 비록 남북이 있다 하지만 불성에는 본래 남북이 없사오며
오랑캐 몸과 화상(和尙)의 몸이 같지 않지만 불성은 무슨 차별이 있사오리까?”하였다.
이런 말을 외워서 하기는 쉬울지 몰라도 스승을 만나자 마자 즉답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때에 오조께서 다시 말씀하고자 하시다가 대중이 모두 좌우에 있음을 보시고
이내 대중을 따라 일이나 하라고 하시기에 내가 말씀 드리기를
“혜능이 화상께 아룁니다.
제자가 아옵기로 자기 마음이 항상 지혜를 내어서 자성(自性)을 여의지 않는 것이 곧 복전(福田)이라 아옵는데
화상께서는 다시 어떠한 일을 하라 하시옵니까?”하였다.
‘이놈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저기 가서 일이나 해라, 복이나 지어라’ 라고 하시니,
‘마음 깨치는 것이 가장 큰 복전인데 이 것 말고 무슨 따로 복을 지으라 하십니까’ 라고 답합니다.
오조 말씀하셨다 “저 오랑캐 근성이 너무 날카롭구나! 다시 더 말 말고 방앗간에 가 있거라.”
내가 오조 앞에서 물러나와 후원에 이르니 한 행자가 와서 나무를 하고 방아를 찧는 일을 시키더라.
그로부터 여덟 달 남짓 지났더니 하루는 오조께서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스승께서 ‘촌놈이 말이 많다, 부엌에 가서 일이나 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절에는 나무 하고 방아 찧고 밥하고 빨래하고 이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절에 가면 바로 스님이 되는 게 아니고 이런 일부터 먼저 시킵니다,
몇 달간 또는 몇 년간 일을 시켜 보고 쓸 만하면 그 다음에 출가를 시킵니다.
이때에 보통 행자라 부르는 데, 머리를 깎고 일 시킬 때도 있고 머리를 기른 상태로 일을 시킬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8개월이나 아무 소리 안하고 방아만 묵묵히 찧고 있었습니다.
“내 너의 견해가 쓸만하다고 생각하나 다만 악한 사람들이 너를 해칠까 염려되어
마침내 너와 더불어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 것을 네가 아느냐?”하신다.
내가 말씀 드렸다 “제자도 또한 스님의 뜻을 짐작하고 감히 당전에 가지 않음으로서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하고 있사옵니다.”
‘내 뜻을 아느냐’ 하니까, ‘저도 짐작한 바가 있어 그 쪽은 발걸음도 하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당시엔 어땠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오늘날 보면 이런 분위기가 되고도 남습니다.
동국대를 나오고 본사 주지를 하고 총무원장도 하고 이런 경력을 갖고 있는 제자가 있는데,
스물 몇 살밖에 안 되고 아직 승려도 아니고 부목으로 와있는 사람한테 스승이 관심을 갖는다,
이러면 쫒겨나기 십상이지요, 아마 두들겨 맞아 죽을 수도 있을 겁니다.
오조가 하루는 모든 문인들을 다 모이게 하고 말씀하셨다.
“내 너희들에게 말한다.
세간 사람은 생사일이 가장 큰 것인데 너희들은 종일토록 다만 복전만 구하고 생사고해에서 벗어날 생각은 없구나!
만약 자성이 미혹하였다면 복을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벗어날 수가 있으랴.
너희들은 이제 가서 스스로의 지혜를 살펴서 자기 본심인 반야의 성품을 가지고 각자 게송 하나씩을 지어 나에게 가져 오너라.
만약 큰 뜻을 깨친 사람이 있으면 법과 법의를 전하여 제6대조로 삼으리라.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거행하라. 생각으로 헤아리면 곧 맞지 않느니라.
견성(見性)한 사람은 모름지기 언하(言下)에 곧 보는 것이니 만약 이와 같은 자는 칼을 휘두르며 싸우는 데서도 또한 볼 수 있느니라.”
‘자기를 살펴 깨닫는 데는 관심이 없고 그저 글자 읽히고 승려 때 묻히기에 바쁘면 그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니 모름지기 자기 깨달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가져 오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생각을 일으켜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일으켜 진리란 무엇일까 하면 이건 이미 망상에 속합니다.
길게 생각할 필요 없이, 말 떨어지자마자 그냥 자기가 아는 대로 써서 바치면 됩니다.
깨쳤는지 못 깨쳤는지 판단은 스승이 알아서 할 겁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까 하는 생각을 일으키면, 이건 법을 깨치는 게 아니라 조사 자리를 탐하는 겁니다.
확연히 깨달았다면 칼을 들고 싸우는 중에도 나올 수 있습니다,
비록 전쟁터일지라도 ‘저 싸우기 때문에 바빠서 그것을 쓸 여유가 없습니다’ 이런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주먹을 내미는 순간에 바로 나온다, 그러니 사량분별을 일으키지 말고 아는 대로 기술해서 가져오너라.
‘그러면 법과 법의를 전하리라’ 이랬는데, 마음과 마음이 법을 전하는데 무슨 징표가 있겠어요, 이것 자체도 형식에 맞지가 않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을 전수하는 것도 반대하는 것이 ‘선’인데, 무슨 옷 따위를 전수하고 그러느냐, 이치에 좀 안 맞는 얘기입니다.
혜가대사께서 달마대사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이런 옷 따위를 전하는 거냐?’, 그랬더니
‘선의 정통이 자리를 잡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직은 상징적인 것이 필요하다,
우선은 인도에서 가져온 이 가사로 법을 계승했다는 징표로 삼겠지만,
후대에 가서 선불교가 자리를 잡게 되면 이런 것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랬습니다.
법의란 다 떨어진 옷이고 발우란 얻어먹는 동냥그릇에 불과하지만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승려란 늘 얻어먹는다는 것을 잊지 말고 또 분소의 입고 사는 것을 잊지 마라,
중생에게 군림하지 말고 검소하게 살고 하심하고 교만을 부려서도 안 된다,
부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한다.
대중이 처분을 받고 물러나와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 무리는 구태여 힘들여 마음을 맗히고 게송을 지을 것 없다.
설사 게송을 지어 화상께 바친들 무슨 이익이 있으랴.
신수(神秀) 상좌는 현재 교수사(敎授師)로 계시니 필시 저분이 법을 얻으실 것인데
우리들이 게송을 짓는다고 해도 부질없이 힘만 들이게 된다.”하였다.
당시 신수상좌는 나이도 많으셨어요, 홍인대사와 나이차이가 별로 없었습니다.
또 바깥에 있을 때 요즘 말하면 석·박사까지 다 마치신 분이고,
출가한지도 오래 되고 경전에도 해박하여 홍인대사를 대신해 일천 대중을 가리키는 강사였습니다.
즉 대중들은 신수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있으니 법은 당연히 신수대사께서 계승을 하실거다 다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대중은 모두 생각을 쉬고 말하기를
“우리들은 뒷날에 신수대사에게 의지할 것이다. 어찌 번거롭게 게송을 지으랴!”하였다.
신수는 생각하였다
“모든 대중이 게송을 짓지 않는 이유는 내가 저들의 교수사인 까닭이니 내가 어차피 게송을 지어 화상께 바칠 수밖에 없다.
만일 내가 게송을 바치지 않는다면 화상께서 어떻게 나의 마음속 견해의 심천을 아시랴.
내가 게송을 바치려는 뜻이 법을 구하는 것이라면 옳은 일이라 하겠거니와 조사의 자리를 구하는 데 있다면 옳지 않은 일이다.
이것은 범부가 성인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생각과 무엇이 다르랴.
그렇다고 또한 게송을 바치지 않는다면 마침내 법을 얻지 못할 것이니 참으로 어려운 일을 당하였구나.”하였다.
이 글은 신수대사 제자나 신수대사가 쓰신 글이 아니고 혜능대사의 제자들이 쓴 글입니다.
그러니 신수대사가 정말 이렇게 생각을 하셨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신수대사가 이정도 수준밖에 안되었다면 신수대사는 법을 계승할 자격이 없습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언하에 써야 되고, 못 깨달았다면 못 깨달았다는 게 확연해서 아무런 마음의 불편이 없어야 하는데,
이런 마음의 불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아직 해탈과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속의 학문이 깊고 경전에 해박하고 오랫동안 스승 역할을 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스승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질문에 마음이 산란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대부분 공부하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모습이고,
또 자리나 형식이나 지식이나 지엽말단적인 데 관심을 많이 뺏기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신수대사는 겉으로는 위대한 승려처럼 보였어도 직지인심의 측면에서 보면 부족한 점이 있지 않았나,
당대에는 잘 나갔지만 후대에 제자들이 많이 번창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렇게 심의 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누구도 신수가 지녔던 마음을 본 것이 아니고, 신수 스스로 고백한 것도 아닙니다.
다른 파에서 이렇게 기록해서 자기들 파에게 유행시킨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이 말을 진실이라 믿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혜능 제자들이 남종의 위대함을 말하기 위해 기록했다 이렇게 봐야지,
혜능대사께서 정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면 눈 밝은 이는 그 분을 다시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을 읽고 선이 위대하다, 남종이 위대하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분의 진리에 대한 말씀, 깨달은 바, 문답 이런 것들만 받아들여서,
우리가 반성하고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지표로 삼아야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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