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기웃기웃

반 세기만의 방문, 광주 공원

상원통사 2019. 7. 28. 19:10

차를 타고 지날 때면 창밖을 보며 되뇌이곤 했습니다, '많이 변했네, 언제 한 번 와봐야 하는데~~'

광주에 가는게 연중행사이기에 들러도 시간을 낼 수가 없었는데, 마침 기회가 왔습니다.

성당에 간 아내가 미사를 마칠 때까지 주어진 1시간 반의 틈바구니,

이만큼이면 추억을 더듬는데 부족하지 않겠다 싶어 핸들을 돌렸습니다.

광주 공원, '국민학교' 다닐 적엔 자주 왔었지만 그 이후론 기억이 없으니 실로 반 세기만에 다시 찾은 셈입니다.


아래 사진을 볼까요, 원형의 조형물이 서 있는 곳은 광주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공원다리'라 불렀지요.

예전엔 차 두 대가 지나는 정도의 폭이었는데 지금은 따따블로 넓어진 것 같고,

예전엔 차와 사람이 건너는 다리였는데 지금은 사람만 다닐 수 있는 인도교로 바뀌었습니다.

좌우에 차들을 주차해놓은 그 자리에 예전엔 '구루마(손수레)'들이 즐비했지요,

나무판 위에 크고 작은 해삼들을 올려놓고 파는데, 한 마리에 오 원, 십 원, 이십 원, 오십 원.

그 앞을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하고 호주머니에 손이 몇 번씩 들락날락 한 후에야 큰 맘 먹고 하는 말, '오 원짜리 하나 주세요!'

아저씨는 도마에 물을 한 번 뿌리고 갈쿠리로 제일 작은 해삼 한 마리를 앞으로 당긴 다음 칼로 네댓 토막 내어 내 앞에 쓱 밀어줍니다.

도마에 꽂혀있는 일자로 편 옷핀을 하나 뽑아서 해삼 한 조각을 콕 찍어,

빨갛고 시큼한 초고추장을 듬뿍 묻혀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을 때의 맛이란 뭐라고 해야 할까,

아무리 크고 싱싱한 해삼을 바닷가에서 직접 먹더라도 지금은 이 맛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고보면 맛이란 혀로만 느끼는 게 아니라 눈과 손과 추억으로 느끼는 것 아닌가~~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하고 별로 넓어보이지 않지만, 당시 내겐 엄청나게 큰 광장이었습니다.

기억이 납니다, 빨간 소방차들이 있고 소방관들이 방화복을 입고 나왔으니 '소방의 날' 같은 때였겠지요,

사람들이 빙 둘러 서있고 광장의 하늘에는 길다란 밧줄이 매어 있습니다.

그 줄 한 가운데에는 엄청나게 큰 공이 매달려 있고 양쪽엔 소방관들이 소방호스를 단단히 붙잡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요이~~ 똥!' 하는 총소리가 나면 호스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소방관들은 물줄기를 매달린 공으로 향합니다.

정말 장관이었지요, 사방으로 튀는 물방울, 물줄기에 밀려 왔다갔다 하는 커다란 공, 어어어 하는 함성소리,

옷이 젖거나 말거나 입을 헤에 벌리고 정신없이 쳐다봤던 나!



여기는 광장의 오른쪽, 완전히 달라졌지만 기억은 다 납니다.

소나무가 자라고 조형물이 자리잡고 주차장엔 차들이 즐비한 이곳에는 '점방(가게)'들이 죽 늘어서 있었지요,

그 중 한 군데 '물감방'이 있었습니다. 옷에 물을 들이는 물감을 파는 가게 말이지요,

계림동 집에서 여기까지는 엄청 먼 길(1.5Km)이었는데, 그 먼 길을 1학년 짜리 꼬마가 걸어서 걸어서 물감사러 옵니다,

착한 아이여서가 아니라 순전히 심부름 값 1원이 탐나서 였습니다.

그 돈 모아서 대사리(바다 다슬기)도 사먹고, 덴뿌라(오징어튀김)도 사먹고, 오다마(왕사탕)도 사먹고, 께끼(아이스케키)도 사먹고 ~~




여기는 상설시장인 구동시장이 있던 골목이었고 ~~



이 자리엔 실내체육관이 있었습니다, 구동 체육관,

광주공원이 전체적으로 거북이 형상이고 이 자리는 거북이 머리와 앞발 사이에 해당한다,

그 거북이에게는 여의주가 필요했는데, 그래서 인지 둥그런 모양의 실내 체육관이 들어섰다,

아버지께 들은 이야기였는데, 둥근 구슬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각진 '빛고을 시민문화관'이 들어섰습니다.



그 건너편, 공원 좌측에도 올망졸망한 집들과 가게들이 엄청 많았는데 완전히 숲으로 변했네요,

광주시, 돈 많이 들여서 좋은 공간 만드셨군요, 감사합니다.




문이 잠겨서 들어가보진 못했지만 독특한 게 하나 있습니다.


유네스코 화장실

"덴마크 예술가 그룹 수퍼플렉스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에 주목한다.

 수퍼플렉스는 기존의 낡은 공중화장실을 파리 유네스코 상임위원회 화장실로 탈바꿈 시켰다.

 외관은 평범한 공중화장실의 모습을 유지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복제된 화장실을 통해 사용자들에게

 복제품과 진품의 관계, 배타성과 포용성, 그리고 권력이나 일상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이제 계단을 따라 공원 위로 올라가는데 ~~



슬픈 조형물이 하나 보입니다.


시민군 무기를 들다

"이곳은 5·18 민주화운동 때 시민들이 계엄군의 학살에 맞서 시민군을 편성하고 훈련했던 곳이다.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나자,

 오후 4시경 시민들은 자위 수단으로 인근 시군 지역에서 예비군용 총과 탄약 등 무기를 가져와 시민군을 편성하고 사격술 훈련을 실시했다.

 5월 27일 계엄군이 진압해 올 때 이곳에서도 시민군과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계단 위로 올라가면 흙으로 덮인 넓은 광장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는데 지금은 차밖에 안보이네요.

앞에 보이는 건물은 시민회관, 이것을 지을 때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곤 했었지요,

'그나마 하나 있는 휴식공간에 저런 건물을 짓다니 시청 X들 생각이 있는 것인 지 없는 것인 지~~"

저 건물의 오른편 쪽엔 커다란 호두나무가 몇 그루 있었습니다.

가을 어느 날 오후, 동네 친구들과 같이 와서 호도나무를 향하여 돌맹이를 힘껏 던집니다.

힘이 없으니 대부분은 미치지도 못하지만 열 번에 한 번쯤은 호두를 정통으로 맞춥니다.

후두둑 떨어진 호두를 호주머니 불룩하게 담아 집에 가져와서 발로 문지르고 손으로 비벼 깨끗이 합니다.

그 중 몇 개는 돌맹이로 깨서 먹을 때까지는 고소하고 좋았는데,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손에 옻이 잔뜩 올라 엄청 고생했던 기억,

지금은 다 재미있는 추억으로 변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길 건너 저 자리는 어린이 공원이라 불렀지요,

원래 저 가운데에는 돌로 만든 탑 같은 것이 있었는데,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니 올라가 놀기도 했습니다.

어느 때인가 탑 주위로 동그랗게 철도 레일을 깔고 꼬마 전차를 운행했습니다.

한 번 타보고 싶어 몇 번이나 갔었지만 돈이 없어서 ~~



예전엔 이 탑이 없었어요, 커다란 코끼리 그네, 미끄럼틀, 정글 등 놀이기구들이 있었습니다.


어린이 헌장탑

"이곳에 설치된 어린이헌장탑은 소파 방정환 선생님의 어린이날 지정(1946년 5월 5일)을 기념하기 위해

 1959년에 광주공원 어린이헌장탑 현상공모를 실시하여 전남 출신인 탁연하씨가 당선되어 1959년 5월 5일 광주공원 중앙광장에 설치하였으며,

 1975년에 옛날 금융조합 창설기념탑이 있던 현재 이 자리에 옮겨졌습니다."



공원 아래도 완전히 숲으로 변했네요, 예전에 교회도 있고 친구집도 있고 우리집도 있었는데 ~~



어린이 공원에서 바라본 광주 공원,

기억이 납니다, 이 느티나무는 그 때도 있었습니다,

느낌으론 그 때가 지금보다 훨씬 더 큰 나무였습니다.



예전엔 이것이 뭔지도 몰랐는데, 그 땐 못들어가게 앞을 막아놨었는데 ~~


4·19 의거 희생영령 추모비

"불의와 독재에 항거하다 쓸어진(쓰러진) 일곱 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그 뜻을 만세에 길이 전하고자

  전 도민의 열성을 한데 모아 이곳에 이 비를 세우다."                          - 1962년 4월 19일 -



광주공원은 이층으로 되어있습니다.

아래는 그냥 '광주공원'이라 불렀고 위는 '비둘기공원' 또는 '이층공원'이라 불렀지요,

비둘기 공원에는 커다란 비둘기집이 있었고 구구구구 비둘기도 엄청 많았습니다.

사진사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고, 바닥에 모이를 뿌리면 비둘기들이 날아와 모여들었고, 사람들은 비둘기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지요.

이 계단엔 노인들이 많이 앉아 계셨습니다, 계단의 왼편 절반쯤 차지하고 앉아 담소를 나누셨지요.

왜 노인들이 여기에 왔느냐, 그 때야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쉴 곳이 어디 있겠어요, 여기라도 있는 게 다행이었지요.

우리 할머니께서도 춥지 않은 날엔 여기 와서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실 땐 가끔씩 번데기를 사오셨습니다.

정신없이 먹고 있는 우릴 바라보며 할머니께서는 "그렇게 맛있냐?"

우물우물 씹으며 대답합니다 "예, 근데 할머니는 왜 안 드세요?" 

"난 젊어서 누애을 많이 키웠단다. 꿈틀꿈틀하는 누애를 생각하면 먹을 엄두가 안나 ~~"

진짜로 징그러워서 안 드셨는 지, 우리 먹으라고 일부러 안 드셨는 지, 지금은 물어볼 수도 없습니다.



이제 비둘기 공원에 오릅니다.

넓은 광장이 있고 그 뒤엔 커다란 탑이 있는데,

어라, 저 탑이 아니야, 길다랗게 네모진 탑이었어,

탑 좌우엔 커다란 박물관 같은 건물이 있었는데 다 사라져버렸네 ~~



탑 오른편, 건물이 있던 자리로 가니 무슨 기념물이 있군요.



맞아요, 바로 이 탑이 있었어요. 엄청 어려운 한자가 두 개나 있었는데 이것이었군요.

"우리 위한 靈의 塔"



탑과 오른편 건물 사이엔 커다란 바윗돌 몇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지름이 우리 키만큼 큰 반구모양이었는데 속도 반구모양으로 파져 있었지요.

옛날에 어느 왕자의 탯줄을 담아 묻었던 태함(胎函)이었답니다.

지금 광주역이 있는 자리에 옛날엔 태봉산이 있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그 태봉산을 허물어 앞에 있는 경양방죽을 메웠지요.

그 때 산을 허물 때 나온 태함을 이곳에 갖다 놨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한탄하셨지요,

"경양방죽과 태봉산을 묶어 공원으로 만들면 시민들 쉴 수 있고 얼마나 좋아,

 그저 생각 짧은 군인들 하는 짓거리 하고는, 쯧쯧 ~~"



그 때 사진사들이 모여 있던 곳엔 멋진 화장실이 들어서고 ~~



뒷편은 산책하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도심 한복판인데도 차소리 대신 새소리가 들리고 아름드리 고목나무가 있는 공원이 과연 우리나라에 몇 개나 될까,

이렇게 공원을 넓히고 가꾸어주신 광주 시민 여러분과 광주 시청에 다시 한 번 감사!!!



두 시인의 시비가 있습니다, 있다고 들은 것은 같은데 보기는 처음입니다.

영랑이야 다 알다시피 강진 사람이고, 용아는 송정리 사람입니다.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

"이 비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수많은 전과를 거두고 순국한 심남일 의병장의 뜻과 행적을 길이 전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1905년 을사조약이 늑약되자 의병을 일으켜 강진 퇴계원 남평 나주 등지의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1909년 5월에는 안규홍 의병진과 합세하여 일군을 섬멸코자 하였으나,

 의병해단의 조칙이 내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1910년 대구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제 길을 내려가면 ~~



예전엔 보지 못했던 탑이 하나 나옵니다.


성거사지 (聖居寺址) 오층석탑

"광주공원 안에 있는 고려 전기의 석탑으로 이 부근은 성거사터라고 전해진다.

 이 광주공원은 원래 성거산이라 불렀는데,

 산의 모양이 거북처럼 생겼으므로 광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등위치에는 성거사를 세우고 목 부근에는 5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아 맞아, 이 바위를 보니 생각납니다, 탑 너머 이곳 바위 있는 곳까지도 왔었지요.

여기서서 저기 멀리 양동시장쪽을 바라보았는데 ~~



한 바퀴 다 돌고 광장쪽으로 내려가는데 사방이 어둑어둑합니다.

날이 저물어서가 아니라 우거진 나무가 하늘을 가려 어둑어둑합니다.

이런 좋은 곳이 광주 시내에 있다니 ~~



여긴 광장 왼편에서 공원으로 올라가는 차 다니는 길, 사진으로는 평탄해보이지만 오르막길입니다.

어느 겨울날, 눈이 오고 엄청 추웠던 날, 바닥이 꽁꽁 얼어 천연 썰매장이 되었지요.

이 동네 저 동네 온 동네 아이들 다 나왔습니다.

바닥은 빙판, 길은 내리막,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저절로 내려갑니다.

앞 사람 어깨에 팔을 얹으면 길다란 기차가 되어 저 위에서 이 아래까지 거칠 것 없이 내려갑니다.

소리지르며 노래하며 신나게 놀고 있는데 어른들이 나왔습니다.

양 손에 연탄재를 들고 나와 여기저기 팍팍 던집니다.

순식간에 썰매장은 사라지고 사방에 욕설만 날립니다, 구시렁구시렁, 詩發, 氏八 ~~

그 땐 그랬지요, 왜 어른들은 우리 노는 꼴을 못 보고 방해만 할까,

어른들은 그랬겠지요, 느그들 그러다가 팔부러지고 다리부러지면 어쩔라고 그러냐,

지금 내가 거기 있다면 어쨌을까, 그래도 연탄재까지는 뿌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고개를 넘으면 오른편에 향교가 보입니다.

은행나무, 기와 대문, 돌계단, 모두 다 옛날 모습 그대로입니다.



광주향교(光州鄕校)

-. 태조1년(1392) 광주향교는 서석산(무등산) 서쪽 장원봉 아래 세워졌으나,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서 성의 동문 안으로 옮겨 지음

-. 성종 19년(1488) 현감 권수평이 이곳 또한 지대가 낮고 수해가 자주 일어나서 지금의 자리에 옮겨 지음

-.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와 내·외삼문을 기본구조로 하고, 문회재 양사재 유림회관 충효교육관 등으로 되어있음

-. 공자를 비롯한 안자 증자 자사자 맹자 등 5聖과 송나라 2賢과 우리나라 18賢등 25성현을 모시고 봄 가을에 제사를 올리고 있음



올망졸망한 집들을 전부 허물고 이렇게나 잘 가꾸었습니다.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아마 통샘거리 있는 곳까지 전부 바뀌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통샘거리, 학교가는 길목에 있어 아침 저녁으로 보곤 했었지요,

계단을 몇 개 내려가면 우물이 있고, 거기선 항상 물이 넘쳐 흘렀습니다.

사람들이 나와서 빨래도 하고 채소도 씻고 노닥거리고 아이들 씻기기도 하고,

어느 날인가 누군가 흘린 미꾸라지 새끼 한 마리가 꼬무락거리기에 주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그 다음에 어떻게 했더라,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옵니다. " 다 끝났어요, 빨리 와요!"

어린 시절이 순식간에 다 날아갔습니다.



시간 참 많이 흘렀습니다.

온 종일 뛰어노는 게 일이었던 꼬마가 벌써 환갑이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