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7강에서 계속)
진여법계(眞如法界)엔 무타무자(無他無自)라 : 바로 깨친 진여의 법계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음이라
진여법계, 바로 깨친 진여의 법계에서는, 진리의 세계에서는,
여기서 진리의 세계란 제법이 공한 도리를 말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 했습니다.
모든 법이 공한 세계에서 보는 것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에서 보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가 보는 세계에는 생멸이 있지만 깨우친 차원에서 볼 때는 생멸이 없습니다.
생한다 하지만 생이 아니요 멸한다 하지만 멸이 아닙니다.
바닷가에 서서 보면 수 없이 많은 파도가 생기고 사라지는 것 같지만,
눈을 크게 뜨고 바다 전체를 보면 다만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것일 뿐입니다.
생긴다 해도 생긴 게 아니고 사라진다 해도 사라진 게 아닌 것, 이걸 불생불멸이라 합니다.
무타무자, 좁은 소견에서 보면 나와 남이 있지만 깨친 도리에서 보면 나도 없고 남도 없습니다.
여기 이 손가락은 좁은 눈으로 보면 다섯 개의 손가락이지만, 큰 눈으로 보면 한 손바닥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손가락만 보면 다섯 손가락이지만 연결된 전체를 보면 한 손이듯, 나와 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생의 세계에서는 둘이 되고 남과 나가 있지만, 깨친 군상에서는 둘이 아닙니다.
꿈속에서는 나를 해치는 강도가 있고 나를 도와주는 관세음보살이 있지만,
눈을 뜨면 강도도 관세음보살도 없고, 나를 해치는 사람도 나를 돕는 사람도 없습니다.
요급상응(要急相應)하면 유언불이(唯言不二)로다 : 재빨리 상응코저 하거든 둘 아님을 말할 뿐이로다.
요급상응, 급히 상응하기를 원하면, 이런 도리를 단박에 알고자 하면
유언불이, 오직 둘 아님을 말할 뿐이다, 둘 아님을 알아야 한다
생과 멸, 깨끗함과 더러움, 옳고 그름, 맞고 틀림, 나와 너, 동과 서,
이렇게 구분하는 한 이런 도리를 절대로 알 수가 없다,
이 도리를 참으로 알고자 하면 바로 둘 아닌 도리를 알아야 한다.
불이개동(不二皆同)하여 무불포용(無不砲容)하니 : 둘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나니
불이개동, 둘 아니면 모두가 같다, 둘 아닌 도리, 제법이 공한 도리를 알면 모두가 평등하여,
무불포용, 포용하지 않음이 없다.
둘의 도리는 동이니 서니 남이니 북이니 하는 것이고,
둘 아닌 도리는 동도 아니고 서도 아니고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닌 것이다.
둘 아닌 도리를 알게 되면 모두가 같다, 동산도 서산도 남산도 북산도 다 맞다,
그러기에 동도 포용 되고 서도 포용 되고 남도 포용 되고 북도 포용된다.
시방지자(十方智者)가 개입차종(皆入此宗)이라 :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은 모두 이 종취로 들어옴이라.
시방지자, 온 세상에 있는 지혜로운 이들은, 시방에 있는 모든 부처님들은
개입차종, 모두 이 종에 들어오리라.
시방에 있는 모든 부처님들은 다 이것을 으뜸으로 삼는다, 깨달음으로 삼는다
온 세상의 지혜로운 이들은 둘이 아닌 도리, 제법이 공한 도리로 으뜸을 삼는다.
종비촉연(宗非促廷)이니 일념만년(一念萬年)이로다 : 종취란 짧거나 긴 것이 아니니 한 생각이 만년이요
종비촉연,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은 다 이 선종의 가르침으로 들어온다
일념만년, 한 생각이 곧 한량없이 긴 세월이다, 찰나와 긴 세월이 둘이 아니다.
법성게에서 일념즉시 무량겁(一念卽時 無量劫), 일념이 곧 한량없이 긴 세월인 무량겁이라 하듯,
이 부분은 법성게와 거의 일치합니다.
전체적으로 봐도 신심명과 법성게는 내용면에서 같습니다.
법성게는 의상스님이 화엄경에 근거해 요약하여 쓴 것이고,
신심명은 승찬대사가 스스로 자기 깨친 바를 표현한 것이지만 내용은 사실 같습니다.
으뜸되는 가르침은 깨달음의 차원에서 보면 길고 짧음이 없다,
그래서 찰나가 곧 하염없이 긴 세월이요 한량없는 긴 세월이 곧 찰나이다.
무재부재(無在不在)하야 시방목전(十方目前)이로다 :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시방이 바로 눈앞이로다.
무재부재,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있다 없다 두 가지를 다 부정합니다
시방목전, 시방이 다 내 눈앞이로다.
전체 대구로 보면 이 부분은 앞의 문장과 어울리기 않습니다.
앞에서 짧은 시간과 긴 시간이 둘이 아니라 했으니, 여기선 긴 시간과 짧은 시간이 둘이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물론, 이 대목이 비고지금 삼세일념(非古之今 三世一念)으로 되어있는 자료도 있습니다.
옛과 지금이 아니니 삼세(과거세 현재세 미래세)가 곧 찰나로다,
여기서 삼세는 단순히 어제 오늘 내일이란 뜻이 아니고, 한량없는 긴 세월을 말합니다.
앞에서는 일념이 만년이다 했고 뒤에서는 삼세가 곧 일념이라 했습니다.
깨달음의 차원에서 보면 크고 작음이 없듯이 시간도 길고 짧음이 없다,
옛과 지금도 없어서 삼세가 곧 찰나다.
여기까지는 시간에 대해서 대구로 설명했고 다음부터는 공간에 대해 설명합니다.
극소동대(極小同大)하야 망절경계(忘絶境界)로다 :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서 상대적인 경계 모두 끊어지고
극소란 아주 작은 것, 과학용어로는 소립자이고 불교용어로는 미진을 말합니다.
극소동대, 지극히 작은 것이 곧 큰 것과 같아서,
망절경계, 큰 것과 작은 것의 경계가 다 끊어지고 사라졌다, 경계가 없다,
큰 것이 작은 것이고 작은 것이 큰 것이다.
극대동소(極大同小)하야 불견변표(不見邊表)라 : 지극히 큰 것이 작은 것과 같아서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음이라.
극대동소, 지극히 큰 것이 작은 것과 같아서,
불견변표, 그 끝(가)과 겉(표면)을 볼 수 없다.
이것은 공간에 대한 얘기입니다.
작은 것이 큰 것에 포함되는 게 우리 상식이지만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작은 것이 큰 것에 포함되고 큰 것은 또 작은 것에 포함됩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우리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을 현실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는 하나의 직선 밖에 없다는 게 상식입니다.
그러나 남극과 북극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직선을 그을 수가 있습니다.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이란 아주 작은 경험 안에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
우리들의 앎이라는 것도 절대 진리가 아니라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 곧 큰 것이며 지극히 큰 것이 곧 작은 것이다,
그래서 큰 것과 작은 것의 경계도 없고 끝도 없고 겉도 없고 속도 없다.
(제19강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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