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신심명 강의 다섯 번째가 되겠습니다.
지자무위(智者無爲)어늘 우인자박(愚人自縛)이로다 : 지혜로운 이는 함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얽매이도다.
지혜로운 자는 함이 없거늘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자신을 얽매도다,
여기도 상대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지혜로운 사람 하나는 어리석은 사람.
지혜로운 사람은 아무런 걸림이 없고 생활하는데 자유롭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누가 속박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속박한다.
3조 승찬대사와 4조 도신스님과의 대화를 한 번 보세요.
도신 : 스님, 저를 해탈케 해주십시오.
승찬 : 사미여, 누가 너를 붙잡는가(얽매는가)?
도신 :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싶습니다.
승찬 : 너 마음이 어떤가?
도신 : 제 마음이 심히 불안합니다.
승찬 : 그 불안한 마음을 이리 내놔봐라, 내 편안하게 해줄테니.
불안한 마음을 내놓으라니 불안한 마음을 찾아봐야 합니다,
불안한 마음을 찾는다는 것은 불안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입니다.
이게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조견(비추어 본다, 찾는다, 관한다)입니다.
그대로 관해보니 아무 것도 없다, 텅 비어있다, 바로 공입니다.
비추어보니 오온이 모두 공하더라, ‘조견 오온개공’입니다.
꿈속에서 칼 든 강도가 쫒아오니 ‘살려주세요’ 라고 소리치다가,
옆에서 흔들어 깨우니 눈을 떴다, 눈을 뜬 게 조견입니다.
눈을 떴더니 강도가 없더라, 일체가 공한 것입니다.
강도가 없으니까 두려워 할 일이 없고, 두려워 할 일이 없으니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더라,
아주 간단합니다.
마음이 불안하다, 불안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강도를 보고 놀란 것과 같다,
그 불안한 마음을 내놔라 해서 그걸 찾으려고 봤다, 그게 바로 꿈을 깬 것과 같다,
깨고 보니 강도가 없더라, 불안한 마음이라 할 만한 게 없더라,
불안한 마음을 직시하면 불안한 마음의 실체가 없는 줄 알게 되고, 없는 줄 알면 불안한 마음이 사라진다,
강도가 없는 줄 알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같은 말입니다.
저 죄를 좀 사해주십시오, 네 죄를 이리 내놔라 내가 사해줄게,
죄를 내놓으려면 죄를 찾아야지요, 죄를 찾는다 이게 ‘조견’입니다.
죄의 본성을 살펴보니 죄라고 할 것이 없더라, 텅 비었더라, ‘죄 무자성’이다, 모든 마음의 괴로움이 사라져버립니다.
저를 자유롭게 해주십시오, 누가 너를 속박하고 있느냐,
누가 속박하고 있는 지 살핀다, 살피는 것이 조견이고 관입니다.
살펴보니 아무도 잡는 사람이 없다, 아무도 나를 얽어맨 사람이 없다,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니 내 너를 자유케 했노라,
자유케 했노라 해서 자유로워진 게 아니라 ‘없습니다’ 할 때 이미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강도가 없는데 나는 환영에 사로잡혀 강도가 있는 줄 착각하고 두려워했다,
강도가 없는 줄을 아니 두려움이 사라진다,
아무도 나를 얽어맨 사람이 없는데, 내가 스스로 착각해서 나를 속박하고 있었다.
강도가 없습니다 하니까 내 이미 너의 강도를 다 없앴노라,
없앤다고 하기 전에 이미 없어진 거다, 없는 줄 아니 이미 두려움은 사라져버렸다,
지혜로운 사람은 도망갈 일이 없습니다, 꿈에서 깬 자는 도망을 안 갑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꿈속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은, 강도에게 쫓기니 도망가야 됩니다,
아무리 도망가도 소용이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됩니다,
그러나 눈을 뜨면 강도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속박합니다, 꿈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과 같은 겁니다.
법무이법(法無異法)이요 망자애착(妄自愛着)이라 : 법은 다른 법이 없거늘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하여
법무이법, 진리(법)라고 하는 것은 다른 진리라고 할 것이 없다,
진리라고 할 때 이것이 어떤 진리라고 할 것이 따로 없다,
진리는 진리 아닌 것과 구별되는 다른 어떤 진리라고 할 것이 없다,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이 있다면 두 가지 법이 된다, 이것은 이미 양변에 떨어진 겁니다.
깨어나면 강도도 없고 강도로부터 도망갈 사람도 없습니다.
꿈속에서는 강도도 있고 그 강도를 잡아주는 나를 구원해주는 사람도 있지만,
꿈을 깨면 나를 해치는 강도도 없고 나를 구원해줄 보살도 없다, 그건 다 꿈속의 얘기이다.
망자애착, 어리석은 사람은 도리에 어두워 스스로 애착을 갖는다,
스스로 상을 짓고 거기에 집착을 해서 진리라고 하는 것을 만든다,
사람들이 법법하지만 법이라고 할 어떤 정한 법이 있지 않다, 전해질 법도 없고 전수받을 법도 없다,
우리는 법을 구하고 법을 증득하고 그 법을 전해주고 그 법을 전해받는다 한다,
이 때 우리는 그 법을 어떤 정해진 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법 아닌 것과 구별되는 어떤 법, 그 ‘어떤 법’이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게 진리다.
장심용심(將心用心)하니 기비대착(豈非大錯)이라 :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릇됨이 아니랴.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어긋남이 아니겠는가,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쓴다 하니 이미 크게 어긋난 것이다.
그냥 벌떡 일어나면 되는데, 일어나지 않고 일어나야지 이러고 있는 게 용심입니다.
용심을 쓸게 없습니다, 그냥 일어나버리면 되는데 일어나야지라고만 합니다.
그냥 가면 되는데 가야지 가야지 합니다, 갔으면 가야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용을 쓴다는 것은 오지 않았기에, 일어나지 않았기에, 가지 않았기에 그러는 겁니다.
그건 이미 어긋난 것입니다.
미생적란(迷生寂亂)이요 오무호오(悟無好惡)라 :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깨치면 좋음과 미움이 없거니
미생적란, 어리석으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긴다,
흔히 어리석으면 혼란함이 생기고 지혜로우면 고요함이 생긴다고 하는데 이건 그릇된 것이다,
어리석을 때 고요와 혼란이 일어난다, 고요와 혼란이 구분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꿈속에서 내가 강도에게 쫒기고 있는데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구해주었다,
이건 꿈속의 얘기이지, 꿈을 깨면 강도도 없고 관세음보살도 없습니다.
나를 쫓는 자도 없고 나를 구해줄 자도 없으니 쫓길 것도 없고 숨을 것도 없습니다.
어리석으니 쫓기기도 하고 숨기도 하며, 어리석으니 어지러움과 고요함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으면 더럽고 깨달으면 깨끗해진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어리석으면 깨끗하고 더러움이 생기고, 지혜로우면 깨끗함도 없고 더러움도 없습니다.
어리석으면 이문, 두 가지가 일어나고, 지혜로우면 둘 다 사라져버립니다.
오무호오, 깨달으면 좋고 싫음이 없어진다,
깨끗하고 더러움이 있어야 좋고 싫음이 일어납니다.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고, 좋아할 것도 싫어할 것도 없고,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고, 갈 것도 올 것도 없습니다.
예토와 정토가 있다면 갈 곳이 있고, 죄를 지으면 지옥에 떨어지고 선을 행하면 천당에 태어납니다.
중생계에서는 오고 갈 것이 있고 좋고 나쁜 곳이 있지만,
깨쳐버리면 지옥과 천당이 없어지니 올 것도 없고 갈 것도 없어집니다.
꿈을 꾸기에 강도가 있고, 강도가 있기에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구원을 요청하고 구원을 요청하기 때문에 보살이 출현하는 겁니다.
보살이 출현하여 구원받으니 행복하다고 하지만 눈을 뜨면 모든 게 다 사라져버립니다.
강도가 본래 없기 때문에 도망갈 일도 없고, 도망갈 일이 없으니 구원을 요청할 일도 없고,
구원을 요청할 일이 없으니까 구해줄 사람도 없고, 구원해줄 사람도 없으니 싫어하고 좋아할 사람도 없는 겁니다.
우리는 어리석어 나쁜 언행을 하고 그 과보로 괴로움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칼 든 강도를 만난 것 같이 괴롭고, 괴로우니 발버둥 치고 구원을 요청하는 겁니다.
신이나 불보살을 만나 구원받고 좋은데 태어나고 천당 간다고 하는데 다 꿈속의 일입니다,
이건 다 중생계의 얘기입니다, 아직도 꿈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꿈에서 깨면 강도도 보살도 없고, 두려워할 일도 구원 받을 일도 없고, 미워할 사람도 고마워할 사람도 없어집니다.
일체이변(一切二邊)은 양유짐작(良由斟酌)이로다 : 모든 상대적인 두 견해는 자못 짐작하기 때문이로다.
일체이변, 모든 상대적인 두 견해, 선악 시비 오호 구정 생멸 이런 것들은,
양유짐작, 자못 짐작하기 때문이로다
양유는 ~하기 때문이로다, 술 따를 짐, 잔 작, 직역하면 잔에 술을 따른다는 뜻이지만,
선악을 헤아려 이건 행하고 저건 행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분별하는 것을 짐작이라 합니다.
헤아려 분별하는데서 양변이 생기지만, 사량분별을 버리면 양변이 다 사라집니다.
몽환공화(夢幻空華)를 하로파착(何勞把捉)하야 : 꿈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몽환이란 꿈속의 허깨비, 강도를 만난 것도 공주를 만난 것도 부처님을 만난 것도 다 몽환, 헛것을 본 겁니다.
공화, 허공에 핀 헛꽃, 내가 착각해서 헛것 본 것을 공화라 합니다.
몽환과 공화는 다 같은 말입니다.
꿈속의 허깨비를 봤거나 허공의 헛꽃을 봤다, 다 우리의 착각에서 일어난 겁니다.
하로파착, 몽환 같고 공화 같은 것을 알지 못하고 어찌 그것을 잡으려고 애를 쓰는가,
칼 든 강도가 꿈속에 나온 것인데 죽기 살기고 도망을 간다, 이게 몽환·공화 하로파착이다,
여러분들이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근심 걱정하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가?
실제로는 없었는데 본인은 그런 일이 있다고 착각합니다.
강도를 만나 도망가는 사람에게 강도가 없다 이러면 미치고 팔짝 뛸 겁니다.
저렇게 칼을 들고 쫓아오는데 네 일 아니라고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느냐 라고 항변하지만,
눈을 뜨면 없는 줄 자연히 알게 됩니다, 꿈속에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처럼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엄청난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건 괴로울 할 일이 아니라고 해봐야 귀에 안 들어옵니다.
그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면 그건 괴로운 일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사건이요, 하나의 일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비가 왔다 맑았다 구름 끼고, 기온이 올라갔다 내려오고, 날씨는 항상 변하는데,
우리는 자기의 요구·필요·생각에 따라 날씨가 나쁘다 좋다 춥다 덥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날씨는 그냥 날씨일 뿐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가뭄에 비 오면 좋은 날씨고, 여름에 구름 끼어 시원해지면 좋은 날씨고, 겨울에 맑고 따뜻하면 좋은 날씨입니다.
근데 우리는 덥다고 난리고 춥다고 난리고 비 온다고 난리입니다.
득실시비(得失是非)를 일시방각(一時放却)하라 :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 버려라.
얻고 잃음을,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버려라, 잡고 있던 것을 확 놔버려라.
놔버린다는 것은 눈을 뜬다는 것이고, 눈을 뜨면 모든 게 다 사라져버립니다.
양변이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니 양변을 떠나야 됩니다.
칼 든 강도는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일 뿐 실제로 나는 편안하게 누워 꿈꾸고 있습니다.
환영에 사로잡히면 강도에게 쫓기고 있고, 꿈에서 깨면 아무 일 없는 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할 일이 없다, 무위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꿈에서 깨지 못하면 죽기 살기로 도망가야 되고 할 일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도망가려 하지 마라고 하는데 여러분들은 부지런히 도망가고 있습니다.
남편 때문에 못살겠다, 자식 때문에 못살겠다, 부모 때문에 못살겠다,
못 살겠으니 안 보려 하고 피하려 합니다, 강도에게 쫓겨 도망가는 것과 똑같습니다.
도망가지 말고 직시해라, 조견해라, 확 돌아서서 정면으로 있는 그대로 살펴봐라,
잠을 깨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냥 날씨와 같은 겁니다.
(제15강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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