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강에서 계속)
전급전지(轉急轉遲)로다 : 서두를수록 더디어지도다.
여기서 轉은 더욱이라는 뜻이므로, 더욱 서두를수록 더욱 더디어진다,
서두르면 빨리 가는 게 아니고 더욱더 늦어진다.
이 방안은 깨끗한 것 같지만 먼지가 아주 많습니다
그 먼지를 없애려고 빗자루로 쓸면 쓸수록 먼지는 더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고요해지려고 마음을 내면 더욱더 불안해집니다.
고요해지려고 하는 그 마음이 곧 불안을 불러일으킵니다.
선방에서 참선하는 사람도 고요해지려 애쓰고 깨달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산기가 됩니다.
애쓰면 기운이 열로 변해 산기가 되어 머리 아프고 병이 나고 때로는 정신병자가 됩니다.
가만히 놔두면 먼지도 가라앉게 되고, 가만히 놔두면 불안도 가라앉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 법문 듣고 너무 좋아서 나도 수행자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부지런히 정진해서 깨치겠다고 열심히 했지만 아무리 해도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더 조급해지고 더 열심히 하지만 더 안 깨달아지니 좌절하고 절망했습니다.
나는 자질이 없나보다, 이렇게 남의 밥만 축내고 앉아있느니 차라리 속세로 나가자,
가서 결혼해 자식 낳고, 돈 벌어 보시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어 부처님을 찾았습니다.
수행자 : (인사를 하며) 집에 가겠습니다.
부처님 : 왜 그런가?
수행자 : 저는 아마 수행에 소질이 없나봅니다
제가 부처님 법문 듣고 발심해서 몇 년간 열심히 정진했지만 진척이 없습니다.
이럴 바에야 부지런히 돈 벌어 수행하는 스님들 뒷바라지 하는 게 더 낫겠습니다.
부처님 : 너 세상에서 뭘 잘했느냐?
수행자 : 저는 거문고를 잘 탔습니다.
부처님 : 거문고 소리가 잘 나려면 줄을 탱탱하게 해야 하느냐?
수행자 : 아니요, 그러면 잘 안 됩니다.
부처님 : 그러면 줄을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잘나냐?
수행자 : 그래도 안 됩니다.
부처님 :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수행자 : 너무 탱탱해도 안 되고 너무 느슨해도 안 되고 적당해야 합니다.
부처님 : 공부하는 것도 그와 같다. 너무 조급해도 안 되고 너무 게을러도 안 된다
나태하면 시간만 보낼 뿐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으니 나태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나태하지 않기 위해서 조급한 마음을 내면 마치 거문고 줄이 탱탱한 것과 같습니다.
거문고 줄을 적당하게 해야 소리가 잘 나듯이 나태하거나 조급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조급한 마음을 버리라면 게으른 마음으로, 게으른 마음을 버리라면 조급한 마음으로, 늘 이렇게 양단에 치우칩니다.
나태하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고, 서두르면 이루기는커녕 더욱 더디어질 뿐입니다.
집지실도(執之失度)라 :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집착을 하면 도를 잃게 된다,
도를 얻겠다고 집착하면 도리어 도를 잃게 되고 도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조급해서도 서둘러서도 안 되는데, 조급하지 마라 하면 게을러지고 게으르지 마라 하면 조급해집니다.
‘정답을 찾지 마라’는 데도 끝없이 정답을 찾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아무 선입견 없이 접근하면 되는데 그렇게 안 됩니다.
만 가지 지식이 소용없다고 했는데도 그저 만 가지 지식을 자꾸 떠올립니다.
답을 찾다가 안 되면 ‘쓸데없는 짓 했네’라고 거부했다가 다시 집착하고 또 거부했다가 집착하고, 늘 반복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겁니다.
사실은 말 떨어지자마자 개합할 수가 있는데 이렇게 치우치다가 시간만 보냅니다.
세월이 흐르면 깨달아지느냐, 시간이 지난다고 깨닫는 것도 아닙니다.
이쪽저쪽으로 치우치다가 어느 순간 벗어나야 환히 보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지금 괴롭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그것은 한 밤중에 꾸는 악몽과 같습니다.
꿈속에서는 엄청난 고통인데 눈을 뜨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뭔가 움켜쥐고 있고, 어떤 환상 속에 사로잡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는 누가 무슨 얘기해도 귀에 안 들어오고 앞에 있어도 눈에 안 보입니다.
집착하게 되면 도를 잃게 됩니다.
도를 얻겠다고 지나치게 도에 집착하면 도리어 도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필입사로(必入邪路)다 :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간다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삿된 길이란 ‘나쁜 길’이 아니라 ‘잘못된 길, 틀린 길’을 말합니다.
그 길로 가서는 깨닫지 못하고 치우쳐버린다,
법이라 하면 이미 법이 아니다, 법이라고 상을 지어버리면 그것은 법상이지 법이 아니다,
도라 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고 도라는 상이 되어버린다, 그 상을 여위여야만 우리는 그 도를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은 금강경의 표현을 빌면 ‘무유정법’이 된다,
진리란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이다’ 라고 정하면 이미 굳어버린 것이다,
인천사람이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라고 물으면 부처님이 ‘동쪽으로 가라’하신다,
이 때 동쪽은 '도'이다, 그러나 ‘동쪽으로 가는 게 서울 가는 길이다’라고 정하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춘천사람에게 서울 가는 길은 서쪽이요, 수원사람에게는 북쪽이다,
그렇다고 제 맘대로 가는 것도 아니고, 길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무유정법, 정한 길이 없다 하니까 길이 없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길은 있다,
아무렇게나 가면 안 되고, 인연을 따라 그때그때 정해진 대로 가야한다,
이것을 법성게에서는 불수자성 수연성(不守自性 隨緣成)이라 표현한다,
불수자성,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않는다, 이것은 동쪽이다 서쪽이다 정해져 있지 않다
수연성,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다, 인천이면 동이 되고 춘천이면 서가 되고 수원이면 북이 된다,
설사 동쪽이 진리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 시간과 그 공간에서의 진리이지, 시공을 떠나면 이미 진리가 아니다.
방지자연(放之自然)이니 체무거주(體無去住)라 : 놓아 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되어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
집착하지 않고 놔버려라, 그러면 자연히 진리의 길로 가게 된다.
본체는 머무름도 없고 감도 없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상을 놔버리면 저절로 이루어진다,
인천이면 동이요 춘천이면 서요 수원이면 북이요 의정부면 남으로 저절로 이루어진다
세모를 네모에 집어넣으려면 모서리를 깨야하고, 동그라미에 넣으려 해도 깨야 하지만,
물은 자기 모양을 갖고 있지 않기에 그릇 모양 따라 저절로 그 모양이 된다,
물은 인연을 따라서 그냥 저절로 이루어진다,
낭떠러지를 만나면 폭포가 되고, 평지에 이르면 머무르게 되고, 앞이 막히면 차오르다 넘치고, 돌이 있으면 옆으로 비켜간다.
여러분들 인생도 실제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기 역할을 굉장히 많이 합니다.
집에서 애들에게는 아빠요, 아내에게는 남편이고 부모에게는 자식이다,
버스타면 승객이고, 회사가면 직원이나 사장이 되고, 누구 만나면 친구가 되고, 절에 오면 신도가 된다,
이렇게 늘 인연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처럼 됩니다.
남편은 아내가 때론 엄마 같기를, 때론 기생 같기를, 때론 주부이기를 원하는데,
아내는 아내로서의 역할만 하려고 하기에 남편이 기생이기를 원하면 화를 낸다,
그러나 남편은 기생부분이 안 채워지니 기생을 찾아간다.
아내도 남편에게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남편으로, 다른 때는 친구로 스승으로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원합니다.
친구이길 원하는데 스승처럼 하면 재미없고 야성적이지 않고 점잖기만 하다고 싫다 합니다.
어떤 부분은 채워져도 다른 부분이 안 채워지니 바람피우는 것이지 꼭 뭐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다,
남이 볼 때는 괜찮지만 자기 욕구가 안 채워지니 불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어릴 때의 성장환경은 다 다릅니다.
부모의 사랑을 못 받은 남자는 결혼해도 무의식적으로 마음은 어머니를 기대하는데,
아내가 어머니 역할을 안 해주면 상처를 입어 어릴 때의 무의식에 빠져들게 됩니다.
술 먹으면 어릴 때 채워지지 못한 것을 희구하게 되어,
평상시에 말이 없던 사람도 술만 먹었다 하면 녹음테이프가 계속 돌아갑니다.
결혼 생활을 잘하려면 서로 맞춰야 됩니다, 어떤 인격이 서로 좋고 나쁘고가 없습니다.
근데 부부지간에는 상대가 내 요구에 어느 때고 맞춰주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서로 갈등이 생깁니다.
세상 사람들이 밖에서 볼 때는 괜찮은데도 그 아내나 그 남편은 항상 불만입니다.
반대로 밖에서 볼 때는 뭐 저런 남자 저런 여자를 데리고 사나 하지만 본인들은 만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상대에게 맞출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에 결혼하신 겁니다.
나 같은 사람은 그게 잘 안 되어서 혼자 삽니다.
혼자 살면 좀 덜 맞춰도 되니, 모양 하나를 정해가지고 이 모양이다 하고 사는 겁니다.
어떻게 이것을 적절히 맞추느냐, 이때의 ‘적절히’가 중도입니다
‘적절하다’ 이게 말은 쉽지만 현실에서는 어렵지요, 허나 상을 벗어나면 저절로 맞춰집니다.
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아무리 맞추려 해도 맞추지 못합니다.
조금만 적극적으로 하면 상대는 간섭한다고 난리고, 한 발 물러서면 무관심하다고 난리입니다.
그러니 나중엔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하고 악을 쓰게 됩니다.
이걸 맞추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항상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치우칩니다.
놓아버리면 자연히 돌아가서 본체가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
그래서 불수자성 수연성,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다 이런 얘기입니다.
(제13강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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