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신심명 강의 네 번째가 되겠습니다 .
능수경멸(能隨境滅)하고 경축능힘(境逐能沈)하야 :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경유능경(境由能境)이요 능유경능(能由境能)이라 :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
불교에서 能은 우리들의 주관을 말하고, 境은 바깥 경계 대상 즉 객관을 말합니다.
그대로 해석하면,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좆아 잠긴다,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다.
즉, 주관과 객관이 별개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주관과 객관이 서로 의지하고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불교의 연기법을 말합니다.
연기란 말미암을 緣, 일어날 起, 그대로 해석하면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가? A로 말미암아 B가 일어난다,
A와 B가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A와 B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A와 B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A와 B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이것과 저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것 없이 저것이 존재할 수가 없다,
이것과 저것이라는 것은 상대적이지만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연관되어 있어,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어지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어진다,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어진다,
이것과 저것이 서로 의지해서 존재한다,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사라짐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사라진다,
이것과 저것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법을 한마디로 말하면 ‘연기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나 사물이 단독으로 존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깨끗하고 더럽다 할 때에도 깨끗함이 단독으로 존재하고, 더러움이 단독으로 존재한다,
깨끗함이 있고 더러움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만, 연기법에 의하면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깨끗함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더러움이 일어나고 더러움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깨끗함이 존재한다,
깨끗함이 없어지면 더러움도 없어지니,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것은 서로 연관된 존재다.
밝음과 어두움도 마찬가지로 따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법당 안을 밝다고 해야 할까요 어둡다고 해야 할까요?
더 밝은 곳에 비하면 어둡다고 하고 더 어두운 곳에 비하면 밝다고 할 것입니다.
이 법당 안은 밝다 어둡다고 말하기 어렵다, 연관해서 밝다 어둡다고 해야 한다,
크다 작다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것의 절대적인 큼, 작은 것의 절대적인 작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크다 작다는 것은 서로 연관되어서 그것이 크다고 불리기도 하고 작다고 불리기도 한다,
모든 것은 이렇게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존재의 특징이다,
그래서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존재의 상호연관성, 불교전통적인 교리로 말하면 제법무아입니다
* 제법무아(諸法無我) : 모든 것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단독으로 뭔가 있다 라고 할 것이 없다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사라짐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사라진다,
생과 멸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정리한 게 제행무상입니다.
* 제행무상(諸行無常) : 항상하는 것이 없다
이것을 간단히 무아와 무상이라 하고, 여기에 괴로움(苦)을 합하여 삼법인이라 말합니다.
* 삼법인 :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一切皆苦)
이 참모습의 이치를 알게 되면 바로 모든 괴로움은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열반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교리적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아주 간단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원리, 실상을 있는 그대로 깨치게 되면 괴로울 일이 없어지는데,
실제의 모습을 알지 못하고 거짓모습에 현혹되어 행하기에 하는 일마다 괴로움(苦)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잠을 자는데, 꿈에 강도를 만나 그 강도에게 쫒긴다, 이게 괴로움이 됩니다.
근데 눈을 뜨니 괴로움이 사라졌다, 괴로움이 있다가 괴로움이 사라진 것은 맞지만,
강도가 쫒아와서 괴로움이 있었고 쫒아오던 강도가 없어져서 괴로움이 사라졌느냐,
아니다, 처음부터 강도는 없었고 괴로워하기는 했지만 괴로워할만한 일은 없었다,
사실은 괴로워할만한 일이 아니지만 이 사람이 괴로운 건 현실이다,
괴로워할만한 일은 없는데 이 사람이 괴로워한 것은 바로 악몽을 꾸었기 때문이다,
강도가 쫒아오는 것은 실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렇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음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허상인데 그것을 이 사람은 실제라고 착각한 것이다,
이걸 반야심경에서는 '전도몽상'이라 합니다.
그 착각에서 깨어나면 괴로움이 사라진다, 다른 말로 하면 괴로울 일이 없음을 깨닫는다,
무상하고 무아한 원리를 알지 못해 괴로움이 생기고, 참모습을 알지 못해 괴로움이 생긴다,
착각 속에 살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나, 그 착각에서 깨어나면 괴로움이 사라져버린다,
부처님께서도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연기법을 깨닫고 나서 모든 번뇌가 사라졌듯이,
우리도 이러한 연기법을 깨닫게 되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질 것이다.
주관과 객관은 서로 의지해 있다
주관은 주관대로 따로 있고 객관은 객관대로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 일어나고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 일어난다,
이렇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표현합니다.
있음과 없음도 이렇게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 하는 것처럼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공과 색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색은 거짓이고 공은 진실이라는 게 아니고, 색과 공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욕지양단(欲知兩段)인데 원시일공(元是一空)이라 : 양단을 알고자 할진대 원래 하나의 空이니라.
이렇게 양단을 알고자 하는데 원래는 하나의 공이었다, 하나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양단은 주관과 객관, 있음과 없음 이런 것을 말합니다,
색은 공으로부터 일어나고 공은 색으로부터 일어난다.
여기 산이 하나 있는데, 한 사람은 동산이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은 서산이라고 부른다,
이 때 동산과 서산은 양단에 속합니다.
사람들은 동산이 맞다 서산이 맞다 하고 논쟁을 합니다.
동산이 맞다는 사람은 그 산을 서산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이해되지 않고,
서산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동산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이게 양단에 치우쳐있는 것입니다.
양단에 치우치면 이것 아니면 저거고 저것 아니면 이거다,
이것이 진리면 저것은 거짓이고 저것이 진리면 이것은 거짓이 된다,
양단에 치우치게 되면 양단이 다 쓸모가 없어집니다.
사실 이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줄을 알아야 됩니다.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것은 바로 하나의 공, 여기서 말하는 일공입니다.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줄을 알게 되면 동산도 되고 서산도 되는 도리를 알게 된다,
그러면 동산도 살아나고 서산도 살아나게 됩니다.
이 양쪽을 알려면 근본도리인 공을 알아야 된다,
공을 알게 되면 동이다 서다 불리는 이 현실을 모순 없이 이해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동산이다 하더라도 당신은 틀렸다가 아니라 저 사람은 저 동네에 살구나,
누가 서산이다 하면 이 사람은 이 동네에서 왔구나, 이렇게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렇게 양단을 알고자 하면 원래 그것이 하나의 공임을 알아야 됩니다.
일공동양(一空同兩)하야 제함만상(齊含萬象)하고 :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함께 다 포함하고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 만상을 품은 것과 같다,
하나의 공에서, 즉 一에서 二가 벌어지고 二로부터 만상이 벌어진다,
만상은 다시 一로 돌아오고 一은 空으로 돌아간다,
이 때 하나가 ‘절대적 하나’라고 말하면 그것은 이미 둘이 되어버린다,
깨끗함이라는 것을 세우면 이미 더러움이라는 것이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도 세우지 않을 때 진정한 하나가 되는 것이지 하나를 세우면 이미 둘로 벌어져버린다,
세상이 만 가지라 하지만 사실은 하나이고, 진정한 하나는 모양 없음, 곧 공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일상무상, 참된 하나의 모양은 곧 모양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일공은 곧 중도를 말합니다.
불견정추(不見精麤)이니 영유편당(寧有偏黨)인가 : 세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불견정추, 세밀하거나 거칠음을 둘로 보지 않는다, 세밀하고 거칠음을 둘로 보면 진리에서 어긋나는 것이다.
영유편당, 어찌 한쪽으로 치우침이 있겠는가, 정이다 추다, 동이다 서다, 어찌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침이 있겠는가.
동이다 서다, 동산이다 서산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생과 멸, 생사와 열반, 깨끗함과 더러움과 같이 대립되는 것은 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절대성을 떠날 때 그것은 바로 공이 됩니다.
크다 하지만 큰 것이 아니고 작다 하지만 작은 게 아니다,
크다 하지만 큰 것의 속성도 없고 작다 하지만 작은 것의 속성도 없다,
크고 작음은 서로 연관되어 있을 뿐이다.
저사람 나쁘다 하지만 나쁘다 좋다 하는 건 상대적인 것이다,
늙었다 젊었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존재는 그냥 존재지 늙었다 젊었다 할 수 없다,
60이니 나는 늙었다 하지만, 70대가 돌아보면 60대는 늙은 게 아니다,
한 쪽에 치우치는 것, 늙었다 젊었다 라고 하는 것은 도가 아니다.
모든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그냥 그것일 뿐이다, 유식하게 말하자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그것은 그냥 한 물건일 뿐이니, 늙었다 젊었다, 깨끗하다 더럽다, 맞다 틀리다, 선이다 악이다 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11강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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