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6. 신심명

[법륜스님의 '신심명'] 제8강

상원통사 2019. 4. 24. 14:46

(~~ 제7강에서 계속)

 

유체양변(唯滯兩邊)이거니 :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니

오직 , 머무를 ,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니,

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바로 양변에 치우쳐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양변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이문(二門)을 말합니다.

시비도 양변이고, 구정, 생멸, 유무, 선악, 미추 다 양변이고 두 가지 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도 양변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거기에 집착하다가, 그게 뜻대로 안되면 미움으로 변합니다.

이렇게 이쪽에서 저쪽, 저쪽에서 이쪽으로 늘 치우칩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는 쾌락과 고행 양변에 치우친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늘 양변에 치우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그렇습니다,

할까 하지 말까, 갈까 말까, 이건가 저건가 늘 이렇게 치우쳐 있습니다.

이건가 저건가가 아니라 그냥 지켜봐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겁니다.

 

여기 산이 하나 있는 데 이 동네에서 보면 동산이고 저 동네에서 보면 서산입니다.

이 산이 동산인가 서산인가 시비를 가리려고 합니다.

동산이라면 서산이 아니고 서산이라면 동산이 아니지만, 이 동네 저 동네를 떠나서 보면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닙니다.

남산도 아니고 북산도 아니고 그냥 산일뿐입니다.

남산이다 북산이다 동산이다 서산이다 큰 산이다 작은 산이다 하는 것은 다 우리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자기 위치에 따라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그 산 자체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산은 큰 산도 없고 작은 산도 없고 동산도 없고 서산도 없고 남산도 없고 북산도 없다,

그냥 한 존재만 있다, 이걸 우리는 공이다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산은 동산 아니면 서산이다 라고 양변을 말합니다.

동산이냐 서산이냐, 남쪽편이냐 북쪽편이냐, 여당이냐 야당이냐, 경상도냐 전라도냐,

자본가냐 노동자냐, 남자냐 여자냐, 늘 이렇게 두 개로 나눠서 이편이냐 저편이냐 가르고,

이편도 아니고 저편도 아닌 사람은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받습니다.

아무 편도 아닌 사람은 이 편에서 볼 때엔 저 편이고 저 편에서 볼 때엔 이 편이니,

이쪽이냐 저쪽이냐는 편의 관점에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동산이냐 서산이냐 다툴 때도 서로 상대에게 미쳤다 하는데,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라 하면 더 미친 놈이 됩니다.

동산 아니면 서산이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라는 게 무슨 소리냐, 비현실적이다 기회주의자다 회색분자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양쪽에 치우치기 때문에 이러는 겁니다.

산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항상 동이든 서든 남이든 북이든 이렇게 보는 것, 이게 양변입니다.

 

영지일종(寧知一種)이요 : 어찌 한 가지임을 알건가.

어찌 , , 어찌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양쪽에 치우쳐 있으면 어찌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이 하나가 중도인데 어찌 중도를 알 수 있는가,

양변에 머물러 있으면 어찌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이 도리를 알 수가 있느냐.

 

일종불통(一種不通)이면 양처실공(兩處失功)이라 :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니

일종불통, 하나라는 것에 통하지 못하면, 중도를 깨닫지 못하면, 공인 줄을 알지 못하면

양처실공, 양쪽에서 공덕을 읽는다, 즉 양변에 치우친다.

하나인 줄을 모르면 동도 잃고 서도 잃는다, 동도 아니고 서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인 줄 알게 되면 동산도 맞고 서산도 맞다,

이 산이 동산도 서산도 아닌 줄을 확연히 알면 동산도 되고 서산도 되는 도리를 안다,

이 동네 가면 동산이 되고 저 동네 가면 서산이 되고 이쪽으로 가면 남산이 되고 저쪽으로 가면 북산이 되는 도리를 안다.

 

일종불통하면 양처실공이라, 한 가지임을 깨닫지 못하면 양쪽을 다 잃는다,

여러분들 일상생활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오늘의 친구가 내일은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은 친구가 됩니다,

부부지간에도 내 맘에 안 들면 금방 미워했다가 내 맘에 들면 금방 좋아합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저런 인간 만났나, 전생에 무슨 복을 지어 저런 사람을 만났나,

다음 생에는 절대로 안 만났으면 좋겠다, 다음 생에도 우리는 꼭 만나야 된다,

상대가 좋은 사람이 되었다가 나쁜 사람이 되었다가 그러는 겁니다.

본질은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일 뿐입니다.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좋은 사람도 되었다 나쁜 사람도 되었다 이러는 겁니다.

모든 게 다 나로부터 일어나는 겁니다.

나로부터 일어나는 줄 알아버리면 양극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견유몰유(遺有沒有)요 종공배공(從空背空)이라 :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

여기서는 유무의 단계를 말합니다, 유를 버리면 곧 유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이 세상을 동산 서산처럼 유와 공으로 나누고, 유는 버려야 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유를 버리면 바로 공에 들어오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유를 버리면 도리어 유에 빠집니다.

그럼 공을 따르면 공에 들어가느냐, 공을 따르면 도리어 공을 등져버립니다.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진다.

 

산에 비유를 하면, 범부중생은 동산이다 서산이다 하고 서로 다투는데,

양극단을 떠나면 그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라는 것을 깨달으면 동산 서산을 다툴 필요가 없어진다,

이 두 가지 견해를 버리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는 또 새로운 견해를 가지려고 한다.

동산 서산이라는 두 가지는 다 틀렸다고 치자, 그럼 저 산은 무슨 산이냐,

이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산, 비동비서산, 이게 실체이고 진실이다,

동산 서산은 가짜 허깨비이고 진짜는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비동비서산이다,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누가 동산이라 하면 틀렸다, 누가 서산이라 하면 그것도 틀렸다,

그건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고 비동비서산이다,

깨달으면 비동비서산이 되고, 깨닫지 못하면 동산이니 서산이니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동이다 서다 하는 논쟁이 깨달았다 못 깨달았다 이렇게 바뀌면서,

깨달았다 못 깨달았다라는 시비에 휘말리게 되는 겁니다.

 

이런 것은 깨달음이 아니고, 공을 쫒음으로 해서 공을 등져버리는 것이고,

비동비서산이라고 하는 상을 하나 지어버리는 것입니다.

동산이나 서산이라는 하나의 상을 짓듯이 동산도 서산도 아니라는 상을 지은 것이기에,

이건 공이 아니라 공이라는 상에 빠진 것입니다.

공상(空相)에 집착하니 시비가 일어나는 것이고, 상을 지었기에 시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깨쳤니 못 깨쳤니 라는 시비가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공부할 때 흔히 범하는 어리석음이다,

공을 따르면 이미 공을 등지는 것이고, 공이라는 정답을 찾으면 이미 공이라는 상을 지어버린 것이다,

상을 버리는 게 공인데 공이라는 상을 취했기에 이건 공이 아니고 공을 등진 것입니다.

 

그럼 공이라는 상을 짓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다만 상을 버리면 됩니다.

동산이다 서산이다 하는 상을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진리라 하는 상을 세우면 안된다,

그럼 누가 동산이다 하면, ‘이 사람은 저쪽 동네에서 온 사람이구나’, 이렇게 알아버리고,

누가 서산이다 하면 이 사람은 이쪽 동네에서 온 사람이구나이렇게 알아버립니다.

그게 맞다 틀렸다 라는 시비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디 사는 사람인 줄 알아버리는 것이니 걸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있다()는 데에 집착합니다.

있다는 것을 버려라 하니까 있다는 것을 버림으로 해서 그 있음()에 도로 빠져버린다,

공을 따름으로 해서 도로 그 공에 등져버린다, 즉 양변을 떠나지 못 한다 이런 얘기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 간이나 친구 간에 이게 맞다 저게 맞다 이렇게 논쟁을 합니다.

친구가 나보다 지위가 높거나 남편이 나보다 지식이 많아 논쟁에서는 항상 내가 밀리는데,

여기 와서 법문을 들어보니 자기가 생각했던 게 부처님 말씀하고 똑같아 너무 기쁩니다.

그래 집에 가거나 친구를 만나면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진리란 이런 것이라고 했어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았을까요?

이 사람이 사용하는 말이나 문자는 분명 부처님 말씀과 똑같지만,

이때의 언어나 문자는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얘기하고 있어도 그건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등지는 것입니다.

그럼 진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 그 법을 듣고 이해한 사람은 어떨까요?

의견이 대립되면 의견이란 서로 다르구나, 어떤 것을 가지고 옳다고 할 수가 없구나,

내 쪽에서 볼 때는 동산인데 저 사람은 서산으로 보이구나,

서산이라기에 아니라고 우겼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보니 서산이라 할 수도 있겠구나,

이게 공을 제대로 이해한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점 보러 가고 팔공산에 기도하러 가면 그런 건 미신이라 생각은 했지만 말은 못하고 지냈다,

어쩌다가 미신이라고 얘기해도 네가 불교에 대해서 뭘 알아이러면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정토회에 와서 공부를 해보니까 정법이란 이런 거구나하고 알았다,

저렇게 기복을 하는 것은 부처님 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 집에 가서 어머니, 오늘 법륜스님 법문 들으니까 그건 정법이 아니래요.’

이런 것은 법문을 제대로 들은 것이 아니라, 정법이라고 하는 상을 취한 겁니다.

그러면 시비가 일어납니다.

법문을 제대로 들으면 어떻게 될까요?

전에는 어머니의 그러한 행위에 불평불만이 생겼지만 법문을 듣고나니 이해하게 되었다,

어머니 마음에서, 어머니의 처지와 자라나온 환경, 살아온 삶에 기초해놓고 볼 때,

그분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분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믿음이고 신앙이고 하나의 종교이다,

이렇게 이해하니 어머니와 같이 점보러 가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옳아서 가는 것은 아니다,

전에는 어머니가 동산이라고 하면 나는 동산이 아니라 서산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그 동네에서는 동산이라 불릴 수도 있다라고 이해하니 갈등이 안 일어난다,

이게 금강경에서 말하는 동산이 동산이 아니라 그 이름이 동산이다하는 논리입니다.

 

다언다려(多言多慮)하면 전불상응(轉不相應)이요 :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상응치 못함이요

절언절려(絶言絶慮)하면 무처불통(無處不通)이라 :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 없느니라.

이런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이러니 저러니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더 진리에 상응하지 못 하지만,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어디든지 다 통하니 어디를 가도 되는 겁니다.

물은 본래 한 형상도 없기 때문에 그릇 모양 따라 인연을 따라 세모가 되고 네모가 됩니다.

모양을 정해버리면 세모 통에 있던 것은 네모 통에 안 들어가고 네모 통에 있던 것은 원통에 안 들어갑니다.

맨 날 부셨다가 붙였다가 그렇게 해야 됩니다.


(제9강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