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6. 신심명

[법륜스님의 '신심명'] 제6강

상원통사 2019. 3. 26. 15:27

(~~ 제5강에서 계속)

     


원동태허(圓同太虛)하니 무흠무여(無欠無餘) :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원동태허, 여기서 둥글다는 것은 동그랗다는 것이 아니라 두루 원만하다, 걸림이 없다, 원융무해하다 이런 뜻입니다,

두루 원만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 마치 텅 빈 허공과 같다, 허공은 아무리 휘저어봐야 걸림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흠무여, 부족할 , 남을 , 부족하거나 남음이 없다,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우리는 뭘 하다보면 늘 모자라고 늘 남습니다, 우리 중생살이가 그렇습니다.

근데 남음도 없고 모자람도 없다, 이 말은 존재 자체는 다 그것대로 완전하다 이겁니다.

남음도 없고 부족함도 없다, 깨끗한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니다 이런 얘기와 같습니다.

 

양유취사(良由取捨)하야 소이불여(所以不如):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 까닭에 여여하지 못하도다.

양유취사, 이란 정말로, ~로 말미암아, 取捨는 취하고 버린다,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소이불여, 所以~ 때문에 또는 ~까닭에, 不如는 여여하지가 않다는 뜻인데,

불교용어로 는 여여하다, 진실 그대로다, 사실 그대로다 이런 뜻입니다.

, 취사를 하기 때문에, 취하고 버리기 때문에 한결같지 못하다,

취하는 것은 좋아하기에 그렇게 하고 버리는 것은 싫어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봐라, 사실을 사실대로 봐라,

업식에 의해서 주관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내 주관인 줄 알아라.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지 그 존재가 좋고 싫은 게 아니다, 그 존재는 존재일 뿐이다.

 

여기 물컵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이게 큰 거요 작은 거요 하고 물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어요?

어떤 사람은 크다고 또 어떤 사람은 작다고 대답하겠지요.

작은 거요 할 때 그냥 작다고 생각이 났을까 머릿속에서 뭔가와 비교하여 생각이 났을까,

이 사람이 바가지를 연상했으면 바가지 하기에는 작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소주잔을 연상했으면 소주잔으로 쓰기는 너무 크다고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크다 작다 할 때에는 무엇인가와 비교해서 말할 뿐이지, 그 자체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그것일 뿐이다, 이게 참모습입니다.

근데 사람에 따라서 때로는 크다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작다고 하기도 합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다는 것은 다 주관적인 것입니다.

무겁고 가볍고, 길고 짧고, 높고 낮고 이런 것도 객관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입니다.

크다거나 작다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뭔가 비교해가면서 크다 작다고 합니다.

존재의 참모습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요, 그냥 그것일 뿐입니다.

이게 제법이 공한 이치입니다.

 

신성하다 부정하다는 것도 다 사람의 마음이 지은 바입니다,

그것은 사람 따라 다르고 문화 따라 다르고 종교 따라 다 다릅니다.

이게 다 마음이 짓는 바다라는 걸 2,600년 전에 부처님은 아셨습니다.

이건 엄청난 사실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사실을 안 것보다 더 엄청난 사실입니다.

그 당시에는 바라문은 신성하고 수드라는 부정하다, 남자는 신성하고 여자는 부정하다,

고귀함이란 태생에서 생긴 거다 이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 조선시대에도 양반은 귀하고 상민은 천하다고 그랬지요, 양반 종자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종자가 있다면 지금도 있어야 되는 데 지금 종자가 어디 있습니까, 다 마음이 짓는 바입니다.

이 도리를 깨치면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어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는데,

깨끗하니 더럽니 해서 취하고 버리기 때문에 여여하지가 못하다는 것입니다.

 

막축유연(莫逐有緣)하고 :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하지 마라, 은 쫓을 축, 有緣은 세상의 인연이니,

막축유연, 세상의 인연, 세간의 인연을 따르지 마라는 뜻입니다.

有緣이란 불교적인 용어로,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어떤 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있고, 옳고 그른 것이 있고, 귀하고 천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물건에는 가치가 높은 게 있고 낮은 게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그럴까요,

평상시는 숯보다 다이아몬드가 비싸지만, 추워 얼어죽기 직전에는 숯이 더 비쌀 것입니다.

숯이나 다이아몬드나 흑연은 다 같은 성분이지만, 글씨 쓰는 것만 볼 때엔 흑연이 비싸야 합니다.

물건의 가치는 본래부터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어떤 게 비싸다 하는 것도 인연에서 생긴 것이지 본래 값어치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릇을 그릇의 용도로만 볼 때에는 무덤에서 나온 깨진 그릇보다 새 그릇이 더 가치가 있지만,

이것을 골동품 가치로 따질 때는 요새 것은 가짜가 되고 옛날 것은 진짜가 됩니다.

진짜냐 가짜냐 할 때는 옛날 것이 더 좋다는 의미가 이미 그 속에 포함되어 있고,

새거냐 헌거냐 할 때는 요새 것이 더 좋다는 의미가 이미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새거냐 헌거냐 하는 것은 객관적이지 않느냐, 진짜냐 가짜냐도 객관적이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데,

그 속에도 이미 우리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것을 두고도 어떻게 보느냐의 관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꿈에 보석을 한 주머니 잃어버렸다면 너무너무 아깝겠지요,

근데 눈 뜨고 나니 꿈이야, 그럼 안 아깝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다 꿈속에서의 이야기입니다.

꿈이라는 것은 이런 주관에 사로잡혀 있는 세계입니다, 지금 우리는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옷을 벗은 게 좋으냐 입는 게 좋으냐, 평상시에는 입는 게 좋지만 목욕탕에 가서는 벗는 게 진리입니다.

옷을 입는 게 좋다는 것은 이 세상적 사고방식이고, 옷을 벗는 게 좋다 이것은 출세간적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인연에 따라 입기도 하고 벗기도 해야 됩니다.

비록 값어치가 있다 하더라도 본질에는 값어치가 없는 줄 알아야 되고,

본질은 값어치가 없지만 이 중생계에서는 값이 매겨지는데, 그 값은 절대적인 게 아니다,

본래 값이 없는 게 값이 매겨진 것이니까 사람에 따라 달리 매겨질 수 있는 것이다,

똑같이 하루 일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5만원 받지만 인도에서는 오천원 이렇게 받는다,

거기는 그렇게 값을 매겨서 거래를 하고, 여기는 이렇게 값을 매겨서 거래를 할 뿐입니다.

 

물주공인(勿住空忍)하라 :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출세간의 법, 공인에도 머무르지 마라,

여기서 공인은 그냥 공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공인은 출세간의 법인데, 거기에도 머무르지 마라.

왜 그러느냐, 공한 이치를 알면 참기가 쉬워지고 참을게 없어져버립니다.

잘했다 잘못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때 참는다는 것은 내가 잘했다는 것입니다,

잘한 게 없다 하면 참을 것도 없어진다, 이게 진짜 참는 겁니다.

참을 것이 없는 사람은 터질 일이 없고, 참을 것이 있는 사람은 참더라도 결국엔 터집니다,

 

일종평회(一種平懷)하면 민연자진(泯然自盡)이라 :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

일종평회, 은 바르다는 뜻이고 는 갖는다 품는다는 뜻이니,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바르게 지니면

은 다할 민이니, 민연자진은 자연스럽게 다해버린다, 즉 어떤 존재가 사라지는 모양을 말합니다.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모든 번뇌(분별)가 다 저절로 사라져버린다, 여기서 한 가지란 중도를 말합니다.

절에 가면 맨 처음에 일주문을 만나는데 어떤 데는 불이문(不二門)이라 쓰여 있습니다.

不二,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니다는 말은 곧 하나라는 뜻입니다.

둘이 아니다, 깨끗한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계속 얘기했듯이 양단을 떠나는 것, 분별을 떠나는 것이다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니고, 승도 아니고 속도 아니고, 세간도 아니고 출세간도 아니다, 이게 둘 아닌 도리입니다.

 

옷을 입어야 된다 옷을 벗어야 된다, 이런 게 둘인 도리이다,

둘이 아닌 이치를 깨치면 옷을 입어야 된다 옷을 벗어야 된다는 둘을 다 떠나버린다,

그래서 인연을 따라 입기도 해야 되고 벗기도 해야 된다, 여기에 자연스러움이 생긴다,

우리는 벗어야 되느냐 입어야 되느냐 이것을 가지고 다투는데,

벗어야 된다고 정할 수도 없고 입어야 된다고 정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입기도 하고 벗기도 하는 것이 그 인연을 따라서 저절로 자연스럽게 이뤄집니다.

 

우리가 경전을 공부할 때 너무너무 이해하기 어려운 중도사상을 대사께서는 아주 쉽게 설명하셨습니다.

일체는 모두 마음이 짓는 바이다,

옳다 그르다는 것을 마음이 지어놓고는 이게 객관적 사실이라고 착각하고 서로 다툰다,

그러나 이게 다 마음이 짓는 바임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양단에 치우치지 않게 된다.

 

여러분들이 오늘부터 해야 할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제법은 다 공한 거다, 잘하면 뭐하고 잘못하면 뭐하나, 이것은 진짜 공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라는 상을 하나 그려버린 겁니다, ‘진리는 공이다라고 공이라는 모양을 그려버린 겁니다.

그건 이미 공이 아니라 공을 등져버린 겁니다.  

모든 것은 본래가 공하지만, 업식을 가진 우리 중생들에게는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좋다 나쁘다 이렇게 비칩니다.

이게 현실이고, 이게 드러난 현상입니다.

드러난 현상을 따르면 전도몽상에 빠지고, 본질을 논하면 현실과는 맞지 않습니다.

비록 나에게 이렇게 보이지만 그것은 내 업식을 따라 거울에 비치듯이 그림자로 일어난 것이지 본질은 공한 것이다,

그러니 거울에 비친 이것을, 내 마음에 비친 이것을 객관화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렇습니다,

이 말속에는 나와 다른 상대의 의견을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 사람이 옳고 나는 틀렸다 이런 얘기가 아니고, 그와 나는 단지 서로 다를 뿐이다,

이럴 때 다름이 다툼이 안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이해는 되더라도 현실에 가면 또 잘 안 돼요,

현실에 가면 자기에 사로잡혀, 순식간에 객관화 되어 버립니다.

그랬을 때 여러분들은, ‘내가 내 기준으로 바라는구나, 내 주관을 객관화 시키고 있구나이렇게 자각해 나가야 됩니다.

나에게 자꾸 일어나더라도 그때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연습해 나가면 나중에는 달라집니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던 것이, 튀어나오더라도 거둬들이게 되고,

일어나지만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내가 또 주관에 사로잡히려 하구나이렇게 되고,

자기 의견이나 느낌을 솔직하게 내놓을 수 있지만 그것을 고집하지 않게 된다,

솔직한데 고집은 안한다 하는 게 실제로 가능해집니다.

그러면 삶이, 인간관계가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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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순상쟁 시위심병(違順相爭 是爲心病) : 어긋남과 따름이 서로 다툼은 마음의 병이 됨이니

불식현지 도로염정(不識玄旨 徒勞念靜) :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원동태허 무흠무여(圓同太虛 無欠無餘) :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양유취사 소이불여(良由取捨 所以不如) :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 까닭에 여여하지 못하도다.

막축유연 물주공인(莫逐有緣 勿住空忍) :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일종평회 민연자진(一種平懷 泯然自盡) :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