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6. 신심명

[법륜스님의 '신심명'] 제7강

상원통사 2019. 4. 23. 14:13

오늘은 신심명 강의 세 번째가 되겠습니다

 

지동귀지(止動歸止)하면 지갱미동(止更彌動)이라 : 움직임을 그쳐 그침으로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큰 움직임이 되나니

여기서 는 더한다는 뜻으로, 움직임을 멈춰서 멈춤으로 돌아가려하면 그 멈추겠다 하는 것이 사실은 더 큰 움직임이 된다,

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려하면 그침은 더욱 큰 움직임이 된다.

 

부처님 당시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사람을 99명이나 죽여 990개의 손가락으로 염주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는 흉악한 앙굴리말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앙굴리란 손가락, ‘말라는 염주라는 뜻입니다, 손가락을 잘라 염주를 만들어서 목에 건 자다, 별명이지요

이 사람은 본래 아주 착하고 똑똑한 젊은이였는데, 스승의 잘못된 인도로 이런 흉악범이 되었습니다.

스승은 사람을 100명 죽여 그 손가락으로 염주를 만들어 목에 걸면 살아있는 상태에서 바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했는데,

이 청년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그렇게 한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 하지만 요즘도 그런 경우가 많이 있잖아요,

폭탄을 들고 가서 적과 함께 자폭하면 바로 하늘나라에 태어난다 이런 확신을 갖고 자살테러행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 스승은 이렇게 가르쳤느냐, 이 스승은 나이가 많았는데 젊은 부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스승이 집을 비운 사이 그 젊은 부인은 앙굴리말라를 유혹했는데 안 넘어갔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화가 나서 남편인 스승에게 자기가 겁탈당할 뻔 했다고 거짓말을 했고,

스승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앙굴리말라에게 이런 그릇된 가르침을 준겁니다.

앙굴리말라는 일종의 확신범이라 할 수 있어요, 어느 순간에 머리가 헷가닥 해버린겁니다.

지금까지 온갖 어려움을 다 겪으며 수행을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기에,

그 마지막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사람의 손가락으로 염주를 만드는 법을 택했던 겁니다.

확신범은 괴력을 갖게 됩니다, 누구도 말릴 수가 없고 누구도 당할 수가 없습니다.

왕이 그를 잡아오라고 열 명의 병사를 보냈지만 그는 모두 다 죽여버렸습니다.

그러나 모든 백성이 두려움에 떨게 되고 요즘으로 말하면 치안불안현상마저 일어났습니다.

왕은 천 명의 날쌘 군사를 뽑아가지고 앙굴리말라를 잡으러 간다고 선포했습니다.

일반인들은 살인자이니 잡아 죽여야 된다고 하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다릅니다,

아들을 먼 데 유학 보내 놨더니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얼마나 가슴 아프겠어요,

그래서 앙굴리말라의 어머니는 부처님께 와서 아들을 살려달라고 하소연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머니의 간절한 소원을 들으시고 앙굴리말라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은 앙굴리말라가 있는 숲에서 도망을 치는데 부처님은 거슬러 그 숲으로 나아갑니다.

그 숲 속을 유유히 걸어가고 있으니 앙굴리말라가 나타납니다.

그는 큰 칼을 들고 사문아, 게 섰거라. 멈춰 섰거라하며 쫒아옵니다.

부처님은 평소 걸음걸이로 걸어가고 앙굴리말라는 뛰어 쫒아오는데 간격이 안 좁혀집니다.

겨우 쫒아온 앙굴리말라는 부처님 앞을 가로막으며 화를 벌컥 냅니다.

앙굴리말라  : 왜 멈추라는 데 계속 도망가느냐?

부처님       : (웃으시면서) 나는 멈춘 지 오래 되었네.

앙굴리말라  :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넌 계속 도망가지 않았냐?

 

이 장면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논쟁에서 멈췄냐 안 멈췄냐로 주제가 바뀐겁니다.

앙굴리말라가 주도하는 대로 하면 죽이려하고 살려달라고 빌고 이렇게 되는 데 지금은 대화가 바뀌어버린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멈췄다, 앙굴리 말라는 안 멈춰놓고 왜 거짓말 하느냐 이렇게 부처님께 항의를 한 겁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나는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멈췄다’,

즉 시비분별심(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이 다 멈췄다, 경계에 따라 일어나는 이런 분별에서 멈췄다는 뜻입니다.

멈춘다는 의미에서만 보면 앙굴리말라는 발걸음이 멈췄냐 안 멈췄냐 이걸 갖고 시비 한거고,

부처님은 마음이 요동치느냐 고요하게 멈췄느냐 이걸 갖고 대응을 하십니다.

부처님은 나는 이미 멈춘 지 오래 되었다, 멈추지 않은 것은 바로 너다 이랬던 것입니다.

앙굴리 말라가 아니라고 하니까 부처님께서는

'나는 이미 마음에 일어나고 사라짐으로부터 멈췄지만, 넌 아직도 희로애락에서, 태어나고 죽는 윤회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앙굴리말라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자기가 지금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칼을 던지고 부처님께 무릎을 꿇으면서 제가 저지른 이 죄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고언을 요청하자,

부처님께서는 그가 무지로부터 깨어났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꿈에 화가 나서 살인을 저질렀는데 눈을 뜨고 보니까 꿈이다,

그러면 살인을 한 거요 안 한 거요? 마치 그와 같은 겁니다.

앙굴리말라가 저도 출가수행을 하고 싶습니다하니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하라 하십니다.

그가 이미 마음의 눈을 떴기 때문에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겁니다.

그는 마음의 무지가 사라졌지만 세상 사람들은 거죽을 보잖아요, 결국은 그를 돌로 쳐죽였습니다.

앙굴리말라는 괴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맹이를 맞고 스스로 죽어갔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부처님께서 앙굴리말라에게 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처님 저는 하나도 후회가 없습니다

숨이 넘어가는 이 순간에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고 고요한 상태였습니다.

그의 법명은 아힘사(Ahimsa)입니다, 아힘사는 불살생, 비폭력 이런 뜻입니다.

 

뭔가 두려워하면서 그 두려움을 억제하려고 하면 잘 안됩니다.

화가 났는데 그걸 억누르려면 마음의 통제가 잘 안됩니다.

이것은 마치 이 방안의 먼지와 같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창문 틈으로 햇살이 들어오면 먼지가 아주 많이 보일겁니다.

그 먼지를 없애려고 빗자루로 쓸면 먼지가 더 일어납니다.

여러분들이 고요해지려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번뇌가 더 일어납니다.

처음엔 조금 고요해 지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번뇌망상이 일어나고,

하루이틀 정진할 때는 괜찮지만 며칠 지나면 혼수상태에 빠질만큼 많은 번뇌가 일어납니다.

그 망상을 없애려 머리를 흔들고, 망상을 쫒으려 애를 쓰면 쓸수록 망상이 더 일어납니다.

망상을 쫒아야지 하는 것 자체가 망상입니다.

일어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면, 그냥 지켜보고 가만히 놔두면 고요로 돌아가는데,

고요하려고 애를 쓰면 더욱더 번뇌망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망상을 없애려고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 한 생각이 더 망상을 휘젓습니다,

한 생각 일으키는 것 자체가 망상입니다.

망상이 안 일어나야지 하면 그 망상이 더욱더 극성을 부립니다.

 

우리는 보통 노력하고 애쓰는 것을 좋은 일이라 하지만, 근본도리에서 그런 것은 수행에 안 들어갑니다.

담배를 끊어야지 하는 것은 아직도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것이고, 일어나야지 하는 것은 안 일어났다는 것이고,

가야지 하는 것은 아직 안가고 있다는 얘기고, 참아야지 하는 것은 못 참겠다는 얘기입니다.

참을 것이 없는 경지가 되어야 합니다, 참을 것이 있어서 참는 것은 언젠가 터지게 됩니다.

 

움직임을 그쳐서 그침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움직임을 그쳐서 그침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 애씀이 사실은 더 큰 움직임이다,

애를 써서 나아가는 것은 정진이 아니다 이런 얘기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해야지 하는 것은 이미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을 때 고요히 하려고 애쓴다고 마음이 고요로 가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한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지켜볼 때 고요로 돌아갑니다,

고요해야지 하는 애씀이 있으면 그것은 더욱더 혼란을 가져옵니다,

일어나야지 하고 결심을 한다고 일어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야지 할 때 그 본질은 일어나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때는 그냥 벌떡 일어나면 되는 것입니다.

 

지동귀지하면, 움직임을 멈추어서 멈춤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면,

지갱미동이라, 그 멈추고자 하는 것이 사실은 더 큰 움직임이 된다

앙굴리말라 얘기에서, 부처님은 경계에 끄달리지 않음으로 해서 이미 마음이 고요해 있다,

부처님은 마음을 고요히 하려고 하는 애씀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금강경 위의적정분에 여래 약래약거약좌약와 시인 불해와(如來 若來若去若座若臥 是人 不解我)’,

부처님이 간다 온다 앉는다 눕는다라 하면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겉행동을 보고 부처님이 가신다 오신다, 앉는다 눕는다고 말을 하지만,

부처님의 마음은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고 앉는 것도 아니고 눕는 것도 아니다,

갈 때나 올 때나 앉을 때나 누울 때나 그 마음은 여여부동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멈춘 지 이미 오래다 이렇게 말한 겁니다.

가되 간 것이 아니고 오되 온 것이 아니다, 여여히 가고 여여히 왔다 이래서 여래라고 부르는 겁니다.

 

여래(如來), 타타가타(Tathagata)

타타가타는 여여히 가다라는 뜻이므로 직역하면 여래가 아니고 여거(如去)가 되지만,

가고 옴에 걸림이 없으므로, 감도 없고 옴도 없으므로 여래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앙굴리말라는 마음의 오고감이 있기에, 하늘나라에 가야지 하는 욕구가 있기에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나왔지만,

모든 욕망과 얻음을 놔버리니까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마음의 오고감이 없는 상태,

원한도 미움도 후회도 없는 그냥 고요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고요히 하려고 굉장히 애를 많이 씁니다.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마음 고요히 하려는 공부를 하지만, 그 자체가 불안의 원인입니다,

마음이 불안하면 불안한 마음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걸 지켜봐야 됩니다,

혜가대사가 달마대사에게 마음을 고요히 하고 싶습니다라고 한 것은 어긋난 겁니다.

그러니 달마대사가 바로 탁 찌릅니다, ‘네 마음이 어떤데?’

마음이 불안합니다라고 하니 불안한 마음 이리 내놔라이랬습니다.

마음을 지켜보니 불안한 마음이 사라져버렸고, 불안이 사라지니까 내놓을 게 없잖아요,

그래서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하니까 내 이미 네 마음을 편안케 했도다.’

구하는 게 아닙니다,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겁니다.

그래서 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려하면 그침은 다시 더 큰 움직임이 되느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제8강에 계속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