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강에서 계속)
그러니 여러분들은 이 종이가 희다 하는 것까지는 모르더라도,
적어도 이 종이가 내 눈에는 푸르게 보인다 여기까지라도 가야 됩니다.
그러면 푸르게 보이는 사람과 붉게 보이는 사람이 상쟁은 하지 않습니다.
거기는 대화가 되는 겁니다, 거기에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다툼은 안 일어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건 사물들은 본래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를 뿐인데 우리들에게는 옳고 그름이 되고 맞고 틀림이 되고 좋고 나쁨이 된다,
이것이 주관이고, 이걸 마음의 병이라고 하고, 마음에서 지은 바다 라고 합니다.
마음에서 지은 바를 마음에서 지었다고 알고 있는 게 사실인데,
마음에서 지은 바를 객관적 사실로 거꾸로 아는 게 병입니다.
이걸 전도몽상이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중생들의 모든 갈등 시비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내 눈에 이렇게 보이는 이유는 자기 업식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담배를 피우는 사람과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업식이 다릅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담배연기가 코끝을 스치면 좋은 기분이 일어납니다.
기분이 좋으면 그것을 갖고 싶고, 피우고 싶고, 피우고 싶으면 담배를 취합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담배연기가 코끝을 스치면 거부반응이 일어납니다.
불쾌하니 피하려 하고, 싫어하고, 싫어하면 버리게 됩니다.
된장국 끓이는 냄새가 코끝을 스치면 기분이 좋아지고, 먹고 싶어집니다.
냄새가 구수하다는 것은 내 느낌인데, 냄새 자체가 그렇다고 객관화 해버립니다.
서양 사람은 그 냄새를 불쾌하게 느끼고, 그 냄새가 고약하다고 객관화 해버립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다 객관화 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옳은 게 있고 그른 게 있다 하고, 맞는 게 있고 틀린 게 있다 하고,
잘난 게 있고 못난 게 있다 하고, 아름다운 게 있고 추한 게 있다고 합니다.
그건 누가 봐도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전도몽상이 되어있습니다.
마음에서 일어난 것을 객관적 사실인양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옳은 걸 그르다고 착각했다, 맞는 걸 틀리다고 잘못 알았다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본래 맞고 틀림이 없습니다.
냄새는 그냥 냄새일 뿐입니다, 객관적으로 좋은 냄새 나쁜 냄새라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업식을 가졌느냐에 따라 쾌로 느껴지면 좋은 냄새가 되고 불쾌로 느껴지면 나쁜 냄새가 됩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어려울 때 도와주면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일지라도 좋은 사람이고,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자기 요구를 거절해버리면 나쁜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 내 눈에 그렇게 보인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이렇게 그것이 주관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다툼이 안 일어납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체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 모든 것은 다 마음이 짓는 바입니다.
그렇다고 옳으니 그러니 아무 의사표현도 하지 마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여러분들 생각대로 하되, 그것은 나의 느낌 나의 생각 나의 의견일 뿐이니 객관화 시키지 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부간에 취미가 다르고 음식 간보는 것이 달라도 아무 갈등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음식의 간이라는 것은 그것이 혓바닥에 어떻게 습관이 들었느냐에 따라 다른 겁니다.
간이 맞다 이런 말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내 입맛에 맞다, 내 혀끝에 맞다고 말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자기 기준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에 제일 맛있는 음식은 어머니가 만든 것이라 합니다.
왜 그럴까, 어릴 때부터 거기에 길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거기에 맛이 들었기 때문에 그게 간이 딱 맞는 거고 그게 맛있는 겁니다.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자기를 기준삼아 세계를 봐버리면 자기가 중심이 됩니다.
자기를 기준삼아 세계를 본다는 것은 자기 주관을 객관화 시키는 것입니다.
불식현지(不識玄旨)하고 도로염정(徒勞念靜)이라 :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불식현지, 이런 현묘한 뜻, 이런 미묘한 뜻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도로, 헛되이 수고한다, 공연히 수고한다, 어떤 수고를 하느냐,
염정, 생각으로 고요히 하려 한다, 고요히 해야된다고 생각한다.
내일 아침에는 일이 있어 꼭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시계소리를 들으면서도 ‘일어나야 되는데’ 이렇게 생각만 하고 못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일어나야 되는 줄은 아는데 몸이 말을 안 들어서요’ 이렇게 말합니다.
몸이 문제다, 알기는 아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이것은 뭘 잘못알고 있는 겁니다.
일어나야지 하는 것은 아직 안 일어난 상태이고, 또한 안 일어났을 때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객관적으로는 아직 누워있습니다.
일어나야지 하고 노력은 하지만, 아직은 못 일어나고 누워서 용쓰고 있는 겁니다.
이때 몸이 용쓰는 게 아니라 생각이 용쓰는 겁니다, 생각만 지금 공연히 애를 쓰는 겁니다.
잘 보세요, 일어나야지 하는 것은 일어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일어나기 싫다는 겁니다.
못 일어나는 것은 몸 때문이 아니라 일어나기 싫어서 안 일어나는 겁니다.
안 일어나는 것인데 못 일어난다고 알고 있는 겁니다.
못 일어나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못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못 일어난다고 누워있지만 옆에서 총소리가 빵~~ 났다, 그럼 벌떡 일어납니다.
누가 와서 일어나면 돈 천만 원 준다 해도 벌떡 일어납니다.
못 일어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못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일어날래야 일어날 수가 없는 상태, 쇠사슬로 묶어 놨거나 허리가 부러졌다면 일어나고 싶어도 못 일어납니다.
내가 일어나기 싫어서 안 일어난다 이렇게 알아야 사실대로 아는 건데,
일어나고 싶었는데 몸이 말을 안 들어서 못 일어났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책임전가입니다, 몸에다가 책임을 전가시키는 겁니다.
이렇게 거꾸로 알고 있습니다, 거꾸로 알고 있기 때문에 안 되는 겁니다.
줘야지 하는 것은 주기 싫다는 것이고, 가야지 하는 것은 가기 싫다는 것이고,
일어나야지 하는 것은 일어나기 싫다는 것이고, 사랑해야지 이 말은 사랑하기 싫다는 겁니다.
노력한다 하는 것은 벌써 하기가 싫은 겁니다.
병을 고치려면 노력할 게 아니라 싫어하는 이 마음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근본을 꿰뚫어 원인을 알아서 처리해야 하는데, 지엽적인 것을 따르고 있으니 애만 많이 쓰고 아무 것도 되는 게 없습니다.
‘마음을 고요히 해야 되는데’ 이 말은 지금 마음이 불안하다는 얘기입니다.
불안한 마음을 불안한 줄 알아야 고요로 빨리 나갑니다.
나는 고요하고 싶은데 마음이 말을 안 듣는다 이렇게 알면 안 됩니다
뭔가 불안한 줄 알면 불안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걸 고요해야지 한다고 고요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려면 그냥 가버려야 되고, 일어나려면 그냥 일어나야 됩니다.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안하면 가끔씩은 비난 받을 일이 생기고 손해 볼 일이 생깁니다.
이게 과보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과보가 따르는 것이고, 그 과보는 받아야 됩니다,
과보를 받기 싫거나 과보 받는 것이 무서우면 하기 싫어도 해야 되고, 하고 싶어도 안해야 됩니다.
하고 싶어도 못 하고 하기 싫어도 해야 하니 세상 사는 것을 괴롭다 하는데,
괴로워할 필요가 없어요, 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일어나기 싫더라도 일어나버려야 되고, 주기 싫어도 줘버려야 되고,
하기 싫더라도 해버려야 되고, 하고 싶더라도 손실이 생길 것 같으면 그만 해야 됩니다.
담배를 피우고 싶더라도 몸에 안 좋다 하면 끊으면 됩니다,
자꾸 생각만 가지고 ‘해야지’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아무 진척도 없이 그런 생각만 계속 하니 고뇌만 많지 실제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일어나야지 하면서 이불 속에서 망설이고 있으면 잠도 못자고 일어나지도 못해요,
근데 벌떡 일어나버리면 일어나야지 하는 생각은 사라집니다.
못 일어나겠으면 그냥 자버려요, 자버려도 번뇌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과보가 따르지요.
과보를 받더라도 잠이나 자고 과보를 받는 게 낫지,
일어나야지 하면서 못 일어나면 잠도 못자고 과보는 과보대로 받게 되는 겁니다.
이건 굉장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도로염정이라, 공연히 수고롭게 한다, 생각으로만 고요히 하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6강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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