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6. 신심명

[법륜스님의 '신심명'] 제9강

상원통사 2019. 4. 25. 13:50

(~~ 제8강에서 계속)

 

귀근득지(歸根得旨)요 수조실종(隨照失宗)이다 :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지만 비춤을 따르면 근본을 잃게 된다,

여기서 비춤이라는 것은 그림자를 말합니다, 그림자를 따르면 근본을 잃게 된다.

개는 흙덩이를 쫓고 사자는 사람을 쫒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개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개는 이리저리 피하지만 아무리 피해도 흙덩이는 계속 날아옵니다.

근데 사자는 피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흙덩이를 던지는 사람에게 덤빕니다.

흙덩이를 쫓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쫓는다, 사람을 향한다,

근본을 향하면 단박에 끝이 나는데 말단(그림자)을 쫓으면 끝이 안 납니다.

우리는 그림자를 쫓고 있고, 가지를 쫓고 있습니다.

 

다른 비유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야지하는 것은 그림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일어나야지 하는 것은 일어나기 싫다의 그림자입니다.

일어나기 싫기 때문에 일어나야지 라는 결심이 필요한 겁니다.

일어나기 싫다를 놔버리는 것은 벌떡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나버리면 일어나야지 하는 이 그림자는 그냥 사라집니다.

 

부처님은 늘 근본을 향해서 말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강가강에서 목욕을 하면 모든 죄가 다 씻겨서 하늘나라에 가게 됩니까라고 물으니,

부처님께서는 그럼 강가강에 사는 물고기들은 하늘나라에 제일 먼저 가겠네이랬습니다.

본질을 딱 꿰뚫어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두 말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그림자를 따르고 비춤을 따르면 근본을 잃게 된다.

 

수유반조(須臾返照)하면 :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보면

모름지기 , 잠깐 , 돌아볼 , 비출 , 모름지기 잠깐 되돌아 비추어보면,

밖을 향하는 마음을 안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 멀리 향하던 불빛을 자기 쪽으로 돌이켜 비추는 것을 반조라 합니다.

승찬대사가 내 무거운 죄(천벌)를 사해주십시오’, 이때 천벌은 하늘이 벌을 준다는 것인데,

혜가대사가 그 죄를 이리 내놔라, 내 사해줄게’, 죄를 내놔라 할 때에는 이 비춤을 저 하늘나라에서 자기 쪽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반조, 돌이켜 비추는 것입니다.

 

승각전공(勝脚前空)이다 : 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여기서 전공은 앞의 공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하나의 불교적인 용어로 보아야 합니다.

공하다는 견해가 붙었다는 말은 이미 공이라는 상을 가졌다는 얘기입니다.

제법은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다 라는 견해를 가진 것이고, 이미 공이라고 하는 상을 취한 것과 똑같은 겁니다.

이 공견에 머무르는 것, 공견에 집착하는 것을 전공이라 합니다.

 

이것은 공하다, 텅 빈 것이다이런 견해를 갖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보다 잠깐 자기를 비춰보는 게 더 낫다.

일어나야지 하고 백 번 결심하거나 외치는 것보다 벌떡 한 번 일어나버리는 게 더 낫다,

마음을 고요히 해야지 라고 천 번 결심하고 억누르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있는 그대로 살펴보는 게 더 낫다,

제법이 공하다 하는 식견을 만 번 갖는 것보다 실상을 한 번 알아차리는 것이 더 낫다.

 

전공전변(前空轉變)하면 개유망견(皆由妄見)이니 : 앞의 공함이 轉變함은 모두 妄見 때문이니

모든 것은 다 공한거야라고 공에 집착하는 것은 그 자체가 망상에 불과한 거다,

법의 실상을 실제로 봐야지 이렇다 하고 생각하는 것은 망견에 불과하다,

제법은 공한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견이지 진리가 아니다.

 

불용구진(不用求眞)이요 유수식견(唯須息見)이라 :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녕된 견해만 쉴지니라.

불용구진, 참됨을 구하지 마라, 이게 진리다 이게 참이다 이렇게 참됨을 구하면

유수식견, 참됨을 구한다 하는 그 자체가 이미 그 망견이다,

그 망견을 쉬어야 된다, 망견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망견을 쉬어야 된다,

참됨을 구하려고 하지 마라, 다만 망견을 쉬기만 해라.

동산이다 서산이다 하는 것은 망견이니 버려라, 버리기만 하면 저절로 하나임을 알게 된다,

이 산이 비동비서산이라고 하나를 주장하는 것도 이미 망견이다,

우리는 다만 망견을 버리고 쉬면되는데, 진견을 구하려 하기 때문에 항상 망견에 떨어진다,

그릇된 견해를 버리기만 하면 되는데, 그릇된 견해를 떠나 바른 견해를 가지려고 하는 자체가 이미 망견이다.

 

이견부주(二見不住)하고 신막추심(愼莫追尋)하라 :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

이견부주, 두 가지 견해에 머무르지 마라

삼갈 , 은 하지 마라, 쫓을 , 찾을 , 삼가 쫒아가 찾지 마라, 진리를 찾지 마라,

두 가지 견해에 머무르지만 않으면 이미 진리에 드는데,

별도의 그것을 구하려하기 때문에 늘 두 가지 견해에 빠지게 된다.

 

재유시비(裳有是非)하면 분연실심(紛然失心)이라 :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로이 본 마음을 잃으리라.

잠깐만이라도 시비를 일으키게 되면, 옳으니 그르니 하는 생각, 맞니 틀리니 하는 생각을 일으키게 되면,

어지러이 본심을 잃게 된다, 이미 근본에서 어긋나버린다.

 

여러분들 여기서 공부를 마치면 깨달음의 장에 가서 한 번 더 공부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가서 내가 누군지 깨달아야 됩니다, 정말 진실이 뭔지를 여러분들이 깨쳐야 됩니다.

깨장에 가더라도 처음에는 계속 자기를 고집하고 자기라는 것을 움켜쥐고 있을 것입니다.

근데 자꾸 얘기를 해보면 자기 견해가 옳다고 할 아무런 근거가 없어집니다.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진실은 어떤 것인가 이렇게 접근하면 됩니다,

자기 생각이 틀렸으면 그대로 버리면 되는 데, 그럼 옳은 것은 무엇일까 라고 새로운 정답을 찾으니 안 됩니다.

부처님은 뭐라고 그랬을까, 스님 법문에 뭐라고 했나 이렇게 정답을 찾기 때문에 눈앞에 있어도 그것이 안 보이는 겁니다.

손에 물건을 쥐고서 찾아나서는 것과 똑같습니다.

정답 찾는 마음을 버려야 됩니다.

정답을 찾는다는 것은 이것이 진리다 하는 것을 정해놓고 그것을 찾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라는 것은 어떤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망견을 여의면 그냥 드러나는 겁니다.

다만 망견을 여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아무 준비가 필요 없습니다.

전에 법륜스님이 뭐라 그랬더라이 생각을 하면 진리에서 십만팔천 리 밖으로 멀어져버립니다.

경전이나 법문을 기억해내든지 뭔가 생각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어 답을 찾으려 하면 진실로부터 십만팔천 리 떨어져버립니다.

이런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다만 진실은 어떤가, 사실은 어떤가, 아무 선입관 없이 접근하면 됩니다.

 

보면 제일 못 깨치는 사람들이 법사와 스님입니다.

왜 그럴까요, 남을 의식해서 그렇습니다.

적어도 나는 중이니 빨리 대답해야 한다’, 이게 망념입니다.

이런 생각을 일으키면 이미 십만팔천 리로 멀어져버리는 겁니다.

내가 이런 생각하면 안 되지 하면 근접해 있다가, ‘나는 기독교인이니까하면 멀어져버립니다.

나는 절에 처음 왔으니까, 저건 내가 정답을 알지, 이렇게 한 생각을 일으키면 십만팔천 리로 가버립니다.

그런 망상을 피우다가 지쳐서 다 헛 거구나이렇게 버리면 근접해 오다가,

다시 정답을 찾으려고 한 생각 일으키면 또 멀리 가버립니다.

이 가르침은 경험을 해보지 않으면 잘 안 잡힙니다.

망견을 놓기만 하면 됩니다, 진을 찾으려 하면 진이라는 새로운 망견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잠깐이라도 옳으니 그르니 맞니 틀리니 이런 것이 일어나면 이미 본심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유일유(二由一有)니 일역막수(一亦莫守)하라 :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둘이라고 하는 것은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 잘나고 못나고 이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니, 하나마저도 버리고 지키지 말고 움켜쥐지 마라.

하나마저도 움켜쥐면, 진리는 하나다 라고 하면, 금방 둘이 돼 버립니다.

깨끗하다 하면 더럽다 하는 것이 생기고, 정이다 하면 부가 생깁니다.

성스럽다 하면 부정함이 생기고, 아름답다 하면 추함이 일어납니다.

깨끗하고 더러움이 없는 것을 깨칠 때 그것을 이름하여 청정심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깨끗한 마음이라고 이름 지으면(한 생각 일으키면), 이미 더러운 마음과 대별이 됩니다,

그럼 이것은 망견에 속합니다.

 

둘을 버리고 하나로 돌아가라,

그러나 하나를 세우게 되면 둘로 벌어져버리니 하나마저도 세워서는 안 된다.

 

일심부생(一心不生)하면 만법무구(萬法無咎)니라 :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이 허물없느니라.

깨끗하다, 옳다, 정의롭다 같은 좋은 것일지라도, 한 생각 일으키면 두 가지로 벌어져 만상이 일어나지만,

한 생각 일으키지 않으면 만법일지라도 아무런 때(허물)가 없고 세상 만상이 다 그대로 진리가 된다,

크니 작니, 높니 낮니, 많이 적니, 가니 오니 하는 것은 다 우리들의 생각에서 일어난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일심이 청정하면 만법이 청정하다,

여기서 만법이란 옳으니 그르니 맞니 틀리니 잘했니 잘못했니 하는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게 다 사라지고 만물은 그냥 그것으로 존재한다, 이걸 우리는 진여라고 말한다.

 

무구무법(無咎無法)이요 불생불심(不生不心)이라 : 허물이 없으면 법이 없고 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다, 만법이 허물이 없으면 거기엔 따로 진리라고 할 것도 없다,

()이 없으면 마음이라 할 것도 없다, 마음이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공의 세계이고, 깨달음의 세계이고, 무아의 경지다.

 

승찬대사는 이런 번뇌가 이미 다한 경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고통은 다 번뇌망상에서 생겨난 것이니, 번뇌망상을 쉬어버리면 제법은 다 그대로 여여하다,

이것을 우선 이해하고 여러분들 생활 속에서도 한 번씩 적용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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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동귀지 지갱미동(止動歸止 止更彌動) : 움직임을 그쳐 그침으로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큰 움직임이 되나니

유체양변 영지일종(唯滯兩邊 寧知一種) :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니 어찌 한 가지임을 알건가.

일종불통 양처실공(一種不通 兩處失功) :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니

견유몰유 종공배공(遺有沒有 從空背空) :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

다언다려 전불상응(多言多慮 轉不相應) :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상응치 못함이요

절언절려 무처불통(絶言絶慮 無處不通) :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 없느니라.

귀근득지 수조실종(歸根得旨 隨照失宗) :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수유반조 승각전공(須臾返照 勝脚前空) :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보면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전공전변 개유망견(前空轉變 皆由妄見) : 앞의 공함이 轉變함은 모두 妄見 때문이니

불용구진 유수식견(不用求眞 唯須息見) :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녕된 견해만 쉴지니라.

이견부주 신막추심(二見不住 愼莫追尋) :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

재유시비 분연실심(裳有是非 紛然失心) :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로이 본 마음을 잃으리라.

이유일유 일역막수(二由一有 一亦莫守) :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일심부생 만법무구(一心不生 萬法無咎) :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이 허물없느니라.

무구무법 불생불심(無咎無法 不生不心) : 허물이 없으면 법이 없고 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