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강에서 계속)
어느 날 혜가대사가 방에 계신데 밖에서 문을 두드립니다.
문을 열어보니 어떤 문둥병 걸린 사람이 얼굴을 가리고 서있습니다.
옛날에 문둥병이란 죄를 많이 지어 천벌을 받아 걸린 병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가 ‘제가 죄가 많아 몹쓸 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 죄를 사해주십시오.’라고 말하자,
대사는 ‘너 죄를 이리 내놔 봐라. 내 너의 죄를 사해주겠노라.’라고 대답합니다.
내놓으려면 죄를 찾아야 하는데, 책 뒤져봐야 알아요, 절에 가서 찾아요, 산에 가서 찾아요?
바로 내면으로 눈을 돌렸지요, 한참이 흐른 뒤에 ‘내놓을 게 없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혜가 대사께서는 ‘내 이미 너의 죄를 다 사했노라’ 이랬습니다.
이렇게 해서 혜가대사의 법을 이어받은 분이 승찬대사입니다.
승찬대사는 문둥병으로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하나도 없어 적두찬(赤頭瓚)이라 불렸습니다.
또 얼굴도 흉하기 때문에 세상에도 잘 안 나타났습니다.
승려사회에서도 밥그릇 수가 많아야 큰소리 치고, 인물 잘 생기고 학식이 높아야 큰 소리 치는데,
문둥병 환자에다가 아무 것도 모르고 늦게야 스님이 되었으니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그러나 법은 그런 것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이 승찬대사가 이 세상에 남긴 것은 딱 한 편의 글 밖에 없습니다.
출신이 어땠는지 언제 죽었는지도 불명확한 분이 남긴 글이지만 선종에서는 신심명이 어떤 글보다도 보배같은 글입니다.
승찬대사가 계시는 곳에 어느 날 어린 사미가 한 사람 찾아왔습니다.
사미라는 것은 스무 살 이하의 소년 승려, 예비 승려를 말합니다.
사미 : 저를 해탈케 해주십시오.
승찬 : 사미야 누가 너를 속박하는가?
사미 :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도 속박하는 이 없습니다.
승찬 : 내 이미 너를 해탈케 했노라.
초기 선불교는 이렇게 아주 명쾌하고 간단명료합니다, 한마디로 폐부를 팍 찌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마른 풀 태우듯이 확 태워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명쾌한 불법이지만 후대에 내려오면서 사변화 되고 관념화 되어 종잡을 수 없는 소리가 되었습니다.
부처님 당시 바라문들은 전승되어온 베다에 있으면 진리이고 없으면 아니라고 했지만,
부처님은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경전이나 계율 등에 의해서 진리는 검증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해탈 지도는 복잡한 이론이나 관념을 갖고 되는 게 아니다,
문자로 해석하고 지식을 쌓고 습득하는데 깨달음의 길이 있는 게 아니다,
깨달음은 몸과 마음에서 경험되어지는 것이지 그런 사량분별지가 아니다,
문자에 의거해서 진리를 검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후대에 와서는 달라져 버렸습니다.
부처님께서 동쪽으로 가라 했다고 서울 가는 길의 정답은 동쪽이라고 진리화, 절대화 해버렸기에,
부처님의 말씀을 맨날 외우지만 도무지 서울엔 갈 수가 없는 그런 불교가 되어버렸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형상화 절대화 하면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인 무유정법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이렇게 비판하면서 나온 것이 공사상입니다.
이런 대승사상마저도 시간이 지나자 또 관념화되고 사변화됩니다.
경전을 번역하고 해석하고 찍어내고 이런 걸로 해서 진리가 검증될 수는 없는 겁니다.
그 때 관념화 사변화 된 불교를 비판하며 달마대사가 새로운 불교를 제창했습니다.
중국의 불교는 불교의 무늬만 있지 불법은 없다,
진리라는 것은 문자에 근거해서, 경을 읽고 해석하고 주석서를 다는 것에 의해서 증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낸 겁니다.
삼처전심(三處傳心) :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사라쌍수곽시쌍부(沙羅雙樹槨示雙趺)
부처님의 가르침은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이 전부 다가 아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전해 내려오는 미묘한 법이 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마하가섭 존자에게 전한 세 가지 별도의 법, 삼처전심입니다.
그 첫째는 다자탑전 분반좌입니다.
부처님께서 다자탑 앞에서 설법을 하시는데 대중이 꽉 차서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었다,
마하가섭 존자는 좀 늦게 왔는데, 누더기 옷을 입은 그를 얕보고 아무도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
그러자 부처님은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 절반을 가섭에게 양보하여 거기 함께 앉도록 했다.
이것이 첫 번째로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둘째는 영산회상 거염화입니다.
부처님께서 왕사성 영취산에서 설법을 하시다가 연꽃을 한 송이 들었더니 대중은 다 의아해 하는데 마하가섭존자 홀로 빙긋이 웃었다,
말없는 가운데 마음과 마음이 통했다,
이에 부처님은 “바른 법, 열반의 묘한 마음을 가섭에게 전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셋째는 사라쌍수 곽시쌍부입니다.
부처님이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신 후,
제자들이 다비를 하려고 불을 붙이는 데 아무리 해도 불이 안 붙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후 마하가섭존자가 도착하여 부처님의 관 주위를 세 번 돌고 세 번 절하자,
부처님이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밀어 보이셨다,
그러자 불이 저절로 붙어 다비식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것을 삼처전심, 말씀으로 전한 많은 법문 이외에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 법입니다.
이 도리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손가락으로 가르치듯이 그대로 꿰뚫어보면 바로 부처를 이룬다,
이렇게 불교에 대한 새로운 입장을 내놨습니다.
이것은 기존 불교인들이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건 오랫동안 글을 배우고 해석하고 익히고 외웠던 모든 것들이 다 물거품이 되는 것이니,
그걸 인정하지 않고 반대했던 것입니다.
어떤 새로운 것이, 진실이 제기될 때는 이런 저항이 있는 겁니다.
부처님이 진실을 말할 때에 부처님을 해치려 했던 사람은 기존의 사제계급인 브라만과 수행자들이었듯이,
이 위대한 스승들을 해친 사람도 바로 기성의 불교도들, 기성의 승려들이었습니다.
1조 달마대사와 2조 혜가대사는 독살 당하고, 3조 승찬대사는 평생 숨어 살았습니다.
5조 홍인에 와서야 조금 얼굴을 내밀었지만, 6조 혜능대사도 17년을 숨어 다녔습니다.
이렇게 해서 조금씩 조금씩 꽃피워 올라온 게 선종입니다.
우리 대한불교 조계종은 이 법을 계승한 선종입니다
제1조사 마하가섭, 제2조사 아난다, 제3조사 상나화수,
부처님의 법을 처음으로 계승한 제1조사는 마하가섭, 제2대 아난다, 제3대 상나화수,
이렇게 해서 보리달마대사는 28대 조사입니다.
달마대사는 부처님으로부터는 28대 조사이고, 중국 조사 가운데에는 첫 번째입니다.
승찬은 30번째 조사이고(중국에서는 3대), 혜능은 33번째 조사(중국에서는 6대)입니다.
우리는 선종이기 때문에 예불을 외울 때 이 조사를 가장 중요시합니다.
서건동진 급아해동 역대전등 제대조사(西乾東晉 及我海東 歷代傳燈 諸大祖師),
서쪽 인도로부터 동쪽 중국을 거쳐서 해동에 이르도록 등불과 등불이 이어지듯 정법을 계정해주신 모든 조사님들,
이 모든 조사님들 속에 달마대사 혜가대사 승찬대사 혜능대사 등 다 들어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선불교 조계종에 다닙니다.
선불교다 하면서 선의 종지, 모든 관념을 뛰어넘는 이 파격성을 잃어버린다면 선불교의 맛이 없는 겁니다.
그렇다고 이 파격은 막행막식처럼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무유정법의 도입니다.
신심명은 모든 허례허식 관념의 벽을 뛰어넘어 오직 정법 위에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수행자들이 마음에 새기도록 승찬대사께서 글로 남겨두신 것입니다.
‘명’이란 비석 같은데 새겨서 잊지 않고 오래도록 간직하도록 남겨놓을 때 쓰는 말이고,
‘신심’이란 믿는 마음인데, 여기서 믿는 마음이라는 것은 그냥 신앙과는 다릅니다.
불교에서의 믿음이라는 것은 그냥 믿는다 하는 믿음이 아니라, 네 가지를 말합니다.
신해행증(信解行證),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고 몸과 마음에서 경험적으로 증득해야 됩니다.
신심명의 신이란 바로 신해행증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심명은 이런 마음에 새겨야 할 글귀로 146구 584자를 남겼습니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말하면 '양변을 떠난 중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중도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바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두 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쾌락의 길이요 하나는 고행의 길인데,
부처님께서는 이 쾌락의 길과 고행의 길 둘 다 버리고 중도를 발견하셨습니다.
신심명의 핵심사상이 바로 중도사상입니다.
그럼 쾌락이란 뭘까요?
쾌락이란 술 먹고 담배 태우고 노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원하는 바가 성취되면 만족의 기쁨이 있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 기분 좋음으로 행복을 삼는 것을 쾌락주의라고 합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 즉 욕계에 사는 중생들은 다 쾌락주의자입니다
쾌락이 가장 완벽하게 보장된 세계는 욕계 6천 가운데 맨 꼭대기인 타화자재천이고,
이 욕계 중에 제일 나쁜 데가 지옥입니다.
천상과 지옥이라는 것은 욕구 욕망이 어느 정도 충족이 되느냐에 따라서 나눠진 단계인데,
맨 밑이 지옥, 그 다음이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으로 나뉩니다.
천상도 또 여러 단계로 나뉘는 데, 맨 아래가 사왕천, 그 다음에 도리천, 아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타화자재천왕이 욕계의 우두머리입니다.
이 욕구라는 것을 한 번 살펴봅시다.
담배 피우고 싶어 한 대 피우면 기분이 좋다가 끝나는데, 조금 있으면 또 피우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뭘 원할 때, 원하는 게 이루어진다고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반복됩니다
반복만 되는 게 아니라 갈수록 커집니다.
마약주사를 처음 맞을 때는 기분이 좋지만 같은 농도로 계속 맞으면 쾌락이 떨어집니다.
그걸 만족시키려면 조금씩 조금씩 더 넣어야 됩니다.
욕구는 계속 커지기 때문에 어느 선에서는 만족하더라고 지나면 또 불만족이 생깁니다.
그럼 고통이라는 것은 뭐고, 불행이라는 것을 뭘까요?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불만족하게 되어 기분이 나쁩니다.
그것을 세상에서는 불행이다 또는 고통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고통이고 살면 행복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 놈 죽었으면 하고 바랄 때 죽었다 라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은 것이고,
살았으면 하는데 죽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나쁘고 그런 겁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바깥 세계의 문제가 아니고,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겁니다.
욕구가 충족되면 기분이 좋고 욕구가 충족 안 되면 기분이 나쁘다, 여기에 따라서 지옥부터 천상까지 세계가 벌어집니다.
이게 육도윤회입니다.
육도윤회 안에서 충족의 기쁨은 다음 단계의 불충족으로 가고, 불충족은 다음 단계에서 충족으로 갑니다.
누가 여러분들을 잡아가 가두어 놓으면 괴롭지요, 먹을 것을 안 주면 더 괴롭지요,
그러나 한 열흘 쯤 굶겼다가 음식을 주면 나쁜 놈이라 할지라도 그가 고맙게 느껴집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돈 백만 원을 준다면 기분이 좋을 겁니다.
그 사람이 ‘다음에는 천만 원 줄게’ 그러면 기분이 더 좋을 겁니다.
근데 천만 원 준다고 했는데 백만 원만 준다면 받고도 기분이 나쁠 겁니다.
기분 좋고 나쁨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고가 낙이 되고 낙이 고가 되고 그런 겁니다.
고와 낙은 윤회합니다, 윤회하는 세상에서 완전한 행복은 절대로 이룰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이 쾌락의 길에서 스물아홉 살 때까지 사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것은 완전한 해탈의 길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두 번째 길은 욕구와 욕망이 괴로움의 원인이니, 욕망의 씨를 아예 말려버리는 겁니다.
잠도 안자고 음식도 안 먹고 이렇게 해서 해탈하고자 하는 게 고행주의입니다.
고행자들이 수행을 할 때엔 목욕도 안하고 음식도 거칠게 먹고 가능하면 잠도 안자고
노천에서 살고 모기가 물어도 꼼짝도 안하고 그럽니다.
몸과 마음에서 나오는 욕구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 합니다.
부처님도 이게 해탈의 길이다 생각하고 출가해서 6년간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주 극단적으로 끝까지, 죽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쾌락의 끝까지 가니 남들은 부러워했지만 정작 본인은 번뇌에 휩싸이듯이
고행의 끝까지 가니 도반들까지도 존경했지만 정작 본인은 해탈하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삶을 돌아봤습니다.
세상에 있을 때는 욕구를 따라갔고, 고행을 할 때엔 욕구를 억압했습니다.
욕구를 따라가거나 욕구를 거스르거나, 둘 다 욕구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겁니다.
욕구를 따라 가는 것은 욕망에 빠지는 거고, 욕구를 거스르는 것은 욕구를 뿌리 뽑은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됩니다.
둘 다 욕구의 작용이고 반작용입니다. 집착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걸 양변이라 합니다.
이쪽 끝 아니면 저쪽 끝, 저쪽 끝 아니면 이쪽 끝, 이 둘이 사실은 다 한 뿌리에 있습니다.
둘을 다 놓아버린 제3의 길 - 중도(中道)
그래서 둘을 놔버렸습니다.
둘을 다 놔서 둘을 떠난 제3의 길, 그게 바로 중도입니다.
중도란 중간이란 뜻이 아닙니다, 둘을 다 놔버린 것, 양변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오래 앉아있으면 다리가 아프지요, 그럼 다리를 펴고 싶습니다.
다리를 펴고 싶다고 펴면 따라가는 거요, 쾌락주의에 속하는 겁니다.
그럼 안 따라가려면 참아야지요, 참으면 이것은 고행주의입니다.
이 둘을 떠난 제 3의 길은 어떤 걸까요?
다리의 통증을 그냥 통증으로 알아차리고 다리의 통증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통증을 통증으로만 보면 잡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게 됩니다.
근데 이론으로는 알겠는데 실제로는 잘 안됩니다, 실제로는 둘 중의 하나가 되지요.
이건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것과 똑같습니다.
왼쪽으로 넘어지려 하면 핸들을 왼쪽으로 틀고, 오른쪽으로 넘어지려 하면 오른쪽으로 틀어라, 간단합니다
처음 타보는 사람은 왼쪽으로 넘어지려 하면 핸들이 저절로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니 그냥 탁 넘어져버립니다.
근데 몇 번 넘어지면서 해보면 이게 됩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했는데 몇 번 넘어지면서 해보면 이게 되는 겁니다.
양변을 떠난다, 이것만 이해하면 이 글 전체는 쉽습니다.
이게 안 되기 때문에 글을 아무리 읽어도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이 둘을 떠나야 됩니다.
(제3강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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