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6. 신심명

[법륜스님의 '신심명'] 제1강

상원통사 2019. 3. 7. 21:58

신심명 - 달마선종 3대조사(三祖) 승찬대사

법성게 - 의상조사(義湘)

신심명은 달마선종 제3대 조사인 승찬대사께서 쓰신 글이고, 법성게는 신라의 고승 의상조사께서 쓰신 글입니다.

신심명이 선종의 가장 대표적인 글이라면, 법성게는 화엄종의 가장 대표적인 글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향해 나가는 우리 불자들은 불법승 삼보에 귀의해야 합니다

스스로 깨달은 이, 깨닫지 못한 이를 깨닫게 해주는 깨달은 이의 가르침,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이, 이것이 불법승입니다.

이 삼보 중에 깨달은 이의 가르침, 즉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은 다시 세 가지로 나눕니다.

이것을 법삼장(法三藏) 이라 합니다.

 

경장(經藏) : 부처님의 진리에 대한 가르침

율장(律藏) : 실천덕목에 대한 가르침

논장(論藏) : 부처님 열반 후에 출현한 스승들이 쓰신 글

부처님의 진리에 대한 가르침,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이론에 관계되는 것을 경장이라 하고,

실천덕목에 대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실천에 관계되는 것을 율장이라 합니다.

이론과 실천은 겸비되어야 되듯이 불자는 이 경과 율에 다 밝아야 됩니다.

논장은 부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에 부처님에 버금갈만한 훌륭한 스승들이 쓰신 글을 논장이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인천 사는 사람이 부처님께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동쪽으로 가세요’라고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것이 기록되어 있는 게 경전입니다.

만약 춘천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었다면 부처님께서는 서쪽으로 가라고 하셨을 것인데,

인천사람이 물은 기록 외에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물어본 기록은 경전에 없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에 춘천 사는 사람이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라고 스승께 물었는데,

경전을 열람해보니 ‘서울 가려면 동쪽으로 가라’는 기록만 있습니다.

그럼 부처님이 말씀하셨으니 동쪽으로 가라고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더라도 이것은 틀린 것입니다.

춘천사람은 서쪽으로 가야지 동쪽으로 가면 서울에 갈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시대가 달라지고 지역이 달라지면 이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럴 때 지혜있는 위대한 스승이라면 뭐라고 답해야 될까요?

경에 보면 서울 가는 길을 물었을 때 부처님은 동쪽으로 가라고 했다,

이것은 길을 묻는 사람이 인천에 있으니 서울 가려면 동쪽으로 가라고 한 것이다,

지금 당신은 춘천에 있으니 서울을 가려면 서쪽으로 가야한다,

경전에 있다고 ‘동쪽으로 가라’ 하면 비록 부처님의 말씀이더라도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라고 답하실 겁니다.

 

법집(法執), 법상(法相) : 진리라고 하는 모양 거기에 집착한다

부처님 말씀대로 했는데 진리에 어긋나는 것을 법집 또는 법상이라 합니다.

법집이란 진리라고 하는 모양 자체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유정법(無有定法), 본래 법이란 정해진 바가 없다 합니다.

인천 사는 사람이 물었기 때문에 동쪽이라 한 것이지 서울 가는 길은 정한 바가 없습니다.

정한 바가 없다고 서울 가는 길이 없다거나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질문자의 처지가 정해지면 방향이 정해집니다.

즉, 구체적인 현실을 떠나서 진리는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유정법이다 라고 말하고, 공(空)이라고 말합니다.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구체적 현실이 정해지면 바로 방향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런 원리로 재해석하거나, 요약하거나, 요약된 말씀을 해설하는 것을 논장이라 합니다.

논장은 비록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부처님의 말씀과 비중이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전에 대해서 해설하거나 요약한다고 아무 것이나 다 논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깨달은 이가 붓다이고,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이가 아라한인데,

이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새롭게 정리한 것을 논장이라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배우는 신심명은 경·율·론 삼장 가운데 논장에 속한다고 할만한 글입니다.

의상조사가 쓰신 법성게는 방대한 화엄경의 내용을 아주 요약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이것도 화엄경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니 논이라 할만합니다.

고려 팔만대장경에는 경·율만 있는 게 아니라 논장도 함께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신심명은 달마선종 제3대 조사인 승찬조사의 글입니다.

승찬 조사는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됩니다.

오늘은 이 글의 이해해야할 배경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소승, 대승, 금강승, 선

불교를 크게 나누면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눕니다

소승불교(남방불교)는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라오스 캄보디아 남부베트남 지역의 불교이고,

대승불교(북방불교)는 티벳 중국 한국 일본 북부베트남 지역의 불교입니다.

또 대승불교는 중국 한국 일본에 전래된 대승불교와 티벳 몽골에 전래된 라마불교(금강승 불교, 밀교)로 나눕니다.

소승불교는 히나야나(hῑnayāna), 대승불교는 마하야나(Mahayana), 금강승불교는 바즈라야나(Vajrayana)라 부릅니다.

소승 불교, 대승 불교, 금강승 불교 모두 다 인도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새로운 교파가 일어났는데, 기성의 불교를 교종, 새로운 불교를 선종이라 칭했습니다.

이렇게 지구상의 불교는 크게 소승, 대승, 금강승, 선 네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선불교의 시조 - 보리달마대사

선불교는 남북조시대 말엽 중국에서 시작이 되었는데, 그 시조가 보리달마대사입니다.

보리달마대사는 인도에서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 중국에 도착했습니다.

그 때 중국은 남북조 시대로, 양자강 이남의 남조에는 양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양나라의 황제가 무제였는데, 양무제는 불교를 아주 옹호했습니다.

절을 짓고 탑도 세우고, 경전을 번역하고 편찬하고, 스님들 교육도 시키고,

그래서 당시 그 나라 사람들은 양무제를 호법의 왕 또는 전륜성왕이라 칭송했습니다.

그 양무제가 달마대사를 궁중으로 초청을 했습니다.

무제는 자기 업적에 대해 쭉 설명하고 ‘이만하면 공덕이 얼마나 되겠소?’ 하고 물었습니다.

양무제는 ‘한량없습니다’ 이런 답을 기대했지만, 달마대사는 ‘없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너무너무 충격을 받은 무제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누구요?’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달마대사는 ‘모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앞의 문답도 그렇고 뒤의 문답도 그렇고, 양무제의 사리분별로는 헤아려지기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놀리고 있다, 이놈은 미친 놈이다 라고 생각하고는 죽여버릴려고 했는데,

옆에 있던 고승들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려서 그냥 보내주었습니다.

 

달마대사 입장에서 볼 때 이런 건 도대체 불법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들입니다.

절을 많이 짓고 탑을 많이 세우고 경을 많이 찍었다 하지만 이건 불법의 ㅂ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양무제에게서 벗어난 달마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북쪽의 소림사에 가서 침묵했습니다.

그걸 면벽 9년이다 하는데, 9년 동안 벽만 보고 앉아있었다는 뜻이 아니고 침묵했다는 뜻입니다.

 

인도에서 고승이 왔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찾았지만 달마대사는 일체 상대를 안했습니다.

왜 그럴까, 와서 질문하는 것들이 불법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것들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다 무언가 얻으러 온 사람들입니다.

모든 고뇌의 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얻으려 하는데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여기 앉아있는 우리들도 다 불법과는 도무지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정법은 귀에 들어오지가 않고, 정법 아닌 얘기는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얻으러 온 사람은 얻지 못하면 가버립니다.

아무 소득이 없으니 며칠 몇 달 있다가 다 가버립니다.

그런데 한 스님만 9년이 지나도 안가고 계속 있는 겁니다.

떡고물이 하나도 안 떨어져도 계속 있다는 것은 얻을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덕 볼 게 없으니 붙어있지 덕 보려 한다면 아무 것도 안 주는데 누가 9년씩이나 붙어있겠습니까?

그래서 달마대사가 어느 날 물었습니다, 처음으로 응대한 겁니다.

달마 : 너는 왜 왔느냐?(너는 아무 얻을 바가 없는데 뭐 때문에 여기 와 있느냐)

제자 : 저는 안심입명의 도(마음이 편안해 지는 도)를 구하러 왔습니다,

달마 : 그래? 네 맘이 어떤데?

제자 : 예, 제 맘이 심히 불안합니다, 이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달마 : 그래? 그럼 네 불안한 마음을 이리 내 놔봐라, 내 편안하게 해줄게.

 

지금 내놓으면 당장 해주겠다니 얼마나 좋은 일이요, 근데 내놓지를 못합니다.

왜냐, 내 놓으려면 찾아야합니다, 근데 불안한 마음을 어디서 찾습니까?

책을 뒤져야 하나요, 이 산 저 산, 이 절 저 절 찾아다녀야 되나요?

아니지요, 밖이 아니라 안으로 향해야 됩니다.

그걸 찾는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기록은 없습니다.

마음이 안으로 향해서 몰두할 때는 시간이 없어져 버립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느냐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9년 만에, 3년 만에, 3일 만에, 말 떨어지자마자 바로, 라고 말들 하지만 사실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어쨌든 대답은 ‘찾을 수 없습니다’ 이랬습니다.

그러자 대사께서는 ‘내 이미 네 마음을 편안케 했도다!’

이런 것을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 이심전심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법을 계승하신 겁니다, 이심전심으로 말없음 가운데 체험하는 겁니다.

이 분이 바로 혜가대사입니다.

 

(제2강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