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금강경 17번째 마지막 시간이 되겠습니다
제29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 위의가 적정하니
수보리 약유인언(須菩堤 若有人言) : 수보리여!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 약래약거약좌약와(如來 若來若去若坐若臥) : 여래가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고 하면,
시인 불해아소설의(是人 不解我所說義) : 이 사람은 내가 말한바 뜻을 알지 못함이니라.
하이고 여래자(何以故 如來者) : 왜냐하면 여래란
무소종래 역무소거(無所從來 亦無所去) : 오는 바가 없으며 가는 바가 없으니
고명여래(故名如來) : 이름이 여래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부처님께서 오신다 가신다 앉으셨다 누우셨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여래가 설하신 그 뜻을 모른다’ 이런 얘기입니다.
왜 그러냐? ‘여래’란 ‘온 것이 없으며 또한 간 바도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았다, 온 바도 없고 간 바도 없는 것을 이름하여 여래라 하니,
여래가 왔느니 갔느니 하는 것은 여래가 설한 그 뜻을 잘 모르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온다 간다 앉는다 눕는다’는 말은, 그 말 그대로의 뜻도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근본은 아닙니다.
우리는 분별을 합니다.
옳다 그르다, 깨끗하다 더럽다, 신성하다 부정하다, 갖가지 분별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분별을 해놓고 거기서 뭔가를 선호합니다.
깨끗한 것은 좋아해서 취하려 하고 더러운 것은 싫어해서 버리려 합니다.
그러다 어떤 상황이 되면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살펴서 더러운 것을 버리고 깨끗한 것으로 채웁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끗하다 더럽다 분별을 짓지 않습니다.
깨끗하다 더럽다 분별을 짓지 않으니 싫어하고 좋아함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싫다고 버릴 것도 없고 깨끗하다고 가져올 것도 없고, 더러운 것을 닦아서 깨끗하게 만들 것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더럽고 깨끗함이 둘이 아닌 줄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거기에는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고 수고로울 게 없다, 아무런 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러 ‘올 것도 없고 갈 것도 없다’, ‘온 바도 없고 간 바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래가 빨래를 합니다.
빨래를 한다는 것은 더러운 것을 빨아서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걸 보고는 ‘부처님도 분별을 하시네, 더럽고 깨끗한 것이 없다면 그냥 입고 계시지 빨기는 왜 빠는가?’ 라고 합니다.
더럽고 깨끗한 것을 분별해서 더러운 것은 버리고 깨끗한 것을 취하는 게 빨래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깨끗한 것은 선호하고 더러운 것은 멀리하지만, 여래는 더럽고 깨끗한 분별이 없습니다.
분별이 없기 때문에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버린다 할 것이 없습니다.
여래가 빨래를 하는 것은 더러워서 못 입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하는 겁니다.
초기에 대중(수행자)들은 시체를 쌌던 옷을 벗겨서 그냥 입었습니다.
그걸 본 의사 지바카는 ‘병에 걸리니 빨아서 햇빛에 말려 입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들으니 옳은 소리여서 부처님께서 그럼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옷을 빨아서 입는 것은 부처님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의사 지바카의 건의로 시작한 것입니다.
수행자들은 냇가에서 목욕을 했는데 비구니들도 비구들과 똑같이 그렇게 했습니다.
당시엔 주인 없는 여자, 즉 창녀같은 사람들만 냇가에서 목욕을 했으니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한 여신도가 부처님께 건의했습니다.
‘여승들이 목욕을 할 때는 울타리를 친 안에서 목욕을 하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부처님이 ‘그렇게 해라’ 하셨습니다.
비구니는 신성하고 창녀들은 지저분한 여자들이니 섞이면 안 된다 이런 생각으로 구분을 하셨을까요,
남자 몸은 보여도 되고 여자 몸은 보이면 안 된다 이래서 가리고 목욕하라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다만 처지와 상황이 그렇고, 그런 건의가 합당하니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우리 기준으로 이러쿵저러쿵 하면 그것은 여래의 설하신바 뜻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여래는 걸어가고 걸어오는 게 아니다, 여래는 간 바도 없고 온 바도 없다,
선을 그으니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갔다는 말이 있지 선이 없으면 그런 말도 필요 없다,
여래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분별의 경계선을 두니까 갔다 왔다 이런 개념이 생기는 것이다,
이 분별의 경계선을 거두어버리면 움직이기는 하지만 갔다 할 수도 없고 온다 할 수도 없다,
그래서 간 바도 없고 온 바도 없다, 즉 일체의 분별이 끊어졌다 이런 얘기입니다.
수보리야, 만약에 어떤 사람이 말하되 부처님께서 온다 간다 앉는다 눕는다라고 말하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함이다,
왜냐하면 여래라고 하는 것은 좇아 온 바도 없고 또한 간 바도 없을 새
이런 까닭으로 여래라 이름 하느니라.
제29분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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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 위의가 적정하니
수보리 약유인언(須菩堤 若有人言) : 수보리여!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 약래약거약좌약와(如來 若來若去若坐若臥) : 여래가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고 하면,
시인 불해아소설의(是人 不解我所說義) :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바 뜻을 알지 못함이니라.
하이고 여래자(何以故 如來者) : 왜냐하면 여래란
무소종래 역무소거(無所從來 亦無所去) : 오는 바가 없으며 가는 바가 없으니
고명여래(故名如來) : 이름이 여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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