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 얻을 바 없으니
수보리 백불언 세존(須菩堤 白佛言 世尊) :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심은
위무소득야(爲無所得耶) : 얻은 바가 없는 것입니까?
불언 여시여시수보리(佛言 如是如是 須菩堤)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이번엔 부처님이 묻지도 않았는데 수보리가 제대로 알아서 대답했습니다.
부처님이 얼마나 기뻤으면 그렇고 그러하다 이렇게 했겠어요.
아어아뇩다라삼먁삼보리 내지(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 乃至) :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내지
무유소법가득(無有少法可得) : 작은 법도 가히 얻은 것이 없으므로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 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하느니라.
여래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사실은 얻은 바가 없는 것이지요? 라고 하니까
그렇고 그러하다 수보리야 라고 부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만약 내가 최상의 깨달음을 구할 때 조금이라도 어떤 법을 얻었다 한다면 그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다,
그런 것을 얻은 바 없기에 그 이름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느니라,
한 법도 얻을 바가 없다,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무지역무득,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을 얻었다 할 것도 없다
이무소득고,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한 법도, 그 어떤 것도 얻을 바 없어야 된다,
바라는 것 없어야 되고 구하는 것도 없어야 된다, 상을 짓지 말아야 된다,
그래서 무법가득분입니다.
제22분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제22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 얻을 바 없으니
수보리 백불언 세존(須菩堤 白佛言 世尊) :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심은
위무소득야(爲無所得耶) : 얻은 바가 없는 것입니까?
불언 여시여시수보리(佛言 如是如是 須菩堤)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아어아뇩다라삼먁삼보리 내지(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 乃至) :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내지
무유소법가득(無有少法可得) : 작은 법도 가히 얻은 것이 없으므로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 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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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 청정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다
부차수보리(復次須菩堤) : 또한 수보리여!
시법 평등 무유고하(是法 平等 無有高下) :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 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느니라.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 아가 없고 인이 없고 중생이 없고 수자가 없음으로써
수일체선법(修一切善法) : 일체 선법을 닦으면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아무런 분별도 없이 행했을 때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수보리 소언선법자(須菩堤 所言善法者) : 수보리여! 말한 바 선법이라는 것은
여래설 즉비선법 시명선법(如來說 卽非善法 是名善法) : 여래가 선법을 말함이 아니라 그 이름이 선법이니라.
착한 법이라는 것은 착한 법이라 할 것이 없을 새 이름이 착한 법이니라,
그러니까 어떤 상도 지으면 안된다 이런 뜻입니다.
정심행선분, 마음을 깨끗이 하여 선을 행한다,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란 그 마음에 어떤 상도 짓지 않는 것을 이름한다,
아무런 모양과 형상이 없고 아무런 기대도 바람도 없는 그런 마음으로
일체중생을 위하여 마음을 내고 행하는 것이 바로 선법을 행하는 것이다,
부처는 중생을 이렇게 교화하고 우리는 타인을 이렇게 도와주어야 한다,
여러분들이 자식에게나 부모에게나 남편에게나 아내에게 이렇게 행해야 한다,
근데 우리는 그렇지가 않고 늘 요구조건이 많고 늘 뭔가를 얻으려고 한다,
여러분들이 절에 올 때면 조건이 붙어있고 상을 짓고 뭔가를 얻으려 하고,
스님 또한 신도들을 만나면 쓸모가 있을까 이렇게 뭔가 얻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바라본다,
그런 눈으로 도인을 찾으려하니 도인이 보이지 않는다,
진짜 도인은 중생이 보기에 맨날 손해나는 짓이나 하고 헛다리만 짚어 바보 같아 보일 뿐입니다.
옛날에 땅이 많아서 절 식구들이 다 먹고도 1년에 백 석쯤 남는 부자 절이 있었습니다.
어느 해 극심한 흉년이 들어서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많이 굶주렸어요,
양식이 없으니 쌀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농토 값은 바닥 모르고 떨어져,
쌀 한 가마니와 논 한 마지기를 맞바꿀 정도였으니 쌀 백가마니를 풀면 논 백마지기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절의 조실스님은 그런 논을 사는 게 아니라 못 쓰는 하천부지를 개간했습니다.
공사를 다 마치니 논이 열 마지기 나왔지만 노임으로 쌀 백 가마니를 다 써버렸습니다.
논 백 마지기 살 돈으로 열 마지기밖에 못 만들었으니 큰 손실이다,
이렇게 젊은 스님들이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큰 문제 없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 논을 팔라고 하자 노스님은 시세대로 쌀 열 가마니를 받고 팔아버렸습니다.
그러니 난리가 났어요, 젊은 스님들이 떼로 몰려와서 왜 그랬는지 따지니 조실스님은 태연히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왜 그리 야단이냐, 논은 논대로 있고 쌀은 열 가마니나 생기지 않았느냐!'
네 논이다 내 논이다 라는 생각이 없으니 논은 논대로 있고 쌀은 열 가마니 생겼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불법의 도리는 우리들의 사량분별로만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 땅 붙여먹고 살던 사람들이 토지개혁 할 때 그 땅을 차지해버린 경우가 많이 있었지요,
요즘 그거 찾는다고 많이들 재판하고 하는 데 그런 것 굳이 찾을 필요가 있을까요?
세상살이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른 겁니다.
그렇다고 보시금을 노름판에 흩어버려도 될까요? 근데 그런 건 또 잘합니다.
스스로 아껴쓰고 검소하게 사는 것과 나눠 가질 것을 중생에게 베푸는 것은 성격이 다른데 이것을 거꾸로 합니다.
옛날에 이름만 대면 잘 알 수 있는 노스님이 부산의 어느 절에 계실 때입니다.
하루는 한 부잣집 신도가 와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49재를 지내달라고 하는거요,
잘 지내달라고, 몇 번이나 잘 지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재비로 쌀 백 석을 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 쌀 백 가마니면 엄청나게 큰 돈입니다.
그렇게 재비를 내면서 재를 잘 지내주십시오 하고 큰 스님께 몇 번이나 부탁했어요,
그냥 재 지내주십시오 했으면 큰 스님이 관여를 안 했을텐데,
잘 지내달라고 몇 번을 부탁하니 큰 스님이 알았다 내가 잘 지내주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보통 재는 주지가 알아서 지내는데 큰스님께 특별히 부탁하니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재를 요즘처럼 주일마다 지내는 것이 아니라 49재 때 딱 한 번 지냈습니다.
그게 법에 어긋나나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재는 49일 째 지내는 겁니다.
노스님은 쌀 백 가마니 돈을 받아가지고 그 날부터 여기저기 다니면서 다 쓰십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줘버리고, 거지가 와서 달라고 해도 줘버리니 주지스님은 조마조마합니다.
저 돈으로 재물도 사야 되고 절에서도 좀 써야 하는 데, 그러나 스승이니 말도 못하고 끙끙 앓습니다.
49일이 다가오니 주지스님은 노스님께 여쭙니다, ‘스님, 재 어떻게 준비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노스님은 ‘이번 재는 내가 지내기로 했으니 너는 신경쓰지 마라’고 답하십니다.
그러고는 남은 돈 몇 천 원을 가지고 시장에 가서 할머니들이 파는 데로 갑니다.
콩나물 500원어치, 고사리 500원어치 또 다른 나물 500원어치, 이렇게 반찬 너덧 가지 사오셔서,
손수 부엌에서 요리해서 올려놓고는 아침 예불을 끝낸 뒤 죽비 세 번 치고 참선 좀 하다가 나오십니다.
그러니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아무도 49재를 끝냈다고 생각 안합니다.
그날 아침 49재를 부탁한 보살이랑 다른 일가친척들이 많이 왔습니다.
아무리 봐도 49재를 지내려 하기는커녕 지낸 흔적도 없습니다.
주지스님은 큰 스님이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고 하셨으니 아무 말도 안하고 있다가,
사람들이 ‘재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서야 ‘큰 스님이 지내셨다’고 대답합니다.
큰스님한테 가서 물으니 ‘응, 내가 아침에 재는 잘 지냈느니라. 부엌에 가면 먹다가 남은 반찬 있다,
음복은 해야 하니 그거나 한 젓가락씩 먹고 가거라’라고 대답합니다.
그래 주지스님한데 가서 어떻게 된거냐고 물으니 특별히 한 것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니 난리가 났습니다. 보살(여신도)은 화가 나서 펄쩍펄쩍 뜁니다.
재비를 한두 푼 낸 것도 아니고, 노스님께 특별히 부탁도 했는데 재를 지내지도 않았으니 화가 날만도 합니다.
옆에서 바라만 보고 있던 거사(남신도)가 어찌 된 영문인지 주지스님께 다시 물었습니다.
노스님은 아무 말도 안하고 옆에만 계시고, 주지스님이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그 거사가 가만히 듣더니, ‘큰 스님 하신 게 옳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재는 큰 스님께서 잘 지내주셨으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주지스님께 쌀 몇 가마 값을 다시 드리면서 ‘가족들이 섭섭해 하니까 다시 좀 지내주십시오’ 했답니다.
재를 잘 지냈을까요 못 지냈을까요?
배고픈 일체 중생에게 다 나눠줬다,
특별히 잘 지내달라고 자꾸 부탁을 하니 특별히 최고의 공덕이 되도록 잘 지내줬다,
보통 보면 절에 다니기는 여자들이 열심히 다니는데, 머리 돌아가는 것을 보면 늘 모자랍니다,
왜 그럴까? 상에 집착해서 그럽니다.
늘 형상을 갖고 자기 소견머리로 자꾸 뭘 보니까 그런 것입니다.
정말 신심있는 불자라면 큰 스님이 그렇게 했다면 왜 그랬을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지요,
그런데 자기 소견머리로 보고 자기 맘대로 안 되었다고 길길이 뜁니다.
이해가 안 되면 물어봐야 하는데, 그냥 ‘허튼 짓 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허튼 짓 했다는 한 생각을 내는 순간 그것은 정말 허튼 짓이 되어버립니다.
자기 스승을 허튼 짓 했다하고 규정을 해버리면 자기가 뭐가 됩니까?
그 절에 다닐 필요 없고, 자기가 지금까지 믿고 살아온 인생이 쓸데없는 것이 되는겁니다.
한 생각 잘못 일으키면 그 괴로움의 과보는 도로 자기에게 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제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 청정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다
부차수보리(復次須菩堤) : 또한 수보리여!
시법 평등 무유고하(是法 平等 無有高下) :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 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느니라.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 아가 없고 인이 없고 중생이 없고 수자가 없음으로써
수일체선법(修一切善法) : 일체 선법을 닦으면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수보리 소언선법자(須菩堤 所言善法者) : 수보리여! 말한 바 선법이라는 것은
여래설 즉비선법 시명선법(如來說 卽非善法 是名善法) : 여래가 선법을 말함이 아니라 그 이름이 선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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