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15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섯 가지의 눈을 갖고 계십니다.
우선 육체의 눈(육안)이 있어, 보고 냄새 맡고 맛보고 듣고 만져보고 구분하십니다.
이렇게 감각기관이 있어 갖가지를 알 수 있지만 그 대상에 집착하지 아니하시고,
어떤 상도 짓지 아니하고 거기 사로잡히지도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십니다.
또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나 성격 등도 다 알 수 있는 천안통만이 아니라,
천이통 타심통 신적통 숙명통 등도 갖고 있어 보이지 않는 것 까지도 다 아십니다.
더 나아가서 진리의 눈, 혜안을 갖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꿈같은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변하며, 거기에는 나라고 할만한 그 어떤 것도 없다,
즉 ‘모든 형상은 허망한 것’임을 꿰뚫어 보는 지혜의 눈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집착하지 아니하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언제나 자유롭고 괴로움이 없는 안온한 상태에 머물러 계십니다.
부처님은 법안, 법의 눈도 갖고 계십니다.
부처님은 사람으로서의 정직하고 성실한 면을 갖고 계시고, 하늘의 신들이 갖고 있는 갖가지 능력도 갖고 계실뿐 아니라,
청정한 수행생활을 하시면서 중생의 고통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몸을 나투어서 중생과 함께 살아가는 보살의 모양도 갖고 계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무런 함이 없는 속에서 갖가지를 행하시는 그러한 여래의 경지, 부처의 눈도 갖고 계십니다.
일체 중생이 바로 자신이며 자신이 곧 일체중생이다,
주객이 분리되어있지 않으시니 어떤 행을 하시든지 ‘나다’ 하는 생각이 없으시다,
우리는 뭘 하려면 의도하고 의지를 발하고 노력해야 되지만, 부처님은 그러지 아니하신다,
거울에 물건이 오면 비치듯이 중생이 오면 그냥 법이 설해지는 것이지 어떤 의도를 갖고 설하는 게 아니다,
한 물건도 그 누구의 것이 될 수 없다, 즉 내거라 할 것이 없다는 걸 알고 계시기 때문에,
삼천대천세계를 보시하더라도 ‘내가 누구를 위해서 주었다’ 이런 생각을 안 하신다,
중생에게 갖가지 이익을 베풀 때에도 그 어떤 바램도 없다,
중생의 아픔을 하나하나 살피고 대자대비심을 내지만 그 어떤 중생에도 집착하지 않으신다,
다 보살펴 어루만지시면서도 그것이 꿈과 같음을 아신다,
여래는 세계를 나누어서 보지 않고 연관된 하나로 본다,
사람의 인격을 이런 인격 저런 인격으로 나누지 않는다,
그 분은 한 인간으로서도 성실하시고, 한 신으로서도 위대한 신이며,
한 수행자로서도 청정한 수행자이고, 한 보살로서도 만 중생을 구하는 보살이시고,
그 모든 것을 갖추시고도 그러한 것들에 집착 또한 떠나계신다,
그래서 부처님을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여래를 말할 때 자기 눈에 비친 어느 한 모습만 보고,
부처님은 훌륭한 인간이다, 신과 같으신 분이다, 청정한 수행자다, 보살의 화현이다 이렇게 말하는 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남방불교에서는 청정한 수행자로서의 인격만 보기 때문에 부처님은 아라한의 가장 모범적인 분이라 하고,
대승불교에서는 오직 보살로 보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을 부처님의 화현이라 하고 부처님을 천백억 화신의 하나로 보는데,
그런 것들은 단지 부처님의 한 모습일 뿐입니다.
이런 부처님을 우리는 열 가지 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래(如來) : 온 바도 없고 간 바도 없는 여여한 분
응공(應供) : 마땅히 공양받을 자격이 있으신 분
정변지(正변智) : 바르고 보편적인 지혜를 깨달으신 분
명행족(明行足) : 아는 것과 실천이 구족하신 분
선서(善逝) : 고해의 바다를 훌쩍 뛰어넘어 저 언덕에 이르신 분
세간해(世間解) : 중생의 아픔을 모두 아시는 분
무상사(無上士) :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선비
조어장부(調御丈夫) : 중생의 갖가지 번뇌를 조복 받을 수 있는 분
천인사(天人師) : 사람과 신들의 스승
불(佛), 세존(世尊) : 깨달으신 분, 가장 존귀한 분
그분은 온 바도 없고 간 바도 없는 여여하신 분이라 해서 여래,
그분은 모든 번뇌를 다 없애고 열반적정에 드신 분이니 그 어떤 공양을 받아도 아무런 빚이 되지 않는 분이다 해서 응공,
그분은 바른 지혜, 두루 보편적인 지혜를 다 알고 계시는 깨달으신 분이라 해서 정변지,
그분은 아는 것과 실천이 늘 하나로 같으시다, 둘을 다 갖추고 계신다 해서 명행족,
그분은 모든 고해의 바다를 훌쩍 뛰어넘어서 저 언덕에 이르신 분이다 해서 선서,
그분은 세상의 모든 일, 중생의 고통과 아픔을 모두 다 아시는 분이다 해서 세간해,
그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선비다, 그 분보다 더 높은 분은 없다 해서 무상사,
그분은 중생의 갖가지 번뇌를 다 조복받고 중생을 괴로움의 바다로부터 건져낼 수 있는 힘이 있다 해서 조어장부,
그분은 사람과 신들의 스승, 만생명의 스승이시다 해서 천인사,
그분은 깨달으신 분으로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다 해서 불, 세존이라 합니다.
이런 부처님께는 오근이 한 몸에 붙어 있듯이 오안이 한 몸에 있습니다.
부처와 중생도 하나고 번뇌와 보리도 하나다,
번뇌 떠나 보리가 따로 있고 중생 떠나 부처가 따로 있고, 사바세계 떠나 정토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제18분 일체동관분에서 말하듯 한 몸으로서 같이 보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어떤 것을 떼내어 그것만으로 모양을 짓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체 중생을 구제하되 구제한다는 생각도 없고 구제해준다는 생각도 없고 불쌍하다는 생각도 없다,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하기는 하는데 구제했다는 구한다는 그 어떤 상도 짓지 않고 행한다,
‘다만 할 뿐이다’, 그것이 무위의 행입니다.
그러니 수보리가 자연히 의심이 들지요,
아무 것도 바라는 것도 없고 할 바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복을 지을 수 있고 복을 받을 수가 있으며 어떻게 중생을 교화하느냐,
그러자 부처님께서 어떻게 너는 함이 있는 행과 거기에 따른 한계가 있는 유루복만 생각하느냐,
바로 함이 없는 행과 한량이 없는 복인 무루복을 알지 못하는가,
지난 시간에 여기까지 했고, 오늘은 제19분 법계통화분부터 하겠습니다.
제19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 : 법계를 교화하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堤 於意云何) :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약유인 만삼천대천세계칠보 이용보시(若有人 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 만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히 하여 보시하면
시인 이시인연 득복다부(是人 以是因緣 得福多不) :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써 복 얻음이 많지 않겠느냐?
여시 세존(如是世尊) :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차인 이시인연 득복심다(此人 以是因緣 得福甚多) : 그 사람은 이 인연으로써 복 얻음이 매우 많습니다.
수보리 약복덕유실(須菩堤 若福德有實) : 수보리여! 만일 복덕이 실로 있다면
여래불설 득복덕다(如來佛說 得福德多) : 여래가 복덕 얻음이 많다고 말하지 않으련만,
이복덕 무고(以福德 無故) : 복덕이 없으므로
여래설 득복덕다(如來說 得福德多) : 여래가 복덕이 많다고 말하느니라.
우리가 보면 복덕이지만 깨달음의 세계에서 보면 실로 복덕이라 할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 하늘의 태양은 뭇 생명에게 차별없이 내리 쪼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에너지의 근원은 태양입니다.
식물은 탄소동화작용을 통해 태양에너지를 담고, 동물은 식물을 먹어 에너지로 사용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다 태양에너지를 쓰는 것이니 태양은 복을 엄청나게 짓는 것이지만,
정작 그 태양은 아무런 바람도 없이 그냥 차별없이 비출 뿐입니다.
저 태양빛은 누구 것도 아니고, 각 생명은 그 태양에너지를 자기 나름대로 받아서 그걸로 생명을 영위할 뿐입니다.
부처님은 ‘나의 가르침은 빛과 같다, 와서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숨겨진 비밀도 아니고 몰래 전해주는 비밀도 아닙니다.
눈을 감고 있어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지 눈만 뜨면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조건에서도 보는 사람이 있고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똑같이 법문을 해도 결과가 다 달리 나타납니다.
같은 법문을 듣고도 해탈의 길로 가는 사람이 있고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건 각자 자기의 근기를 따라서, 자기 업식을 따라서 달리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하도록 하거나 그렇게 조정하는 게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 태양빛이 누구의 것도 아니듯이 부처님의 말씀도 누구의 것도 아닌데,
그것은 누구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꿈에서 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꿈과 같은 줄 알면, 그것이 가치 있다는 생각이 꿈같은 것인 줄 알면,
그런 인연(원인)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19분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제19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 : 법계를 교화하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堤 於意云何) :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약유인 만삼천대천세계칠보 이용보시(若有人 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 만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히 하여 보시하면
시인 이시인연 득복다부(是人 以是因緣 得福多不) :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써 복 얻음이 많지 않겠느냐?
여시 세존(如是世尊) :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차인 이시인연 득복심다(此人 以是因緣 得福甚多) : 그 사람은 이 인연으로써 복 얻음이 매우 많습니다.
수보리 약복덕유실(須菩堤 若福德有實) : 수보리여! 만일 복덕이 실로 있다면
여래불설 득복덕다(如來佛說 得福德多) : 여래가 복덕 얻음이 많다고 말하지 않으련만,
이복덕 무고(以福德 無故) : 복덕이 없으므로
여래설 득복덕다(如來說 得福德多) : 여래가 복덕이 많다고 말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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