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5. 금강경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18-1 일체동관분

상원통사 2018. 7. 3. 21:40

금강경 14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참으로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수보리가 여쭈었더니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일체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원을 세워라,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아끼며, 죽어가는 모든 생명을 불쌍히 여기고 연민하여 그것을 다 살려내겠다고 마음을 내라,

사랑 받으려 하지말고 사랑하려고 하고, 얻으려 하지말고 주려고 하고, 의지하려 하지말고 뭇중생의 의지처가 되어주어라,

이렇게 마음을 낸다고만 해서 보살이라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실제로 다 행해야 된다,

그렇게 마음을 내고 실천을 하게 되면 모든 괴로움은 사라지고 온갖 속박은 끊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을 내고 이렇게 실천을 한다고 해서도 보살이라 할 수가 없다,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 내가 중생을 제도했다 하는 생각마저도 버려야 한다,

실로는 한 중생도 멸도를 얻은 바가 없다 하라,

내가 너를, 내가 당신들을, 내가 중생을 위하여, 이런 생각을 내지 마라,

깨달음을 얻고다 할 때에도 깨달음이니 깨달음을 얻었다느니 이런 생각도 내지 마라,

더 나아가서는 불토를 장엄한다 하는 이런 생각도 내지 마라,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고, 중생의 괴로움이 없는 그런 정토세계를 이루는 원을 세우고,

그렇게 한량없는 보살행을 하더라도 내가 중생을 위하여, 내가 정토를 건설한다 이런 생각도 내지 마라,

그 어떤 것이든 ‘내가’ 하면 벌써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사로잡히는 것이 된다,

그 어떤 곳에도 ‘아’가 없음을 통달해야 진짜 보살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수보리는 ‘나’라 할 것이 없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엇으로 중생을 볼 수 있을까,

어떻게 중생의 갖가지 고통을 다 알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신통자재한 갖가지 눈이 있어서 중생을 다 보고 중생을 다 제도한다 하지만,

중생이 없어 제도할 바도 없고 제도하는 나도 없다면 부처는 무엇으로 중생을 보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나와 중생은 둘이 아니다, ‘내가 중생을’ 하면 벌써 둘로 나뉜다,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으로, 구하는 자와 구하는 대상으로 이렇게 나뉘게 된다,

주객이 나뉜다는 것은 두 가지 모양을 짓는 거다, 두 가지 모양을 짓는 것은 상에 사로잡히는 것이 된다,

그렇게 일체가 하나(同體)임을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발에 가시가 박히면 눈이 가시를 찾고 손이 뽑아내듯 한 몸으로서 아픔을 느끼고 그것을 치료하는 행위,

거기에는 둘이라는 생각도 없고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도 없고 어떤 바랄 것도 없는,

그러한 세계가 바로 진여의 세계 부처님의 세계다,

즉 일체동관, 일체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부처님의 세계입니다.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 일체를 하나로 보니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육안부(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肉眼不) :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육안이 있느냐?

여시 세존 여래유육안(如是 世尊 如來有肉眼)                  :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육안이 있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천안부(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天眼不) :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천안이 있느냐?

여시 세존 여래유천안(如是 世尊 如來有天眼)                  :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혜안부(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蕙眼不) :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혜안이 있느냐?

여시 세존 여래유혜안(如是 世尊 如來有蕙眼)                  :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법안부(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法眼不) :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법안이 있느냐?

여시 세존 여래유법안(如是 世尊 如來有法眼)                  :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법안이 있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불안부(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불안이 있느냐?

여시 세존 여래유불안(如是 世尊 如來有佛眼)                  :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불안이 있습니다.

여기서 ‘천안’이란 보지 않고도 볼 수 있는 그런 힘, 그런 신통력을 말하고,

‘법안’은 일체 만법의 그 가지가지 변화무쌍한 것을 다 그대로 꿰뚫어보는 눈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이렇게 다섯 가지 눈(五眼, 오안)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육체의 눈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신통의 눈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보살의 눈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부처의 눈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육체의 눈을 갖고 있는 사람들, 하늘의 눈을 갖고 있는 신들, 지혜의 눈을 갖고 있는 성문연각의 성인들,

법의 눈을 갖고 있는 보살, 부처의 눈을 갖고 있는 부처님이 다 다른 존재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기서 ‘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무엇인가를 안다’는 뜻입니다.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고,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감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 몸에는 감각작용을 일으키는 근이 있고 바깥에는 그 대상이 되는 경이 있습니다.

만져보고 사물을 파악할 수 있는 감각기관을 신근(身根), 그 대상을 촉(觸)이라 하고,

맛보고 사물을 파악할 수 있는 감각기관을 설근(舌根), 그 대상을 미(味)라 하고,

냄새 맡아 사물을 파악할 수 있는 감각기관을 비근(鼻根), 그 대상을 향(香)이라 하고,

소리를 들어서 뭔가 파악할 수 있는 기관을 이근(耳根), 그 대상을 성(聲)이라 하고,

보고서 뭔가 알 수 있는 기관을 안근(眼根), 그 대상을 색(色)이라 합니다.

이렇게 우리 몸에는 오근(五根)이 있고, 그 바깥 세상에는 오경(五境)이 있습니다.

여래께서 육체의 눈(육안)이 있느냐는 말은 다섯 가지 감각기관(오근)이 있느냐는 말인데,

부처님도 우리와 똑같이 손에 촉각이 있고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는 감각이 있습니다.

그 기능이 특별히 뛰어나거나 없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와 똑같고 그걸 통해서 갖가지를 다 느끼고 계십니다.

 

여래유천안부, 여래는 천안을 갖고 계시느냐,

천안이란 이 다섯 가지 감각을 통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어떤 능력을 말합니다.

육체의 눈을 통하지 않고도 뭔가를 아는 것, 천안 천의 신족 숙명 다심 이게 다 천안에 속합니다.

부처님은 육체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만이 아니라, 우리가 갖지 못한 특별한 능력(신통력)도 갖고 계십니다.

    

 

(18-2강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