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5. 금강경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18-2 일체동관분

상원통사 2018. 7. 5. 22:06

(~~ 제18-1강에서 계속)

 

 

여래유혜안, 여래는 지혜의 눈을 갖고 있느냐,

여시 여래유혜안,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지혜의 눈을 갖고 계십니다.

갖가지 신통의 힘이 있을 지라도 ‘선한 것도 없고 악한 것도 없다’는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육체의 눈으로 보면 아름답고 추하고 선하고 악하다 하는 갖가지 분별을 일으킵니다.

선하고 악한 것도 없고 아름답고 추한 것도 없고 깨끗하고 더러운 것도 없는 것이 존재의 실상이라는 것을 아는 눈이 혜안, 지혜의 눈입니다.

이것은 신이라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고, 오로지 깨달아야만 알 수 있습니다.

지혜의 눈이 열리면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인 줄, 제법이 공한 줄을 알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하다보면 아픈 몸이 나을 수도 있고 오래 살 수도 있고 듣지 않고 들을 수도 있고,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도 있고 사람의 전·후생을 알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목표로 하면 안 된다,

그런 것은 있든지 없든지 지혜의 눈을 여는 사람에게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 것은 있어서 좋은 것도 아니고 없어서 나쁜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은 있을 수도 있고 심신을 단련하면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수행하다가 그런 신통의 힘이 생길지라도 그걸 가지고 도(道)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게 없다고 도력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그것이 수행의 기준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여래는 육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여래는 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여래는 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육안과 천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는 것을 혜안으로는 볼 수가 있다,

혜안을 갖고 볼 수 있다고 육안과 천안이 필요없다는 것도 아니다,

그게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을 따지는 것은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성인의 류에 드는 것은 혜안부터 입니다.

천안을 갖고는 성인의 류에 들지 못합니다.

갖가지 신통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에 번뇌가 있을 수 있고 질투심이 있을 수 있고,

원수 갚을 생각이 있을 수 있고 재물에 대한 집착이 있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갖고 거기에 끄달리는 것에 대해서 주의를 주셨고,

마찬가지로 신통에 끄달리는 것에 대해서도 늘 주의를 주셨습니다.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그것을 넘어서서 지혜의 눈이 열려야 번뇌가 끊어진다.

눈이 먼 사람은 손으로 더듬어 만져보아야 겨우 알 수 있고,

눈이 있는 사람은 손으로 만져서는 알 수 없는 세계도 알 수 있지만,

천안이 열리면 눈으로 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까지도 알 수가 있다,

그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성질이 어떤지, 바로 보고 아는 것이 천안이다,

그 천안을 가지고 있다 해서 그 사람을 온전하다고 하느냐, 그렇지 않다,

천안을 가지고는 그가 경계에 부딪힐 때 화를 낼지 안 낼지는 알 수가 없다,

그건 혜안이 열려야 한다,

 

여래유혜안, 여래는 혜안을 갖고 있느냐,

여시 여래유혜안, 그렇습니다, 여래는 혜안을 갖고 계십니다.

모든 법이 다 공한 줄 아는 것이 혜안이다,

선도 악도 없고,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고, 아름다움도 추함도 없고, 늙은 것도 젊은 것도 아닌,

그것이 존재의 참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바로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난다,

경계에 휩쓸려 희노애락하는 이런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안온한 세계에 나아가게 된다,

여기서부터 성인의 류에 든다고 말할 수 있다.

 

여래유법안, 여래는 법안을 갖고 있느냐,

여시 여래유법안, 그렇습니다, 여래는 법안을 갖고 계십니다.

제법은 공하지만, 공한 가운데서 인연을 따라 갖가지가 현현한다,

제법이 공한 줄 아는 것이 혜안이고, 갖가지가 나타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법안이다,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아 동쪽이다 할 수도 없고 서쪽이다 할 수도 없다,

이렇게 서울 가는 길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 혜안이고,

서있는 위치에 따라 천 가지 만 가지 길이 있다는 것을 훤히 아는 것을 법안이라 한다,

바로 법안이 열려야 보살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문연각은 혜안은 있지만 법안은 없습니다,

방파제 안에서 보트 타고 편히 지낼 수는 있지만, 파도치는 넓은 바다에서 마음껏 뛰놀지는 못하고,

자기 혼자 쪽배 타고 강을 건널 수는 있지만 배가 없는 뭇중생을 실어 나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법안이 열린 사람은 중생들을 큰 배에 싣고 큰 바다를 지나갈 수 있습니다.

노을 저어야만 건너는 줄 알았더니 큰 배를 가져와 노 저을 줄 모르는 사람도 태워서 간다,

법안이 열린 보살만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래유불안, 여래는 불안을 갖고 있느냐,

여시 여래유불안, 그렇습니다, 여래는 불안을 갖고 계십니다.

부처의 눈(불안)이라는 것은 일체가 다 하나임을 아는 것입니다.

나 따로 있고 중생 따로 있고, 나만 건너간다든지 중생을 데리고 간다든지 그런 게 아니다,

중생과 ‘나’가 별개가 아니다, 중생이 곧 내 몸이니 거기에는 구제한다 할 것도 없다,

내가 그들을 데려간다든지 그들을 놔두고 나만 간다든지 이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한 몸이니 가면 같이 가고 못가면 같이 못 가는 것이다.

 

여래는 불안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눈도 다 가지고 있는데,

사실은 육안도 천안도 혜안도 법안도 불안도 다 분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감각기관이 한 몸에 붙어있는 것처럼

육안이든 천안이든 혜안이든 법안이든 불안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다.

우리는 그런 눈이 열리지 않았기에 삶의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수행자에게 귀가 있으면 좋지만 잘 듣는다는 것이 수행하는 데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처럼,

천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수행하는 데 크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열리지 않은 자가 볼 때는 굉장한 것 같아 거기에 매달리게 된다,

 

여러분들이 공부를 할 때에도 바로 이런 신통력에 빠져서는 안 된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청정하게 한다는 것은 시력이 좋게 하고 귀가 잘 들리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것도 포함 되지만 거기에 집착하거나 망념에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신통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해탈의 길로 가는 것과 거리가 멀다,

 

음식을 먹을 때 맛있으면 좋지만 맛없다고 큰 문제되는 것은 아니듯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안도 있는 게 좋지만 없다고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육안이 청정하다는 것은 오감을 잘 느끼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천안이 청정하다는 것은 신통력이 자재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신통력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법안이 청정하다는 것은 제법이 공한 줄 안다 하더라도 이것이 진리라고 하는 법집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제18-3강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