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5. 금강경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13-2 여법수지분

상원통사 2018. 2. 11. 23:33

(~~ 제13-1강에서 계속)

 

 

수보리 어의운하(須菩堤 於意云何)                 :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 소유미진(三千大千世界 所有微塵)      : 삼천 대천 세계에 있는 가는 티끌이

시위다부(是爲多不)                                   : 많다고 하겠느냐?

티끌 한 웅큼만 해도 그 개수는 엄청나게 많은데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티끌은 헤아릴 수 없이 많겠지요.

 

수보리언 심다 세존(須菩堤 言甚多 世尊)    :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 제미진(須菩堤 諸微塵)             : 수보리여! 모든 가는 티끌은

여래설비미진(如來說非微塵)                : 여래가 가는 티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시명미진(是名微塵)                         : 그 이름이 가는 티끌이니라.

여래설세계 비세계(如來說世界)             : 여래가 세계를 말한 것은 세계가 아니라

시명세계(是名世界)                         : 그 이름이 세계이니라.

갑자기 왜 티끌이 나오고 세계가 나오느냐,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을 세계라 했고, 가장 작은 것을 미진이라 했습니다.

가장 크다는 의미로서의 세계와 가장 작다는 의미로서의 티끌은 이미 실체가 부여되어 있다, 절대화 되어있습니다.

근데 부처님께서는 이런 것도 절대화 하면 안 된다고 말하십니다.

원자나 분자에 비하면 티끌은 태산처럼 큰 것에 속하고,

저 무한한 우주에 비하면 세계라는 것은 티끌만큼 작은 것에 속합니다.

즉, 티끌이라 하지만 티끌이라는 실체도 없고 세계라 하지만 세계라는 실체도 없다,

작다 하지만 작다 할 것도 없고 크다 하지만 크다 할 것도 없다,

다만 이름하여 작다고 부르고 크다고 부르고, 티끌이라 부르고 세계라 부를 뿐입니다.

티끌에도 실체가 없고 세계에도 실체가 없고, 작다에도 실체가 없고 크다에도 실체가 없는 것이다,

즉 어떤 상도 지어서는 안 된다, 모든 상은 다 공하다, 상이라고 할 게 없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공간에 대한 우리들의 잘못된 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면 일미진중 함시방, 티끌 안에 시방세계가 포함이 되어있다고 하여 우리들의 상식을 확 뒤집어버립니다.

세계 속에 무수한 티끌이 들어있어야지 티끌 속에 세계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크기에 있어서의 절대성마저도 깨트리며 티끌 속에 세계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티끌이 모여서 이루어진 세계가 다시 티끌 속에 들어있다,

이 말은 법이 공하다할 때는 성립하지만, 작은 것 큰 것의 실체가 있다고 하면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堤 於意云何)                    :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이삼십이상 견여래부(可以三十二相 見如來不)      :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불야 세존(不也 世尊)                                  :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불가이삼십이상 득견여래(不可以三十二相 得見如來)  :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하이고 여래설 삼십이상(何以故 如來說 三十二相)     : 왜냐하면 여래가 말씀하신 32상은

즉시비상 시명삼십이상(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 곧 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32상이기 때문입니다.

32상이란 부처님의 몸매 가운데서 다른 사람과 다른 32가지 특징을 말합니다.

여러분도 앞에 있는 불상을 보면서 벌써 몇 가지는 알 수 있습니다.

양 미간에 흰 털이 말려서 있고, 귀가 다른 사람보다 길고, 목에 주름이 세 개가 있고,

팔이 길어서 무릎까지 내려오는 등 몸의 각 부분에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만 보면 부처인지 아닌지 알 수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금강경 제26분에는 이런 구절이 있지요,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만약 모양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이요 진실로 부처님을 볼 수 없다,

이렇게 생긴 게 부처다, 기도를 하는 중에 부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들었다,

이렇게 부처를 구하는 것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빛을 봤다든지 어떤 형상으로 나타났다 이런 것을 본 것이라 하고,

산상에 가서 기도를 하다가 무슨 소리를 들었다 이것을 가지고 친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런 것들을 망상이라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육근경계에 집착해서 생겨난 것이고 형상에 사로잡힌 것이기에 사도를 행한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점안식을 하다가 무지개가 떴느니, 어디에 관음보살이 나타났느니 이런 얘기들을 합니다.

불교에서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도 있을 수가 있지만 그것으로는 깨달음의 길에 이르지는 못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사라수 나무가 꽃이 피어서 온 세상이 다 하얗게 되었고,

하늘에서 신들이 갖가지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가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어도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것은 제일의 공양이 아니다, 제일의 공양은 내 가르침에 따라 수행정진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32상 80종호가 생겼을까요?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으니 여기 있는 법륜스님이 부처가 되었다고 합시다,

법륜부처는 어떻게 생겼냐고 누가 묻습니다.

안경을 끼었다, 눈썹이 진하다, 이빨이 튀어나왔다, 이렇게 저만의 특징이 있으니,

법륜부처는 이렇게 생겼다 할 때는 맞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긴 사람이 법륜부처다 하면 맞지 않습니다.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다 해도, 내 세포를 하나 떼어서 복제한다고 해도,

모양과 형상과 목소리까지 똑 같다 해도 그 사람이 나는 아닙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생겼다는 말은 맞지만 이렇게 생긴 사람이 부처다는 말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동물이다 이 말은 맞지만, 동물은 사람이다 이 말은 맞지 않습니다.

동물과 사람이 등호가 아니듯이 32상과 부처도 등호 관계가 아닙니다.

즉 부처님의 몸에는 32가지 다른 사람과 다른 특징이 있다 하는 것은 맞지만,

반대로 32가지 몸의 특징이 있는 사람이 부처다 하면 맞지 않습니다.

특징이 있다는 말은 맞지만 특징으로 부처를 볼 수 있다는 말은 맞지가 않다,

특징이 있다고 해서 특징이라고 할만한 실체가 있는 게 아니기에 그렇다,

32가지 몸의 특징이 있는 사람이 부처라고 할 수 없다면 32가지 특징이 없는 사람이 부처냐 그 말도 아니다,

부처님은 술을 드시지 않는다 이 말은 맞지만, 술을 먹지 않는 사람은 부처다 이건 안 맞다,

술을 먹지 않는다고 부처라 할 수가 없다 하니까 그럼 술 먹는 사람이 부처겠네 이렇게 생각해도 안된다,

제 말 뜻 확실히 이해하시겠어요?

  

 

(제13-3강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