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5. 금강경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13-1 여법수지분

상원통사 2018. 2. 8. 21:49

금강경 열 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제13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 여법하게 받아 지니다

 

이시 수보리 백불언(爾時 須菩堤 白佛言)    : 이 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 당하명차경(世尊 當何名此經)          :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며,

아등 운하봉지(我等 云何奉持)               : 저희가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나이까?

이제까지 부처님께서 쭉 말씀을 하셨는데, 저희들이 이 경의 제목을 무엇이라 붙이고,

이 경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받들어 지녀야 되느냐 이렇게 여쭸습니다.

 

불고 수보리(佛告 須菩堤)                  :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경 명위 금강반야바라밀(是經 名爲 金剛般若波羅蜜) : 이 경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시명자 여당봉지(以是名字 汝當奉持)       : 이 이름으로 그대들은 마땅히 받들어 지녀야 하느니라.

‘반야’는 깨달음, 지혜라는 뜻이고

‘바라밀’은 모든 괴로움(속박)에서 벗어난다, 저 언덕에 건너간다는 뜻이므로

‘반야 바라밀’이란 ‘깨달음을 통해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또 ‘금강’이란 다이아몬드,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깨뜨릴 수 있을 만큼 단단한 것이므로,

‘금강반야’는 중생의 모든 번뇌를 다 소멸시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소이자하 수보리(所以者何 須菩堤) : 왜냐하면 수보리여!

불설 반야바라밀(佛說 般若波羅蜜) : 부처가 반야바라밀이라 말한 것은

즉비 반야바라밀(卽非 般若波羅蜜) :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어떤 상을 말하는 게) 아니라

시명 반야바라밀(是名 般若波羅蜜) :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양 지어진 것은 다 실체가 있고 영원한 것 같지만,

사실은 꿈같고 아지랑이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아서, 아무런 실체도 없고 영원한 것도 아닙니다.

헛것이 헛것인 줄 모를 때 거기에 집착이 일어나 갖가지 괴로움이 생깁니다.

꿈을 현실로 착각하기 때문에 꿈속에서 갖가지 괴로움을 겪게 되는 것이지,

꿈이 꿈인 줄 알면 그 속에서 어떤 두려움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모양도 지어서는 안 되고, 또 거기에 집착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모든 괴로움 번뇌 망상은 다 허상을 실상인줄 알고 집착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겁니다.

 

헛된 상을 실제인 줄 알고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다고 하니까

헛된 것이 아닌 실상이라고 하는 그런 실체가 별도로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 또한 잘못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집착을 버리면서 또 다른 것에 집착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상이라고 하는, 허상을 떠난 별도의 실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깨닫게 되면 바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고,

이런 것들을 보는 지혜(깨달음)를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어떤 실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반야바라밀이란, 별도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상을 여의는 게 반야바라밀인데, 반야바라밀이라는 상을 취해서 그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면 이미 반야와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여기서는 그것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금강경을 많이 독송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설해주면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고 하지만,

이것도 그 이치를 깨우치고 행해야 한량없는 공덕이 있는 것입니다.

많이 하라고 하니까 하루에 일곱 번씩 독송하면 모든 재앙이 없어지고 병이 낫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금강경이라는 또 하나의 모양을 짓고 거기에 집착해서 복을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해탈은 얻을 바가 없음을 깨쳐야 되고 그것이 허망한 줄을 깨달아야 됩니다.

금강경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상을 지어 거기에 집착해서 무엇인가를 구한다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그것은 헛공부가 된다, 그 주의를 다시 주고 있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堤 於意云何)   :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 유소설법부(如來 有所說法不)   : 여래가 법을 말한 바가 있느냐?

수보리 백불언 (須菩堤 白佛言)       :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세존 여래 무소설(世尊 如來 無所說)  :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에 대해서 설명을 했는데, ‘반야바라밀이라고 할 것이 없다’고 하니 수보리가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수보리에게 ‘이것이 법이다 라고 할 것이 있어서 여래가 지금 설하느냐’라고 물으니,

수보리가 금방 알아듣고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을 설한바가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달을 가리키는 데 달은 안보고 손가락만 본다는 말처럼, 중생은 늘 어떤 형상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은 하나의 방편입니다, 우리는 그 방편을 통해서 달을 봐야 합니다.

달을 보게 되면 손가락은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라는 달은 안보고 그 손가락 끝에 집착하기 일쑤입니다.

즉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옷은 왜 입느냐, 옷은 사람을 지키고 우리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입는 것입니다.

좋은 옷이라는 것은 그만큼 사람을 더 잘 보호하는 것이기에 값이 더 나가는 겁니다.

근데 값나가는 것이 좋은 줄 알고 자꾸 비싼 옷을 사게 되면 결국은 사람이 옷을 지켜야 되고 사람이 옷걸이가 되고 맙니다.

이런 것을 전도몽상이라 합니다.

 

불국사는 일주문을 지나고 사천왕문을 지나고 다리를 지나면 소나무가 있는 넓은 마당이 나옵니다.

여기가 구품연지(九品蓮池), 중생세계입니다.

거기서 부처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33계단, 즉 청운교 백운교를 딛고 올라가야 됩니다.

이 33계단은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에, 천상(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을 더하여 33개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 33개의 세계를 뛰어 넘어야 부처님의 세계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33계단을 지나면 붉은 안개가 자욱히 서려있는 그런 성스러운 곳, 자하문이 있고,

이 자하문을 지나면 좌우로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습니다.

불국사는 법화경에 근거해서 지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 속에서 다보탑이 솟아오르고

다보여래가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이 말씀이 옳다 하는 것을 증명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좌우에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는 것입니다.

다보탑과 석가탑을 지나서 대웅전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대웅전이 아니라 금당이라 했는데, 금당이라는 데는 부처님만 계시는 곳입니다.

거기는 참배만 하는 곳이지 거기서 법문을 하면 안 됩니다.

문도 당겨 여는 게 아니라 밀고 들어갑니다.

왜 밀고 들어갈까, 한 번 들어가면 못나오는 곳이다 이런 말입니다.

들어가서는 참배만 해야 합니다.

무릎 꿇고 합장하고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하고 예배하고 참회하고 발원하는 곳입니다.

그 건물 뒤에 설법전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에 대해서 설법을 할 때는 설법전에서 해야 됩니다

그 설법전의 이름이 무설전입니다.

법을 설하는 곳이라 해서 설법전(說法殿), 설함이 없다 해서 무설전(無說殿)입니다.

 

부처님은 한량없이 많은 법을 설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법을 설한다 하는 그런 어떤 의지(생각)를 갖고 법을 설한 것이 아닙니다.

서울 가는 길을 물으면 그 중생의 근기 따라 어디로 가라고 저절로 나오듯이

중생의 병고 따라, 중생의 번뇌 따라 그냥 법이 설해지는 겁니다.

부처님이 법을 설한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법을 설한 게 아니므로 사실은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는 가운데 팔만 사천 법문이 설해지고, 팔만 사천 법문이 설해지는 가운데도 사실은 한 법도 정해진 법을 설한 바가 없다,

서울 가는 길은 어느 쪽이라고 정해진 방향이 없지만 중생이 물으면 팔만사천 방향이 벌어진다,

팔만 사천 방향이 벌어지지만 서울 가는 길이 어느 방향이냐 할 때는 서울 가는 길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법명을 받으면 저한테 와서 법명 좀 해설해 주세요 하는데, 법명이란 해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법명은 이름일 뿐입니다, 그렇게 불리는 것일 뿐 거기에 무슨 뜻이 따로 없습니다.

정 알고 싶으면 지은 사람한테 가서 물어봐야 됩니다.

‘이게 무슨 뜻이요’ 라고 묻는 것은 글자를 이미 절대화 하는 것입니다.

글자는 절대화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동쪽으로 가라는데 왜 동쪽으로 가야 됩니까?

그것은 그가 어디 사는지를 확인해 봐야 됩니다.

그가 인천에 산다는 것을 확인하면 그것은 서울 가라는 것이구나 이렇게 금방 설명해 줄 수가 있습니다.

제가 물으니 동쪽으로 가라는데 동쪽으로 가면 뭐가 나옵니까?

그 물음만으로는 동쪽으로 가면 뭐가 나오는 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어디 살아요? 인천 삽니다, 그럼 서울이 나온다,

당신은 어디 살아요? 춘천 삽니다, 그럼 강릉이 나오겠네 이렇게 됩니다.

즉 동쪽이라는 말에 절대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위치에서 동이냐에 따라서 목적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법명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옥이 있느냐 물었더니 한 스님은 지옥이 없다하고 다른 스님은 지옥이 있다고 대답합니다.

두 스님의 말이 다른 것은 지옥을 절대화 시켰기 때문에, 지옥을 마음 밖으로 객관화 시켰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스님이 지옥이 있다 할 때나 지옥이 없다 할 때 거기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럴 때엔 그렇게 말한 사람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그걸 다른 스님한테 가서 물으면 다툼이 생깁니다.

한 스님은 있다하고 다른 스님은 없다 그러는데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제게 물었을 때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있다를 편들어 주거나 없다를 편들어 주는 게 아니라

그 있다 없다를 갖고 분별심을 내는 그 사람의 분별심을 지적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걸 지적해주면 그 사람은 내가 또 분별 망상에 빠졌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하는데

왜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안 하시고 엉뚱질문만 하시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 여러분들이 자꾸 마음 밖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 밖에 무엇이 없다고 금강경에서도 팔만 사천 법문에서도 얘기를 하고 있고

어떤 모양도 지어서는 안 된다고 계속 얘기하는데도 끊임없이 모양을 짓는 게 중생입니다.

 

수보리도 지금 끊임없이 모양을 짓고 있습니다.

수보리가 이렇게 모양을 짓는 것은 수보리가 아직도 소승이라서 그렇다 할 수도 있고,

우리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짐짓 수보리가 우리 대신에 갖가지 모양을 짓는다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제13-2강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