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금강경 강의 아홉 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 정토를 장엄한다
불고 수보리(佛告 須菩堤) :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의운하(於意云何) :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석재연등불소(如來 昔 在然燈佛所) :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계시던 처소에서
어법 유소득부(於法 有所得不) : 법을 얻은 바가 있느냐, 없느냐?
왜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되었느냐, 앞에서 어떤 상도 취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성문승들이 수행의 결과(과보)로 수다원과,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이미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뭔가를 증득했다는 그 어떤 상도 지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본래 한 법도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여기까지는 알아들었는데 또 의문이 듭니다.
부처님께서 과거세에 연등부처님을 뵙고 ‘미래세에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
수기를 받았다는데 그럼 그건 뭔가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부처님께서,
내가 연등부처님 계시는 곳에서 ‘이게 깨달음이다’고 하는 어떤 법이 있어서 그것을 얻었느냐 이렇게 질문을 하자,
수보리는 ‘내가 또 법이라는 상을 짓는구나’, 그래서 ‘아니옵니다, 부처님께서는 한 법도 얻은바가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지은 상이 부처님의 질문에 의해서 또 깨집니다.
불고 수보리 어의운하,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하되,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석재연등불소 어법 유소득부, 여래가 옛날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저 법에 얻은 바가 있느냐,
연등부처님이 ‘이것이 최상의 깨달음이다’고 하는 그런 법을 얻을 것이라고 수기를 준 바가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수기를 받았다고 이해하고 있는데, 그 어떤 최상의 깨달음이다 라는 것을 얻은바가 있느냐,
불야 세존(不也 世尊) :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 재연등불소(如來 在然燈佛所) : 여래께서 연등불 계시던 처소에서
어법 실무소득(於法 實無所得) : 실로 법을 얻은 바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마하가섭 존자에게 전법을 할 때, 삼처전심이라 해서
'이런 가르침 이외의 별도의 세 군데서 미묘법을 전했다'는 얘기가 선불교에 있습니다.
교외별전 삼처전심(敎外別傳 三處傳心), 이런 가르침 외에 세 곳에서 미묘법을 전했는데
영산회상 염화미소(靈山會上 拈華微笑), 그것은 염화시중의 미소,
다자탑전 분반좌(多子塔前 分半坐), 다자탑 앞에서의 분반좌,
사라수하 곽시쌍부(사라樹下 槨示雙趺), 사라수하에서 곽시쌍부 입니다
무엇인가 말 이외에, 언어를 떠나서, 문자를 떠난 그 이외의 법을 전했다,
이렇게 선불교에서는 '교외별전 삼처전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정법이 마하가섭 존자에게로 마하가섭이 아난다 존자에게로 아난다가 성나화수 존자에게로
이렇게 바른 법이 언어를 떠나서 전해져 내려온다 이게 선불교의 주장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에게 법을 전할 때 전법계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법본법무법(法 本法 無法), 법이라고 하는 본래 법은 없는 법이니
무법법역법(無法法 亦法), 없는 법(무법이라고 하는 법)도 또한 법이니라
금부무법시(今付 無法 時), 내가 이 없는 법을 전하는 이 때에
법법 하증법(法法何曾法), 법이라고 하는 법이 어찌한 법인가
여기서 핵심적으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법이라고 하는 본래 법은 없는 법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무유정법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제법이 다 공하다 이랬습니다.
법법하지만 법이라고 할 만한 법이 없다,
이 없는 법을 전해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데, 전한 바 없이 전하고 받는 바 없이 받는다,
법이라고 할만한 법이 없다는 이 법을 내 너희에게 전하노니 잘 받아 가져라,
받은바 없이 잘 받아 가져라,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바르고 으뜸가는 최고의 깨달음 그것은 무유정법, 곧 공함이다,
서울 가는 길을 확연하게 아는 최고의 법은 허공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다,
이 사람만이 서울 가는 길을 하나도 걸림없이 완전하게 알 수가 있다,
어느 쪽으로 가는 길이 서울 가는 길이냐 그것은 정해서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누군가가 어떤 위치에서 물으면 단박에 그 답이 정해져서 나온다,
이것이 무엇이라고 정해서 말할 수가 없다,
말로 표현 못하는 게 아니라 물으면 답이 나온다,
왜 그럴까? 거울은 한 그림도 그리지 않지만 물체가 오면 비친다,
거울은 한 그림도 그리지 않고 텅 비워 놓는다,
텅 비워 놓아서 한 그림도 그리지 않는 이것이 바로 무유정법이다,
이것은 한 그림도 그리지 않는다 해도 맞고 무수히 많은 그림을 그린다 해도 맞다,
반대로 한 그림도 그리지 않는다 해도 맞지 않고 무수한 그림을 그린다 해도 맞지 않다,
거울은 다만 본래로 청정할 뿐이다, 그러나 물건이 오면 그 어떤 것도 다 비친다,
서울 가는 길은 무엇이라고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중생이 물으면 그 어떤 사람이 물어도 서울 가는 길을 일러 준다,
그 길이 몇 가지인지 말할 수가 없다,
이것은 어려운 게 아니다,
우리가 어떤 관념을 가지고 불교를 이해하려고 하니까 불교가 어렵고 부처님의 말씀이 어렵지만,
사실 부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 적용해서 보면 상식에 속하는 거다,
너무나 당연한 일상적인 얘기인데, 우리는 일상적인 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보지 못한다,
왜? 우리는 일상적인 삶에 끼어있지 못하고 꿈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꿈속에 있으니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한다,
있는 그대로 보면 되는데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의 어떤 관념(망념)에 의해서 환상을 보고 있다,
꿈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즉 자신의 아상을 내려놓았다,
내려놓으니까 부처님께서 ‘너는 미래세에 성불하겠구나’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선혜동자는 ‘내가 한 소식을 깨달았다’고 생각한 게 아니고, 부처님 전에 자기의 모든 것을 던졌다,
부처님이 지나가시는 그 길에 자기의 전 재산을 털어서 꽃을 사서 공양을 올렸다,
그는 부처님이 진흙을 밟을까 해서 자기의 옷을 벗어서 밟고 지나가게 했다,
그래도 모자라니까 자기 온몸을 던져서 밟고 지나가게 했다,
그것도 부족하니까 머리까지 풀어서 밟고 지나가게 했다,
그가 가진 모든 것, 재물이든 지위든 명예든 육신이든 머릿속의 가치관이든 일체를 다 부처님 발아래 던져버렸다,
이것은 아를 버린 것이다,
몸뚱이, 가치관, 윤리도덕, 자기 생각, 재물 등 무엇인가로 ‘아’를 삼을만한 것은 다 던져버렸다,
그가 무언가를 얻은 것이 아니라 그냥 버렸다,
일체를 놔버리자 부처님께서 “너는 다음 생에 부처가 되겠구나” 이렇게 말했다,
수기를 받았다 하니까 어떤 법이 있어서 그것을 움켜쥔 게 아니다,
무언가를 더 움켜 쥔 게 아니라 이미 움켜쥐고 있던 모든 것을 놔버렸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堤 於意云何) :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 장엄불토부(菩薩 莊嚴佛土不) :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수보리가 또 의심이 들었습니다.
보살은 다생겁래로 보살행을 해서 불국토를 장엄하고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된다는데,
부처님께서 한 법도 얻은 바가 없다면 어떻게 정토를 장엄하는가?
수보리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칠보로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장엄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그 몸을 청정히 하는 것이 바로 몸을 장엄하는 것이고,
그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을 장엄하는 것이 되는데,
절을 짓고 탑을 세우고 뭘 만드는 것이 장엄하는 것이라 순간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어떻게 이 세계를 장엄을 하느냐, 불국토를 만드느냐 이런 생각을 냈던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네가 또 상을 짓는다, 장엄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중생의 마음은 어리석으니 바로 그가 사는 세계가 사바세계고,
중생이 어리석음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을 내게 되면 곧 그 국토가 청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야 세존(不也 世尊) :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 장엄불토자(何以故 莊嚴佛土者) :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은
즉비장엄 시명장엄(卽非莊嚴 是名莊嚴) :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리석은 마음을 내게 되면 그 어리석은 마음으로 인해서 갖가지 고통이 생긴다,
그 갖가지 고통이 바로 지옥을 만들고 아귀를 만들고 축생을 만든다,
어리석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
괴로움이 생기지 않으면 지옥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중생에게는 지옥이 있고 깨달은 자에게는 지옥이 없다,
왜 그러냐, 다 마음이 짓는 것이니까,
어리석은 마음을 내면 갖가지 괴로움이 생기고 갖가지 괴로움 중에 가장 나쁜 게 지옥이다,
이 육도윤회의 세계는 중생의 업으로 이루어지는 거다,
나의 마음이 지옥을 가고 천당을 가고 지옥고를 받고 천당고를 받는 게 아니라 내가 지은 업이 받는 것이다,
그러기에 업이 다하면 사라지게 된다,
선업을 지어 천상에 가더라도 그 과보가 다하게 되면 본래 자리로 돌아오게 되고,
악업을 지어 지옥에 가더라도 그 고를 다 받게 되면 본래로 돌아오게 된다,
그 업을 받는 주체는 나의 본심이 아니라 업장이다,
불토를 장엄한다 할 때 무엇인가 가꾸고 다듬어서 이 세계를 이루는 게 아니다,
무엇인가 가꾸고 다듬는다는 것은 마음 밖에서 도를 찾는 것과 같다,
마음이 어리석어 중생심을 내면 이 세계는 갖가지 고가 벌어지고(사바세계),
그 마음이 청정해지면 갖가지 고는 다 사라지게 된다,
모든 게 다 사람에 있다,
서울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서울이야말로 천국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산속의 오두막집일지라도 뒤에 기암괴석이 있으니 여기가 극락이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파리 모기 날고 더운 물도 안 나오고 전기도 안 들어오니 지옥이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원효대사는 방울스님을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갖가지 자비를 베풀었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방울 스님은 불쌍한 중생이 아니라 깨달은 부처였다,
다른 이들은 꼽추인 방울스님이 말도 잘 못하고 허튼 짓을 하기에 이런 모양에 집착해서 그를 무시했지만,
그래도 원효대사는 그를 불쌍히 여겨 갖가지 자비를 베풀었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 그것마저도 모양에 집착한 거다, 상을 지은 거다,
스스로 한 생각을 일으켜 불쌍하다는 상을 짓고 거기에 집착해서 갖가지 보살행을 했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 그것은 다 나의 망념이다,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키니 그게 중생이다,
내 어리석은 생각이 사라지니 중생이 사라지는 것이다.
보살은 장엄할 것이 없는 줄을 알고 이 세상을 장엄한다,
보살은 그가 배고프니 다만 먹을 것을 주고 그가 아프니 다만 약을 줄 뿐이다,
흘러가는 물을 보고 어떤 사람이 ‘물 좀 먹어도 됩니까?’라 물으니 ‘그러세요’라 대답했다,
이 때 그 물이 내 것이라 허락한 것이 아니다, 그가 물으니 그렇게 하라고 했다,
다만 인연을 따라서 베풀 뿐이다,
물을 먹어도 되느냐고 물으니 그러라 했고, 숨을 쉬어도 되느냐고 물으니 그러라 했다,
방에 들어와 자도 되느냐고 물으니 그러라 했고, 밥을 먹어도 되느냐고 물으니 그러라 했다,
왜 그러냐, 저 태양은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누가 쪼여도 좋고,
이 공기가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누가 숨 쉬어도 좋고, 이 물이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누가 마셔도 좋고,
이 음식이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누가 먹어도 좋고, 이 집이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누가 자도 좋다,
다만 이것들은 필요에 의해서 쓰여지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아무런 분별없이, 아무런 바람없이 베풀어지는 세계다,
보살은 이렇게 보살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10-2강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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