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5. 금강경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9-3 일상무상분

상원통사 2017. 12. 12. 22:12

(~~ 제9-2강에서 계속)

 

법문 잘 듣고 깨어있는 사람은 졸지 말아야지 이런 생각 안합니다.

졸지 말아야지 하는 것은 잘하는 것 같지만 지금 졸고 있는 중이다 이 말과 같은 것입니다.

수다원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나는 수다원이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름하여 성인의 류에 들었다 하는 것이지 실제는 들고 안 들고 할 게 없다, 든 바가 없다 이런 얘기입니다.

 

이무소입 시명수다원, 들어간 바가 없기에 그 이름이 수다원입니다. 이렇게 끝내도 되는데,

불입색성향미촉법, 이 말을 써서 한 번 더 강조했습니다. 이 말은 빼버려도 됩니다.

든 바가 없다, 다시 말하면 색성향미촉법에 든바가 없다, 다만 이름하여 수다원이다 이런 말입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수보리야 뜻이 어떠하냐,

사다함 능작시념 아득사다함과부, 사다함이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다 이런 생각을 하느냐,

수보리언 불야 세존, 수보리 말하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 사다함, 어찌한 까닭이냐 하면 사다함이다 하는 말은

명일왕래 이실무왕래 시명사다함, ‘한번 갔다 온다’는 이름이로되 실로는 오고감이 없다.

왜? 사바세계가 있고 정토세계가 있고 이렇게 두 세계가 나누어져 있으면 갈 일도 있고 올 일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거니 저거니 하는 상이 허물어져버리면 둘이 아닌 세계입니다.

그러니 오고 갈게 없다, 실로는 오고감이 없을 새 그 이름을 사다함이라고 하나이다.

 

수보리 어의운하, 수보리야 그 뜻이 어떠하냐,

아나함 능작시념 아득아나함과부, 아나함이 내가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생각을 하느냐,

수보리언 불야 세존, 수보리 말하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 아나함, 어찌한 까닭이냐 하면 아나함이라고 하는 것이

명위불래 이실무불래, ‘다시 오지 않는다’를 이름이로되 실로는 오지 않는다 할 것도 없다,

시고 명아나함, 그래서 그 이름을 아나함이라고 하느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 능작시념 아득아라한도부, 아라한이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이런 생각을 내느냐,

수보리언 불야 세존, 수보리 말하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 실무유법 명아라한, 왜냐하면 사실은 ‘이것이 법이라고 정해진 법이 없음’을 이름하여 아라한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법이다 라고 할만한 게 없는 것을 이름하여 아라한이다,

얻은 바가 없어야 이름하여 아라한이라고 한다.

 

결국은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는 것도 다 깨달았다 하는 하나의 상이다,

하나의 상이라도 지으면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의 상태가 아니다,

진짜 아라한이라면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냥 이름하여 아라한도를 얻었다 이렇게 부르는 겁니다.  

 

세존 약아라한 (世尊 阿羅漢 )              : 세존이시여! 만약에 아라한이

작시념 아득아라한도(作是念 我得阿羅漢道)   :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즉위착 아인중생수자(卽爲着 我人衆生壽者)   :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한 것입니다.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그런 생각을 내게 되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한 것이 되는 것이니 곧 보살이 아니다,

보살이 아니라는 것은 아라한과에 도달을 못했다는 겁니다.

 

세존 불설(世尊 佛說)                        :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아득무쟁삼매인중(我得 無諍三昧人中)       : 제가 ‘다툼이 없는 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최위제일(最爲第一)                         : 가장 제일이 됨이라 하시니,

시제일이욕아라한(是 第一 離欲 阿羅漢)      : 이는 제일의 욕심을 여읜 아라한입니다.

세존 아부작시념 아시이욕 아라한(世尊 我不作是念 我是離欲 阿羅漢) : 세존이시여, 저는 제가 욕심을 여읜 아라한이라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인자다” 라고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셨는데,

여기서 무쟁삼매는 ‘다툼이 없는 고요한 경지’를 말합니다.

비유를 들어 말한다면 산 얘기를 할 때로 돌아가 봅시다.

서쪽에 사는 사람은 동산이라 하고 동쪽에 사는 사람은 서산이라 한다,

동산이라는 사람은 동산이라는 상을 짓고, 서산이라는 사람은 서산이라는 상을 짓고 있다,

상을 짓기 때문에 거기에 집착을 해서 동산이다 서산이다 하고 다툰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이 그건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이렇게 말한다,

동산이다 하니 동산이 아니다 하고 서산이다 하니 서산이 아니다 한 것인데,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해 또 상을 짓는다,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이게 이 산의 진짜 이름이구나 이렇게 정답을 만든다,

이렇게 상을 지으면 동산이라는 사람과도 다투고 서산이라는 사람과도 다투게 됩니다.

그 산의 실체가 없음을 깨친 사람은, 누가 동산이다 하면 서쪽에 사니까 그렇게 부르구나,

동산이라고 할만한 실체가 없지만 서쪽에 사니까 동산이라고 부르구나 이러고 맙니다.

그러니 아무 다툼이 없이 넘어갑니다.

누가 서산이라 해도 넘어가도, 동산도 서산도 아니다 해도 다툼이 없이 넘어갑니다.

어떤 상도 짓지 않으면 이렇게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 자기에게만 향해서 들어야 됩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딴 사람에게 적용하면 안 됩니다.

상을 짓지 마라 하면 자기가 상을 짓지 않으면 됩니다.

내가 상을 또 지었구나 하고 깨달으면 이 법은 그대로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되는데,

남을 쳐다보면서 상을 짓지 마라했는데 또 상을 지었네, 이렇게 남에게 적용하면 시비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수행은 남에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 생각의 잣대로 남에게 요구하면 시비가 일어날까봐, 부처님의 법을 가지고 와서 잣대를 대며 시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법집입니다.

아집이든 법집이든 집착하기는 똑같고, 아상이든 법상이든 상은 똑같은 상일뿐입니다.

 

세존 아약작시념 아득아라한도(世尊, 我若作是念 我得阿羅漢道)          : 세존이시여! 제가 만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 즉불설 수보리 시요아란나행자(世尊 卽不說 須菩堤 是樂阿蘭那行者) : 세존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기꺼워하는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수보리 실무소행(以須菩堤 實無所行)                                  : 수보리가 실로 행한 바가 없으므로

이명수보리 시요아란나행(而名須菩堤 是樂阿蘭那行)                     : 수보리를 이름하여 ‘아란나행을 즐긴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아란나’는 ‘숲’이란 뜻이고, ‘아란나행’은 ‘숲속에서 고요히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돈도 모으고 권력도 쥐고 명예도 얻고 결혼해서 자식을 두고,

부모를 두고 형제를 두고 친척을 두고 살아야 잘사는 삶, 편안한 삶이라 생각하지만,

이렇게 살다보면 돈, 권력, 명예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고, 다른 온갖 일 때문에 또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다 버리고, 숲속에 들어가 마음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나는 모든 게 싫고 숲속에서 명상하는 것이 좋다’ 이런 생각을 하느냐 이말입니다.

아라한이 그런 생각을 하면 아라한이 못됩니다.

그럼 어떤 것을 아라한이라고 하느냐,

숲속에서 고요히 정진하기를 즐긴다는 것은 일체의 집착, 숲속에 있어야 된다는 집착마저도 떠난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둘이 있어도 귀찮지 않다,

집에 있으면 편리한 시설이 있어서 좋고, 산에 가면 맑은 공기 마시고 별도 볼 수 있어 좋다,

돈이 있으면 보시할 수 있어서 좋고, 돈이 없으면 수행하기 좋다,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포교할 수 있어서 좋고, 혼자 있으면 귀찮지 않아서 좋다,

즉 일체처 일체시에 걸림이 없어야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다 이렇게 말한다,

그래야 그가 숲속에서 고요히 수행을 즐기는 자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속을 부정하며 숲속에서 고요히 정진하고 살아야 돼, 이러면서 해탈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턱도 없는 소리다 라고 대승불교에서 소승을 비판하는 겁니다.

그건 승속을 나누고, 세간과 출세간을 나눠 어느 한 쪽에 갇혀있는 수준밖에 안된다,

일체의 분별을 떠나 어떤 상도 짓지 말아야 진정한 해탈이다 이렇게 비판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 아라한이라면 모든 상을 떠나야 된다,

정말 깨달은 자라면 나는 깨달았다 이런 생각마저도 없어야 된다,

나는 도를 얻었고 쟤는 도를 못 얻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아직도 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얘기입니다.

 

상을 지을 때 바로 상이 상인 줄 알고 상을 깨는 게 공부입니다.

어떤 것이 공부다 하고 상을 짓게 되면 공부하고는 멀어져버립니다.

여러분들은 갖가지 이름으로 자기를 삼아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공부의 진척이 없는 겁니다.

일체의 상을 버리는 것이 최고의 공덕이 되고,

이걸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해서 설해주면 한량없는 공덕이 있으리라 라고 금강경에 나옵니다.

그러자 그 공덕에 집착해가지고 밥도 안 먹고 금강경만 읽습니다.

남 참선할 때 같이 하고 남 염불할 때 같이 하고 남 일할 때 같이 일하라고 가르친 것인데,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게 최상의 공덕이라 생각하고 금강경병에 걸려 금강경 공부만 합니다.

내용은 그런 뜻이 아닌데, 우린 이렇게 늘 내용하고 상관없는 일을 하곤 합니다.

 

제9분의 핵심요지는 어떤 상도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깨달았다는 상도 지어서는 안 되지만 못 깨달았다는 상도 지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술을 먹으면 여러 부작용이 생기니 술을 먹지 마라 이랬더니 술을 안 먹는 상을 짓습니다.

그래서 돌아다니며 술 먹으면 해탈 못한다고 부처님이 그랬어, 이렇게 시비하고 다닙니다.

자기가 듣고 그렇게 행하면 그대로 공덕이 되지만, 그걸 갖고 남에게 적용하면 시비가 됩니다.

또 술 안 먹는 것으로 수행을 삼고, 술 안 먹는 것으로 상을 지어 집착하기도 합니다.

술 먹는 것으로 상을 지으면 술 없다고 시비를 하고, 술 안 먹는 것으로 상을 지으면 술 있다고 시비를 하는데,

어떤 상도 짓지 않으면 술이 있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이 무상, 상을 짓지 않는 것입니다.

상을 짓지 않으면 집착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 일상은 무상이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堤 於意云何)                         :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 능작시념 아득수다원과부(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고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언 불야 세존(須菩堤言 不也 世尊)                 :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何以故)                                              : 왜냐하면

수다원 명위입류(須陀洹 名爲入流)                         : 수다원을 일러 ‘흐름에 들어간다’고 하지만

이무소입(而無所入)                                         : 들어가는 바가 없으니

불입색성향미촉법(不入色聲香味觸法)                     : 곧 빛 소리 향기 맛 감촉 법에 들어가지 않으니

시명수다원(是名須陀洹)                                    : 그 이름이 수다원일 뿐입니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堤 於意云何)                         :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 능작시념 아득사다함과부(斯陀含 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 사다함이 ‘나는 사다함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언 불야 세존(須菩堤言 不也 世尊)                 :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何以故)                                               : 왜냐하면

사다함 명일왕래(斯陀含 名一往來)                         : 사다함을 일러 ‘한 번 오고 간다’고 하지만

이실무왕래(而實無往來)                                     : 실로는 오고 감이 없으므로

시명사다함(是名斯陀含)                                     : 그 이름이 사다함일 뿐입니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堤 於意云何)                         :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 능작시념 아득아나함과부(阿那含 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 아나함이 ‘나는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언 불야 세존(須菩堤言 不也 世尊)                    :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何以故)                                               : 왜냐하면

아나함 명위불래(阿那含 名爲不來)                         : 아나함을 일러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실무불래(而實無不來)                                     : 실로는 되돌아오지 않음이 없으므로

시고 명아나함( 是故 名阿那含)                              : 그 이름이 아나함일 뿐입니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堤 於意云何)                         :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 능작시념 아득아라한도부(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언 불야 세존(須菩堤言 不也 世尊)                 :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何以故)                                                : 왜냐하면

실무유법(實無有法)                                           : 실로 ‘법이 있음이 없음’을 일러

명아라한(名阿羅漢)                                           : 아라한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세존 약아라한 (世尊 阿羅漢 )                             : 세존이시여! 만약에 아라한이

작시념 아득아라한도(作是念 我得阿羅漢道)                 :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즉위착 아인중생수자(卽爲着 我人衆生壽者)                 :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한 것입니다.

세존 불설(世尊 佛說)                                         :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아득무쟁삼매인중(我得 無諍三昧人中)                       : 제가 다툼이 없는 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최위제일(最爲第一)                                           : 최고 제일이라 하셨는데,

시제일이욕아라한(是 第一 離欲 阿羅漢)                     : 여기서 제일이란 '욕심을 여읜 아라한'을 뜻하기에,

세존 아부작시념(世尊 我不作是念)                           : 세존이시여, 저는

아시이욕 아라한(我是離欲 阿羅漢)                           : '나는 욕심을 여읜 아라한'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존 아약작시념(世尊, 我若作是念)                          : 세존이시여! 제가 만일

아득아라한도(我得阿羅漢道)                                 :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 즉불설(世尊 卽不說)                                     : 세존께서는

수보리 시요아란나행자(須菩堤 是樂阿蘭那行者)             :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기꺼워하는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수보리 실무소행(以須菩堤 實無所行)                       : 수보리가 실로 행한 바가 없으므로

이명수보리 시요아란나행(而名須菩堤 是樂阿蘭那行)         : 수보리를 이름하여 ‘아란나행을 즐긴다’고 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