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1강에서 계속)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사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나 잘되든지 못되든지 엎어지든지 자빠지든지 어떻게 될 줄은 알아야 합니다.
어디로 갈 지는 알고 가야 된다, 지옥 갈 줄 알고 지옥 가면 가더라도 덜 억울하겠지요,
자기는 천당가는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는데 가보니까 지옥이면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그러니 최소한도 견도는 열려야 된다, 해탈은 못 이루더라도 최소한 견도는 열려야 됩니다.
자기 생각에 빠져서 믿을 수 없는 그런 생각을 옳다고 고집하고 큰소리치고 살다가,
어느 날 건강이 나빠지든지 사업이 망하든지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 전체가 후회되는 것입니다.
제가 공부를 가르치던 학생이 일반 대학을 그만두고 신부가 되려 신학교 간다고 하기에 물었습니다.
신부 되는 것은 좋은데 몇 가지 물어보겠다,
정말로 신이 있다고 생각해서 가려고 그러느냐,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신부가 좋아보여서 하려고 그러냐?
그랬더니 이 학생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자기는 카톨릭 집안에 태어났는데, 엄마 뱃속에서부터 믿음을 가진 모태신앙이다,
주변의 나이든 사람을 만나보면 대부분이 다 살아온 것을 후회를 하더라,
돈 많이 번 사람도,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도 나이 들면 다 후회를 하고,
젊을 때는 자기 가는 길이 옳다, 이게 중요한 것이니 꼭 해야한다고 열심히 했던 사람도,
나이들어 보니 꼭 그런 게 아니더라, 다른 것을 하고 살았다면 하고 후회하더라,
근데 신부님을 만나보니까 그렇지 않더라,
젊은 신부들은 왔다갔다 하지만 나이든 신부들은 내가 이 길을 참 잘 왔다 이렇게 생각하더라,
그래서 늙어서 후회를 덜 할 것 같아 신부가 될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말하기에,
그런 생각을 하고 간다면 그건 괜찮겠다 라고 축하해주었습니다.
견도란 스스로 보는 눈입니다
눈 감고 남 따라가며 아는 게 아니고, 자기 눈이 열려야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실천까지 다 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아는 게 행으로, 지행합일이 될 수도 있고 못될 수도 있지만 우선 안목은 열려야 됩니다.
수다원 : 해탈의 길에 들어왔다. 입류(入流), 예류(預流)
견도가 열리는 것을 수다원이라 합니다.
화낼 일이 없다는 것을 확연히 자기가 알았다,
화를 내더라도 저 사람이 나를 화나게 했다가 아니라 내가 어리석어서 화를 낸 줄 알면,
계속 화를 내고 살아도 되지만 그게 쓸데없는 짓인 줄 알기에 금방 그만 둘 수가 있다,
그러나 저 사람 때문에 화가 났다 하면 그만 두고 싶어도 그만 둘 수가 없습니다.
수다원은 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는 길, 즉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결에 참여를 했다,
그래서 수다원을 입류, 또는 예비자로 참여했다 해서 예류라 합니다.
수다원은 성인의 첫 입문단계입니다.
사다함 : 한 번 더 갔다가 온다. 일왕래(一往來)
수다원에 입문은 했지만 깜박깜박합니다.
정신을 차렸다가 전도몽상에 들었다가, 깨었다가 잠들었다가 하는 것이 수다원입니다.
잠이 들더라도 금방 깰 수 있는 상태, 안목은 열렸지만 아직 습기가 남아있는 상태이기에,
이제부터는 그 습기를 하나하나 닦아 나가야 하는데, 이것을 수도라 합니다.
그렇게 닦아서 한 번만 더 저 세상에 갔다 오면 그 다음에는 이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난다,
거기에 이르면 사다함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사다함을 일왕래(한 번 더 갔다 온다)라 합니다.
아나함 : 다시 가고 옴이 없다. 불환(不還)
아라한 : 지금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살적(殺敵)
점점 더 수행을 하여 다시 가고 옴이 없게 되는 경지를 불환, 아나함이라 하고,
더 수행을 하여 이 생이 끝나기 전에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경지를 아라한이라 합니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다 소멸했다, 다 죽여버렸다, 그래서 살적이라 합니다.
또는 응당히 공양받을 자격이 있다해서 응공(應供), 참사람이다 해서 진인(眞人),
마땅히 진리의 길로 가는 사람이다 해서 응진(應眞)이라고도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사람이 태어났다 죽는 것을 한 생이라 하지만,
수행차원에서는 한 생각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도 한 생이라 합니다.
몸뚱이가 나고 죽는 것도 한 생이지만, 한 생각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도 한 생입니다.
화를 한 번 벌컥 내고서 ‘너 때문에 내가’ 이러고 있으면 범부중생이고,
덜컥 내더라도 ‘내가 미쳤구나’ 하고 탁 놔버리면 흔적이 없어집니다.
화를 참으면 그 찌꺼기가 쌓이지만, 놔버리면 그 찌꺼기가 없습니다.
이렇게 흔적이 없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수다원이고,
다음에 한 번만 더 화를 내고 그 다음부터 다시는 안내게 되는 사람을 사다함,
아니구나 하면 이걸로 끝나버리는 게 아나함,
아예 안 일어나는 게 아라한입니다.
이걸 대승에서는 어떻게 보는가,
제법이 공하다 하는 차원에서 볼 때는 이것도 문제가 있다 이런 얘기입니다.
부처라 하지만 부처다 할 것도 없고, 부처님의 법을 얻었다 하지만 얻었다 할 것도 없고,
부처님이 중생을 위해서 법을 설했다 하지만 법을 설했다 할 것도 없고,
중생을 구제했다 하지만 실로는 한 중생도 구제된 중생이 없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수보리는 그 얘기를 듣고 동의를 하면서도 어떤 의심이 들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성문사과 중 하나씩은 얻은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이 아라한이었고 최소한 아나함 사다함 수다원은 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엔 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데 얻을 도가 없다 하면 그럼 이건 뭐냐,
깨달음을 얻었다 할 것도 없다면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뭘 얻었을까 이런 의심을 일으키자,
수보리가 질문도 하기 전에 부처님이 수보리한테 질문을 바로 해버립니다.
수보리는 질문을 받는 순간 자기가 또 망념을 피웠구나 이렇게 생각을 되돌립니다.
지난번에도 제 이야기를 했었는데,
큰 스님이 ‘밖에서 그만 활동하고 안에서 해라’라고 말씀하실 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머리털에 도가 없는데 뭐 새삼스레 머리를 깎고 말고 할 게 있는가,
도에 안팎이 없는데 새삼스럽게 들어갈 것은 뭐가 있을까,
머리 깎을 필요가 없다, 승단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이것이 고집이 있는 것인데,
저는 그 때 그것을 고집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승단에 들어가야 한다는 그런 고집은 이미 뛰어 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큰 스님이 승단이라는데 집착을 해서 들어와야 된다고 하시는구나,
그러나 그건 도가 아니지 않냐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도에는 본래 안팎이 없지, 네가 밖을 고집하니 안이 생기지 않느냐’,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밖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을 했습니다.
안팎이 없다고 하면서 내가 밖을 고집하고 있었구나,
내가 밖을 고집하고 있으니까 그걸 버리라고 안에 들어오라고 하셨던 겁니다.
이렇다 저렇다 하기 전에 문답 속에서 자기의 무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화를 벌컥 내면서도 자기를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는 안 되지만 시키니까 해야지 이걸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늘 자기 속에서 자기 상태가 자각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 어리석구나 할 때 내가 어리석구나 라고 자각하든지,
너 똑똑하다 하면 자기가 똑똑한게 아니라 내가 놀아나구나 하고 자각하든지,
자기 상태에 대해서 자각이 되어야 그걸 적어도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 공부하고 깨달아 아라한이라 이름을 얻었는데 얻을 것이 없다니 무슨 말인가,
그러니까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물었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수보리야 뜻이 어떠냐
수다원 능작시념 아득수다원과부,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을 얻었다’ 이런 생각을 하느냐,
그 때 수보리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 하는 것은 상입니다.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한 생각 일으키면 이미 아·인·중생·수자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수다원과를 못 얻었다는 겁니다.
노예가 노예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늘 그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어하고 괴로워합니다.
어느 날 그 상태에서 벗어난 노예는 너무 기뻐서 노예에서 해방되었다고 외치고 다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사람들까지도 그가 노예였다는 사실을 다 알게 될 뿐입니다.
자유인이 되었다고 외친다는 것은 겉으로는 벗어났을 지라도 속으로는 아직 자유인이 안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직도 노예의 찌꺼기가 남아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자유인은 내가 자유인이다 이런 생각 안하고 지냅니다.
누가 당신 노예요 자유인이요 이렇게 물으면 자유인이라 대답할 수는 있지요,
누가 묻는데도 나는 노예인지 자유인인지 모르겠는데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제9-3강에 계속 ~~)
'법륜스님의 법문 > 5. 금강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10-1 장엄정토분 (0) | 2017.12.19 |
---|---|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9-3 일상무상분 (0) | 2017.12.12 |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9-1 일상무상분 (0) | 2017.12.07 |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8 의법출생분 (0) | 2017.12.06 |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7-2 무득무설분 (0) | 2017.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