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5. 금강경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9-1 일상무상분

상원통사 2017. 12. 7. 16:57

금강경 여덟 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 일상은 무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모습을 우리는 삼라만상, 만 가지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각자 개별적 존재다, 그 개별적 존재는 서로 다 다르다,

그런 만 가지 모양으로 이 세상은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우리가 보는 세계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각각 다른 모양으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하나로 연관되어져 있다, 그래서 만상이 곧 일상이다.

만법귀일, 깨달은 눈으로 보면 곧 하나로 되어있다,

하나의 모양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모습이라고 모양 지으면 그것은 참모습이 아니다,

하나의 모양이라는 것은 곧 모양 없음을 말한다,

하나를 세우게 되면 다른 하나가 저절로 선다,

그래서 하나 마저도 세우지 않아야 그것이 참모습이다.

일상은 무상이다, 그러니까 하나도 세워서는 안 된다,

어떤 모양도 지어서는 안 된다 이런 얘기입니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堤 於意云何)        :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 능작시념 아득수다원과부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언 불야 세존(須菩堤言 不也 世尊)   :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何以故)                            : 왜냐하면

수다원 명위입류(須陀洹 名爲入流)        : 수다원을 일러 ‘흐름에 들어간다’고 하지만

이무소입(而無所入)                       : 들어가는 바가 없으니

불입색성향미촉법(不入色聲香味觸法)     : 곧 빛 소리 향기 맛 감촉 법에 들어가지 않으니

시명수다원(是名須陀洹)                  : 그 이름이 수다원일 뿐입니다.

‘이무소입’, 들어간 바가 없다는, ‘불입색성향미촉법’,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간 바가 없다는 뜻이며,

시명수다원, 그 이름이 수다원이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堤 於意云何)        :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 능작시념 아득사다함과부(斯陀含 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 사다함이 ‘나는 사다함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언 불야 세존(須菩堤言 不也 世尊)   :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何以故)                            : 왜냐하면

사다함 명일왕래(斯陀含 名一往來)        : 사다함을 일러 ‘한 번 오고 간다’고 하지만

이실무왕래(而實無往來)                   : 실로는 오고 감이 없으므로

시명사다함(是名斯陀含)                   : 그 이름이 사다함일 뿐입니다.

똑같은 논리로 글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堤 於意云何)        :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 능작시념 아득아나함과부(阿那含 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 아나함이 ‘나는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언 불야 세존(須菩堤言 不也 世尊)   :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何以故)                            : 왜냐하면

아나함 명위불래(阿那含 名爲不來)        : 아나함을 일러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실무불래(而實無不來)                   : 실로는 되돌아오지 않음이 없으므로

시고 명아나함(是故 名阿那含)             : 그 이름이 아나함일 뿐입니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堤 於意云何)        :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 능작시념 아득아라한도부(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언 불야 세존(須菩堤言 不也 世尊) :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何以故)                            : 왜냐하면

실무유법(實無有法)                       : 실로 ‘법이 있음이 없음’을 일러

명아라한(名阿羅漢)                       : 아라한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네 가지를 똑같은 표현방법으로 써놨습니다.

여기서 우선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그 다음을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소승불교에서는 어리석게 살아가는 우리 중생을 범부중생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범부중생은 쥐가 쥐약을 먹는 것과 같이, 행복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살아가지만 결과는 불행하게 된다,

살려고 하는데 결과는 죽게 된다, 이런 것을 범부중생이다 그럽니다.

인과의 법칙을 믿지 않고 인과의 법칙을 알지 못하고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살고 있고,

심지도 않고 거두려고만 하고, 짓지도 않고 받으려고만 하고 이런 게 범부중생입니다.

 

이 세계는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 움직인다, 그것이 인연의 법칙이다,

심은 게 있어야 거둘게 있고, 준 게 있어야 받을게 있다,

사랑을 받으려면 사랑을 먼저 해야 되고, 도움을 받으려면 남이 어려울 때 도와줘야 된다,

이 법칙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현인이라 하며, 이것이 바로 보통 인간,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범부중생이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다,

지옥 아귀 축생 같은 사람이다,

현생에서 지옥 아귀 축생과 같이 산다면 죽어서 반드시 지옥 아귀 축생도에 떨어질 것이다,

사람다운 사람이란 사람의 양심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즉 이 세상에도 사람답게 살아가고 죽어도 사람이나 천상에 다시 나게 된다,

이게 사람다운 사람, 이런 사람을 우리가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삼악도에 떨어지거나 삼선도에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윤회의 사슬에 묶여 있고, 윤회의 바퀴 속에서 돌고 도는 육도 윤회의 세계입니다.

 

육도(六道)              :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

육도에서 벗어나는 삶   : 성문, 연각, 보살, 불(성인의 길)

십법계(十法界)        : 육도와 성문, 연각, 보살, 불

이 윤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삶, 벗어나는 것부터 성인의 길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성인의 길에는 첫 번째가 성문, 그 다음이 연각, 보살, 불 이렇게 나갑니다.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 이것이 육도이고,

육도에 성문, 연각, 보살, 불을 더하여 우리는 십법계라 말합니다.

 

성문사과(聲聞四果) :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성인의 길, 성문승들이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데는 네 가지가 있어 성문사과라 합니다.

그 첫째를 수다원, 그 다음이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고 말합니다.

세속의 길, 육도 윤회의 길이란 마치 탁류에 떠내려가는 나무토막과 같습니다.

자신에 의해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거대한 물결에 떠내려간다,

이 세상에 올 때도 왜 왔는지도 모르고 그냥 던져진 존재이고,

살면서도 왜 이렇게 살아가는지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남 따라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사바세계의 모습입니다.

 

역류문(逆流門) : 해탈의 길은 세속의 물결을 거슬러 간다

이 사바세계로부터, 떠내려가는 삶으로부터 강가로 벗어나는 길이 있다,

이렇게 벗어나는 길을 우리는 성인의 길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벗어나려면 우선 밖에서 던져준 구명 밧줄을 잡아야 되는데,

그 구명 밧줄을 잡으면 쉬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어려워집니다.

왜? 거센 물결에 거슬러야 하기 때문에.

즉, 해탈(열반)의 길은 세속의 거센 물결을 거슬러 가는 것이기에 역류라 합니다.

깨달음의 길이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의 물결이 거꾸로 흐르고 있고 깨달음의 길은 그걸 거슬러 옳게 흐르는 것이기에,

우리는 깨달음의 길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탈의 길은 역류문이라 말합니다.

거스르려면 힘이 듭니다.

밧줄을 놔버리는 게 훨씬 편하겠지만 그것은 죽는 길이니 단단히 잡아야 됩니다.

밧줄을 단단히 잡고 세속의 물결을 거슬러서 강가로 나오는 데에는 네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입니다.

 

수다원(須陀洹) : 견해가 열리는 것

수다원이란 견해가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눈에 뭐가 덮어 쓰여서, 업식에 가려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쥐약이 쥐약인 줄 알아야 되는데 그게 쥐약인줄 모릅니다.

거꾸로 안다(전도몽상), 뭘 모른다(무명무지), 안다 해도 거꾸로 알고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무명에서 깨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 : 조견(照見), 정견(正見)

깨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사실대로 아는 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조견, 육바라밀에서는 정견이라 하고,

이렇게 안목이 열리는 것을 도에서는 ‘견도를 증득했다’고 말합니다.

보는 길이 열렸다, 사물을 바르게 알아차리는 모든 이치를 알아차렸다 이런 얘기입니다.

견도(見道)를 얻으면 곧 수다원이 된다, 성인의 류에 들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짜증나고 화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다 바깥이 나를 화나고 짜증나게 만듭니다.

내가 화나고 짜증나는 것, 나의 괴로움은 다 너희들 때문이다,

나 밖의 어떤 것들이 나를 화나고 짜증나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잘못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몽상이라 합니다.

 

착각을 하는 사람끼리 서로 대화를 하면 잘 통합니다.

옆에서 보면서 ‘그래, 화날만 하다’고 동조해주고, 서로 위안을 삼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다수의 의견을 들어서 자신의 견해가 바르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 얘기하다가 안 믿어주면 옆 사람에게 묻습니다, ‘내 말 맞지?’,

또 ‘동네 사람에게 가서 다 물어봐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다수의 지지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도몽상일 뿐입니다.

왜? 같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끼리의 얘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의 지지를 얻으려 하지 말고, 정신을 차려서 왜 짜증이 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가 나를 짜증나게 했느냐? 그가 나를 어떻게 짜증나게 하더냐?

그가 나를 짜증나게 한다고 생각하면 나의 인생은 그의 손에 달리게 되고,

세상이 나를 짜증나게 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세상의 군림을 받고 살아간다는 것이 됩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주체가 없으니 세상이 나를 짜증 안 나도록 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됩니다.

 

이제까지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정말 그런 것인가 정신 차리고 다시 한 번 보세요,

그러한 일이 있기 때문에 짜증이 나는 것이 아니구나,

다만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인데 어떤 때는 기뻐하고 어떤 때는 짜증을 내는 것이구나,

그것은 바로 자기가 바라는 대로 안 된다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해서 그런 것이다,

내가 바라는 대로 되어야 하냐, 내가 생각하는 게 옳으냐,

어떻게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인가, 이렇게 하나하나 확인하고 또 확인해 들어간다,

그러면 사람의 생각은 서로 다를 뿐이지 옳고 그른 게 아니구나,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어떻게 기준을 잡느냐에 따라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이지,

사실은 옳다 할 것도 그르다 할 것도 없다, 다만 서로 생각이 다를 뿐이다,

왜 다르냐?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입력된 정보가 다르다보니까 그렇게 느껴진다,

맨날 다른 게 아니라 같을 때도 있고 다를 때도 있다,

그런데 왜 내 생각을 중심으로 해서 상대편 생각도 나와 똑같아야 된다고 생각하느냐,

내 생각이 옳다 할 근거가 어디 있느냐, 내 입장에서 볼 때 옳은 것이지 옳다 할 게 뭐가 있느냐,

그런 현상을 보고 한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은 저런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러면 옳으니 그르니 할 게 없지 않느냐,

옳으니 그르니 할 게 없다면 뭐 때문에 화가 나느냐,

화날 일이 없구나, 하나의 그런 현상이 나타났을 뿐이구나,

 

왜 화를 냈을까?

그 현상에서 한 생각을 일으키고 한 생각을 일으켜서 내가 옳다고 모양을 짓고,

옳다는 것에 대해서 집착을 하니까 화가 난 것이다,

본래 옳다 그르다 할 게 없다면 화날 일이 없다,

그 사람은 그럴만해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고 그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 뿐, 내가 화 내야할 일은 아니다,

이렇게 계속 문제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면 사실은 이렇구나 라고 확연히 볼 수 있게 됩니다.

이걸 견도라 합니다.

이렇게 사실을 알고 나서 바로 행동에 옮기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우선 중요한 것은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 그 자체입니다.

즉, 앞으로 공부를 할 때는 최소한 견도는 열려야 됩니다.

견도가 열리는 것이 중요하지 실천을 하고 못하고는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왜? 못하면 못하는 줄을 자기가 알고 있으니 대책을 세울 수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으면 억울해하고 분해하는 이런 일은 없는 것입니다.

 

(9-2강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