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7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 얻을 바도 없고 설할 바도 없다
제7분 무득무설분, 얻을 바도 없고 설할 바도 없다, 깨달음을 얻는다 할 것도 없고 법을 설한다 할 것도 없다.
제5분에서 수보리가 ‘보살이 복덕을 지어서 그 과보를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렇게 거룩한 부처님의 상호가 있을 수 있느냐’ 이렇게 생각했을 때,
부처님께서 ‘이 몸의 모양이 부처냐?’ 이렇게 해서 형상에 집착하는 것을 깨뜨렸습니다.
모든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모든 법은 다 공하다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 여래지
‘이것이 부처다’라고 할 그 어떤 것이 있는 게 아닙니다.
제6분에서는 부처님께서 법이다 할 것도 없다, 이것이 법이고 저것은 법이 아니다 할 것도 없다 이렇게 말을 하니까,
부처라 할 것도 없고 법이라 할 것도 없다면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셨고 어떻게 수많은 법을 설하셨는가,
이런 의심이 수보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堤 於意云何) :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如來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 여래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느냐?
여래 유소설법야(如來 有所說法耶) :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느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정등각, 최고의 깨달음, 최상의 깨달음, 최고의 진리란 뜻이니,
이것이 ‘최상의 깨달음이다’라는 어떤 정해진 법이 있고 그 법을 여래가 얻었느냐,
‘이것이 법이다’라고 할 것이 있어서 여래가 그런 법을 설한 바가 있느냐,
수보리가 그런 의심을 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바로 되물으신 겁니다.
수보리언(須菩堤言 ) :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여아해불소설의(如我解 佛所說義) :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알기로는,
무유정법(無有定法) : ‘정한 법이 있음이 없음’을 이름하여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 ‘최상의 깨달음’이라 하며,
그러자 수보리는 자신이 또 망상을 피웠구나, 또 한 생각에 사로잡혔구나 하는 것을 금방 깨닫습니다.
수보리 말하되, 부처님의 설하신 바 그 뜻을 내가 이해하기로는
‘정한 법이 있음이 없다’는 것을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한다.
‘이것이 법이다 할 것이 없다’하는 것을 이름하여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이 최상의 깨달음이라 이름할 어떤 정해진 법도 없다.
역무유정법 여래가설(亦無有定法 如來可說) : 또한 그 무유정법을 여래께서 설하셨습니다.
‘이것이 법이다 라고 할 정한 법이 없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하며,
‘이것이 법이다 라고 정해진 그런 법이 없음’을 여래가 가히 설한다,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하면, ‘이것이 최상의 깨달음이다’라고 할 어떤 정해진 법도 없으며,
‘이것이 내가 설하는 법이다’라고 정할 그 어떤 법도 없다 이런 얘기입니다.
하이고 여래소설법(何以故 如來所說法) : 왜냐하면, 여래가 말씀하신 바 법은
개불가취 불가설(皆 不可取 不可說) : 모두 가히 취할 수 없으며 설할 수 없고,
비법 비비법(非法 非非法) : 법이 아니며 법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이자하 일체현성(所以者何 一切賢聖) : 왜냐하면 모든 현인과 성인이
개이무위법 이유차별(皆以無爲法 而有差別) : 다 무위법으로 차별이 있는 까닭입니다.
어찌한 까닭인가 하면, 여래가 설하신 바 법은
가히 취할 수 없으며 가히 말할 수 없으며, 법도 아니며 법 아닌 것도 아니니,
모든 현인과 성인이 이 무위법으로써 갖가지 차별이 있습니다
뜻이 전달이 잘 안 됩니까, 비유를 들어서 한 번 볼께요.
여기 맑은 거울이 있습니다.
거울 앞에 수많은 물체들이 오고갑니다
그럴 때마다 거울은 그 물체를 비춰주지요, 즉 그림을 그립니다.
컵이 오면 컵을 그리고, 사람이 오면 사람을 그리고, 갖가지 모양을 그리게 됩니다.
이럴 때 이 거울은 물건을 얼마나 그릴 수 있느냐,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느냐,
한량없이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한 그림도 그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거울에는 물체가 오면 비춰지고 가면 사라지게 됩니다.
거울은 어떤 물체가 오든지 다 비춰주지만 거울 그 자체는 한 물건도 그리지 않습니다.
여래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이것이 나다’하는 것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즉 거울처럼 어떤 것이 그 앞에 오든지 오는 대로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의 근기 따라 갖가지 방편을 설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법이다’라고 정해진 것이 있어서 ‘너는 이게 맞다’ 이렇게 법을 설하는 게 아닙니다.
약 처방이 만 가지가 있는데, 부처님께서 만 가지를 다 통달하셔서 중생의 병 따라 처방을 하나씩 주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은 정해진 아무런 처방도 갖고 계시지 않고, 다만 중생의 병 따라 그때그때 처방이 나옵니다.
이것이 맞는 처방이다 이렇게 정해져 있지가 않고, 그 사람의 병 따라 처방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이다’, ‘이것이 처방이다’ 이렇게 정해진 법이 없다, 이것을 ‘무유정법’이라 말합니다.
다시 비유를 들어서 말을 하겠습니다, 늘 하는 얘기입니다.
서울을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최상의 깨달음)이라 하고, 우리는 지금 지방(중생의 처지)에 살고 있습니다.
인천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으면 동으로 가라, 수원사람은 북으로 가라, 춘천사람은 서로 가라고 합니다.
바로 이 동으로 가라, 북으로 가라, 서로 가라 이것이 부처님의 설법입니다.
서울로 가는 길이 어떤 방향이라고 정해져 있어서 그 법을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게 아니고,
각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수많은 길들을 모두 다 부처님께서 찾으신 게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바는, 바로 목적지인 서울과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각 지방을 통 털어서,
저 허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이 그렇게 훤히 내려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내려다보니 어디로 가야할지 훤히 보입니다.
그래서 중생의 근기(위치)에 따라 거기에 맞춰 서울 가는 방향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최상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동쪽으로 간다 서쪽으로 간다는게 아니라, 이 세계를 환하게 봐버리는 겁니다.
‘어떤 것’이 서울로 가는 길이다 하는 ‘어떤 것’을 깨달은 게 아닙니다.
서울 가는 길은 정할 수가 없습니다.
정할 수가 없다는 말은 서울 가는 길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그것을 금강경에서는 이름하여 ‘무유정법’, ‘정해져 있지 않은 법’이라 합니다.
이 ‘정해져 있지 않은 법’을 이름하여 ‘최상의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라고 말합니다.
최상의 깨달음, 서울 가는 가장 바른 길, 그런 정해진 길은 없습니다.
동이다 서다 북이다, 이렇게 인연을 따라서 갖가지 법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일체현성, 모든 현인과 성인은,
개이무위법, 모두 이 차별이 없는 법, 함이 없는 법, 무유정법으로부터
이유차별, 갖가지 차별법이 나온다,
그러니 여래가 법을 설한다 하지만 가히 설할 게 없다,
다만 중생의 근기 따라 거울에 물건을 비추듯이 그냥 설해지는 것입니다.
중생의 근기 따라 중생의 번뇌가 한량이 없으니 부처님의 설법 또한 한량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법을 설한다 하지만 그것은 중생이 부처의 거울에 비췄을 때 그냥 비춰진 모습일 뿐이지 거울이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길을 물으면 부처님이 동이다 서다 북이다 할 때, 부처님이 갖가지 법을 갖고 계셔서 그 법을 설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자동적으로 방향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 이런 얘기입니다.
부처님은 한 법도 설한 바가 없지만 한량없는 많은 법을 설하고 있고,
한량없는 많은 법을 설했지만 진실로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
여기서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는 것은 ‘이것이 법이다’라고 정해진 어떤 법, 그런 법은 한 번도 설한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아쇼카 나무가 가득한 커다란 숲을 만났습니다.
부처님은 아쇼카 나무 가지를 하나 꺾어서 아난존자에게 물었습니다.
부처님 : 아난아, 이 나뭇가지에 나뭇잎이 많으냐 적으냐?
아난 : 예, 매우 많습니다.
부처님 : 그러면 내 손에 쥔 이 아쇼카 나뭇잎하고 저 숲에 있는 것하고 어느 게 더 많으냐?
아난 : 물론 저 숲에 헤아릴 수 없이 더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 : 그렇다 아난다여, 이제까지 너희들에게 설한 법이 손에 있는 나뭇잎과 같다면
내가 너희들에게 설하지 않은 법은 저 숲에 있는 아쇼카 나뭇잎만큼 될 것이다.
부처님이 팔만사천 법문을 설했지만 그것은 부처님이 설할 수 있는 법에 비해서 아주 조금에 불과하다 이런 얘기입니다.
아무리 거울에 물건을 많이 비췄다 해도 앞으로 이 거울에 비출 것들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과 같습니다.
거울은 한 그림도 그리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거울에는 무수한 물건이 비출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도 앞으로 수많은 법을 더 설할 수가 있습니다.
설할 법이 정해져 있지 않고 중생의 근기에 따라 법이 설해집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인천사람 수원사람 춘천사람밖에 없어서 동으로 북으로 서로 가라고만 했는데,
지금은 의정부에도 사람이 살아서 물으러 오면 부처님은 남으로 가라고 설하실 거다,
그러니 부처님은 한량없는 법을 설했다 해도 맞고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 해도 맞다,
정 반대인데 그게 같은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많은 말을 했다, 정 반대입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몸에서 풍기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많은 것을 느꼈다면그는 많은 말을 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정반대되는 것도 연결하면 또 의미가 전달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한 법도 설하지 않으셨다, 부처님은 한량없는 많은 법을 설했다, 이것도 연결이 되는 겁니다.
부처님은 중생의 근기 따라 팔만사천 법문을 하셨지만 사실 부처님은 한 법도 설하신 바가 없다
왜 그럴까? 무유정법이기 때문에 그렇다, 법이 공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조사스님이 계시는데 글은 잘 모르지만 법을 잘 설한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하루는 금강경 공부를 엄청나게 많이 한 수행자가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수행자 : 스님은 어떤 법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칩니까?
조사스님 : 저는 어떤 법으로도 남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수행자가 이해가 안 되어 멍해 있으니 이번에는 조사스님이 묻습니다.)
조사스님 : 그러는 당신은 어떤 법으로 사람을 가르칩니까?
수행자 : 저는 금강경으로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조사스님 : 그럼 금강경은 누가 설한 겁니까?
수행자 : 금강경은 부처님께서 설하셨습니다.
조사스님 : 금강경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했는데 누가 이 법을 설했습니까?
그러자 수행자는 앞뒤가 콱 막혀버렸습니다.
부처님이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했는데 부처님이 법을 설했다고 하면 금강경의 내용에 위배가 되고,
부처님께서 이 금강경을 안 설했다 하려니 분명히 경 서두에 부처님이 설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이 금강경을 안 설했다 하면 금강경을 비난하는 게 되고, 금강경을 설했다고 하면 부처님을 비난하는 게 됩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건 선에서 책만 보고 하는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아는 거란 늘 이런 겁니다.
그러니 책을 덮어놓고 이 도리를 터득을 해야 되겠지요.
깨닫기 전에는 그 두 말이 모순인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질문을 안 던지면 문제가 있는 줄 모릅니다.
이렇게 뒤집어서 던지니까 자기가 생각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도대체 이게 뭘까?
공부는 거기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 하면 우리는 우선 서울 가는 길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없는 게 아니라 정해져 있지 않은 것입니다.
정해져 있지 않다니까 그럼 아무렇게나 가도 되나 이렇게 자꾸 생각이 미칩니다.
서울 가는 길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서울 가는 길이 없다는 뜻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정해져 있지 않다, 공하다 하는 것은 없다는 얘기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인연을 따라서 법이 정해지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법이다 라고 할 만한 고정된 법’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누구인가? 누구라 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를 만나면 딸이라고, 남편을 만나면 아내라고, 자식을 만나면 어머니라고 불리고,
절에 오면 보살이라고, 전철을 타면 승객이라고, 물건을 사러 가면 손님이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인연을 따라서 한량없이 많이 불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 모든 것이냐, 모든 것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나라고 할만한 게 없기에 이렇게 인연을 따라서 나타나는 겁니다.
그것을 법성게에서는 불수자성 수연성,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법은 공하다 자성이 없다 무하다, 그것은 인연을 따라서 갖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한량없는 법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실체가 없고 영원한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냐,
아니다, 텅 비었다 하는 것은 거기로부터 갖가지 법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개이무위법 이유차별’이라 말한 것입니다.
(7-2강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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