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금강경 여섯 번째 강의 시간입니다.
부처님과 수보리와의 대화를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수보리 : 어떻게 하면 이 모든 괴로움에서 완전하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부처님 :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다 네가 구해주어라.
그러나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네가 다 구해주었다 하더라도 실로는 한 중생도 구제를 받은 바가 없는 것이다.
(즉, 네가 일체중생을 다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어 구제활동을 하더라도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 이런 생각을 하지마라)
수보리 : (속으로 의심하며) 내가 구제한 바가 없다면 보살은 어떻게 복을 짓는가?
부처님 : 너는 유위의 행으로 짓는 유루복만 복인 줄 아는구나.
함이 없는 무위의 행에 의해서 지어지는 무루의 복이 한량없음을 알지 못 하는가?
(그러면서 무주상보시의 공덕이 한량없음을 말합니다.)
수보리 : 보살이 복을 받지 아니한다면 부처님의 거룩하신 32상 80종호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부처님 : 32상 80종호를 가진 이 몸의 모양이 부처냐?
수보리 : (크게 깨닫고) 아니옵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코로 냄새 맡는 것, 혀로 맛보는 것, 손에 만져지는 것,
생각으로 알음알이를 할 수 있는 것 그것으로는 여래를 볼 수가 없다,
바로 모든 모양 지어진 것 속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 제법이 다 공하다는 것,
모든 것이 다 꿈같고 아지랑이 같고 환상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수보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눈이 확 트였습니다.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 바르게 믿는 것은 희유한 일이다
제6 정신희유분, 정신(바른 믿음), 바르게 믿기란 정말 희유한 일이다, 드문 일이다.
수보리 백불언(須菩堤 白佛言) :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 파유중생(世尊 頗有衆生) :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득문여시 언설장구(得聞如是 言說章句) : 이와 같은 말씀과 문장과 글귀를 듣고
생실신부(生實信不) : 진실한 믿음을 낼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불고 수보리(佛告 須菩堤) :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막작시설(莫作是說) : 그런 말 하지 마라.
여래멸후 후오백세(如來滅後 後五百歲) : 여래가 열반에 든 뒤 후오백세에
유지계수복자(有 持戒修福者) :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가 있으면
어차장구 능생신심(於此章句 能生信心) : 이 문장과 글귀에 능히 믿는 마음을 내어
이차위실(以此爲實) : 이것으로 실다움을 삼을 것이다.
수보리는 걱정을 합니다.
지금 부처님이 계신 상태에서도 부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바로 깨닫지 못하고 헤매는데,
하물며 저 미래세에 부처님도 아니 계시는 오탁악세에 업장이 두터운 그런 중생들이
어떻게 이런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고 믿을 수가 있을까?
아무리 부처님 말씀이 좋다 하더라도 그 때에 중생이 받아들여 믿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걱정어린 생각으로 부처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부처님께서는 간단하게 말하십니다.
수보리야 그런 생각(말) 하지 마라,
여래가 열반에 든 오백년 후에 태어난 중생이라도(가장 나쁜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라도),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가 있다면(바르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자가 있다면),
이 문장과 글귀를 만나게 되면 곧 믿는 마음을 내어서 그것으로 실다움을 삼을 것이다,
그것으로 자신의 양식으로 삼아서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이런 얘기입니다.
수보리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세월이 흐르면 정법이 흐려지고 사법이 판을 치고,
중생은 업장이 두터워져 이 좋은 말씀도 아무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생각했지만,
부처님의 생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이나 나중이라는 시간의 구애가 없고, 업장이 두텁고 얇은 것에도 구애가 없이,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금방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
보통사람들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세월이 자꾸 흘러가면 불법이 점점 쇠퇴해진다고 생각하지만,
통상적인 말세라느니 중생의 업장이 두텁다느니 이런 것들을 부처님은 인정 안합니다.
여기서 보면 ‘후오백세’가 나오는데, 불교에서는 세상을 다섯 가지로 분류를 합니다.
해탈견고(解脫堅固) : 법문을 들으면 바로 깨닫는 시대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열반 후 오백년까지를 해탈견고의 시대라 하는데,
부처님의 바른 법이 늘 유지가 되는 시기입니다.
이 시대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면 거의 대다수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선정견고(禪定堅固) : 법문을 듣고 수행은 하지만 해탈은 잘 안 되는 시대
선정견고의 시대는 부처님이 열반에 들고 나서 오백 년부터 천 년 사이를 말합니다.
이때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바로 깨치지는 못하지만 가르침대로 실천은 한다,
즉 명상을 하고 관법을 익히고 참선을 하며 정진을 하고 선정을 닦는 시대를 말합니다.
이렇게 직접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깨닫는 사람은 드문 시대를 선정견고의 시대라 말합니다.
다문견고(多聞堅固) : 법문은 즐겨 듣는데 수행은 안 하는 시대
다문견고의 시대는 불멸후 천 년부터 천오백 년 사이를 말합니다.
이때는 경전 읽기를 좋아하고 법문 듣기를 좋아하지만 수행은 하려고 안합니다.
법문 듣기는 아주 좋아하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잘 안하려고 하니 깨닫기는 더더욱 어렵겠지요.
탑사견고(塔寺堅固) : 불사는 좋아하는데 수행은 안하는 시대
그 다음 또 오백 년이 지나서 천오백 년에서 이천 년 사이에는 어떻게 되느냐,
절을 크게 짓고 불상을 조성하고 탑을 세우는 등 불사하기는 좋아하지만 법문은 듣기 싫어합니다.
그러니 부처님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고 깨닫는 사람은 아예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투쟁견고(鬪爭堅固) : 뭐든지 패를 가르고 다투는 시대
다시 오백 년이 지나 불멸 후 이천 년에서 이천오백 년 사이는 싸우기를 좋아합니다.
절을 짓기는커녕 있는 서로 뺏으려 싸우고, 경전 공부는 안하고 이 경전이 옳다 저 경전이 옳다 싸우고,
수행하라 그러면 이 수행법이 옳다 저 수행법이 옳다 그걸 갖고 또 싸우고,
깨달음을 갖고도 싸우고 뭐든지 소재만 주면 투쟁이 대상이 됩니다.
해탈의 내용 갖고도 다투고, 선정 방법 갖고도 다투고, 절 갖고도 싸우고,
그러니까 뭐든지 다툼이 되는 투쟁견고시대입니다.
오늘날은 어디쯤 될 것 같아요, 투쟁견고시대 같지요?
이렇게 해서 불법이 점점 쇠퇴해집니다.
말법시대에 가면 가사를 걸치고 머리를 깎고 부처님의 제자를 흉내 낸 갖가지 마구리들이 절집 안에 우글우글해서,
결국은 사자가 자기 몸속에서 나온 벌레에 의해서 쓰러지듯이 불법이 멸해갑니다.
누가 바깥에서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이 자체로 훼손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후오백세, 최악의 시대, 투쟁견고의 시대에 태어난 중생이라고 하더라도,
바르게 살려고 하는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가 있다면, 이 말씀을 들으면 바로 믿는 마음을 내서 자신의 양식으로 삼아버린다,
그러니 선법시대니 말법시대니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제법이 공한데 무슨 선법 말법이 있겠습니까?
여기서 후오백세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다섯 오백 년 중에 마지막 오백 년이지만,
그냥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오백 년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왜? 대승불교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오백년 후에 일어났습니다.
즉, 자신들이 살던 시대를 대승불교인들은 말법시대라고 본겁니다.
이때에는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 이미 어긋나서 정법이 소멸되었고, 각 부파들이 서로 싸웠는데,
이런 시대라 하더라도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나 다 깨달을 수가 있다,
이렇게 썼기 때문에 오히려 글자 그대로 불멸 후 오백 년으로 해석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불멸 후 오백 년이냐 이천오백 년이나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후 오백 년이 뜻하는 것은 바로 말법 시대입니다.
부처님의 바른 법이 훼손되고 그 내용이 왜곡되어서 신자나 스님들이 법의 바른 가르침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세속적인 가르침, 삿된 사상에 물들어서 바른 법을 외면하는 그런 세상이라는 의미입니다.
지악수선(止惡修善) : 악을 멈추고 선을 닦는다
이렇게 말법의 시대라 하더라도 법이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때에도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불교가 또 새롭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유지계수복자(有 持戒修福者), 이런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가 있으면,
유지계수복자란 지악수선, 악을 멈추고 선을 닦는 사람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오탁악세가 되면 인간은 위대한 성인이나 위대한 수행자가 되기는커녕 보통 수준의 사람도 안됩니다.
오늘날 보면 스님들도 도력이 높기는커녕 보통 사람이 갖는 윤리·도덕의식마저도 없고,
성직자라 이름붙인 종교인도 사고방식이나 행동거지가 옛날 선량한 서민들보다도 더 허물어져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정직해야 됩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인연의 법칙을 알고 인연의 법칙을 믿고 거기 따라야 됩니다.
복을 지어야 복을 받고,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는 데,
오늘 우리는 지은 것 없이 받기만 하려하고, 남 욕하면서 자기는 칭찬 들으려고 합니다.
이게 어리석은 범부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범부들이 사는 세계가 오탁악세, 말법시대입니다.
지악이란 악을 멈추는 것,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생명가진 자는 다 살고자 합니다.
살고자 하는 것을 죽이려면 괴롭지요, 그러니 살생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 자기 재물을 도둑맞기 싫어합니다.
가진 것을 잃거나 도둑맞으면 괴롭지요, 그러니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
부녀자들은 강제로 성폭행을 당하려 하지 않지요, 그러니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 남에게 속고 싶지 않지요, 그러니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맑은 정신을 갖고 살고 싶지요, 그러니 술을 먹지 않는다,
이게 계를 지니는 겁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요즘은 이 다섯 가지 계를 지키면 세상 못살 것 같습니다.
그만큼 세상의 가치관이 혼란스러워진 것입니다.
세상이 다 그러더라도 나만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삶을 살지 않겠다,
생명가진 것을 사랑하고, 주지 않은 남의 물건을 갖지 않고 청정하게 살며,
진실을 말하고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겠다, 이게 계를 지키는 겁니다.
살생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는 것이 방생입니다.
배고픈 중생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아픈 중생에게는 약을 주고 배우지 못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방생입니다.
도둑질 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 이게 복을 짓는 것입니다.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스스로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한다,
거짓말 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늘 진실을 말해서 사람들을 깨우친다,
술 먹고 방탕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바른 문화를 창조해간다,
이게 복을 닦는 것입니다.
선법의 시대라면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일입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보통사람들이 하는 일이고,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면 사람모양을 하고 있지만 사람의 삶을 사람의 마음가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탐·진·치 삼독에 물들어서 축생과 같이 살아가게 됩니다.
이럴 때라도 탁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만이라도 바르게 살려고 하고,
더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까지도 건져내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런 법문을 못 만나서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것만이 최고인줄 알고 살지,
이런 법문을 들으면 단박에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제6-2강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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