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5. 금강경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5-3 여리실견분

상원통사 2017. 11. 27. 15:45

(~~ 제5-2강에서 계속)

 

 

우리는 살다보면 상에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집착하지 않는다고 말은 쉽지만 늘 한 생각 일으켜서 모양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상에 집착해서 저지른 실수를 하나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제가 경주에서 어느 절의 포교당에 있을 때입니다.

사시에 예불을 드리면서 천수경을 독송하고 있는데 누가 문짝을 딱딱 때리는 겁니다.

문을 똑똑 두드리는 게 아니라 쇠토막 같은 것으로 문을 부수듯이 두들기는 겁니다..

그래도 신경 안 쓰고 기도드리는데 자꾸 때리니까, 짜증이 나 목탁을 놓고 나갔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어떤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다리 하나 팔도 하나 없이 서있는거요.

팔이 없어 쇠갈퀴로 문을 두드리니까 그렇게 쇠소리가 났던 것입니다.

그 모양을 보자 선입관에 ‘돈 얻으러 오셨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기도 중이니까 좀 기다리시오’ 하고 들어왔습니다.

난 너무나 당연하다 생각했고, 들어와 다시 천수를 치는데 더 세게 두드리는 겁니다.

그러니 화가 아까보다 더 나서 목탁을 놔놓고 나갔습니다.

 

법륜    : 왜 그리 자꾸 문을 두드려요, 보다시피 내가 지금 바빠요, 좀 기다리면 되지 왜 그래요?

방문객 : 스님만 바빠요? 저도 바빠요.

법륜    : (기가 차서) 아무리 바쁘지만 여긴 포교당이라 돈이 하나도 없어요.

          요사에 가서 돈을 찾아와야 하니 좀 기다려야 할 것 아니요?

방문객 : (쳐다보며) 제가 언제 돈 얻으러 왔다고 그랬습니까?

 

저는 당연히 돈 얻으러 왔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주는 자의 교만이지요.

너는 얻으러 왔으니 조금 기다려야 된다 이렇게 생각해서 했는데,

내가 언제 돈 얻으러 왔다고 그랬냐고 하니,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실제로 이 사람은 아직 한 마디도 안했던 것입니다.

그냥 서있었을 뿐인데 그 모습을 보고 동냥 얻으러 왔구나,

나는 지금 바쁘니 조금 기다려라, 근데 자꾸 재촉을 하니까 나 바쁜 줄 알면서 왜 그러냐,

니만 바쁘냐 나도 바쁘다,

아무리 바쁘지만 얻으러 온 놈이 조금 기다려야지 내가 지금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생각이 자동으로 흘러간 것입니다.

 

그래서 왜 왔냐고 다시 물으니 중 되러 왔다고 하는 겁니다.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다가 다시 또 짜증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중이 시세없는 세상이지만 아무나 중 되는 줄 아냐 이런 생각이 든 겁니다.

그 해가 82년도니까, 그 전에 10·27 법난이 있었지요.

경찰이 스님들을 잡아가서 재산축재 했느니 여자관계가 있느니 하고 난리가 나서, 불교인들이 얼굴을 못 들고 살 때였습니다.

아무리 불교가 우습게 보이더라도 턱도 없는 사람이 와서 중 되러 왔다니 화가 났지만,

니 같은 사람이 어떻게 중이 돼 이렇게 말할 수는 차마 없잖아요.

속마음은 쥐나 개나 아무나 되는 줄 아나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점잖게 말했습니다.

법륜    : 여기는 보다시피 시내 포교당입니다. 여기서는 중이 될 수 없어요.

          그러니 산 속 조용한 절에 가서 출가를 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방문객 : 저도 몇 군데 가봤어요. 근데 가는 데마다 딴 데 가라 그러더군요.

 

그 얘기를 들으니까 저도 좀 찔리는 겁니다.

이 사람이 신체가 비정상이니 어떤 절에 가도 핑계를 대며 딴 절에 가라 그랬겠지요,

저 또한 포교당이란 핑계를 대고, 학생들과 어린애들을 가르치는 곳이니까 딴 데로 가라고 했던 것입니다.

‘왜 중이 되려고 합니까?’라고 다시 물었어요

그랬더니 ‘제가 지금 마음이 답답합니다. 그래서 중이 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꽉 막혀버렸습니다.

당장 마음이 답답하다는데 ‘그럼 염불하시오, 교리공부 하시오’ 이렇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 입도 뻥긋 못 하다가 다시 물었습니다. ‘왜 마음이 답답합니까?’

그랬더니 이 사람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결혼을 한 뒤에 월남 전쟁에 갔는데, 다리 하나 팔 하나 없는 상이군경이 되어 돌아왔다,

일을 할 수 없어 연금을 받고 사는데 애가 둘이나 있어 생활이 어려웠다,

자연히 부인이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일을 하게 되니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니 부인한테 신경질을 내게 되고, 왜 늦게 들어 오냐, 오늘 뭐 했냐 의심이 생기고,

병신이라고 부인이 자기를 무시한다는 생각이 드니 화내고 술 먹고 주정하게 되고,

부인은 억울해 말대꾸하면 두들겨 패고 살림을 부수니 집안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부인이 못 견디고 집을 나가버리면 애들만 데리고 어렵게 살다가,

부인이 돌아오면 잘못했다 하고 살다가 또 술 먹고 행패를 부리고 싸우고,

이렇게 십 몇 년을 계속하다 보니 자기가 생각해도 도저히 할 짓이 아니었던 것이요.

이렇게 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을 해도 한 잔 먹으면 다시 또 망나니짓을 하게 되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하여 약을 사왔는데 차마 먹을 수가 없었다,

죽지는 못하겠으니 차라리 없어져야 되겠다고 생각한 끝에 중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여기저기 몇 군데 절을 다녀봤는데 다 안 된다고 했다는 거요.

 

그럼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냐고 물으니 누가 소개해줬다고 합니다.

누가 소개했냐고 물으니 안주머니에서 뭘 끄집어내더니 저에게 줍니다.

받아보니 그건 제가 보낸 초청장, 포교 팜플렛이었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누가 큰 망치로 내 뒤통수를 탁 때리는 것처럼 멍해졌습니다.

그 팜플렛 앞면에는 크게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한 자여, 여기 부처님께서 마련한 좋은 안식처가 있으니 다 이리로 오시오”

이걸 이천 장 만들어서 시내에 뿌렸는데, 내가 오라고한 사람이, 진짜 거기에 딱 맞는 사람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람을 보는 순간부터 그때까지 어떻게 하면 내보낼 수 있을까 그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돈 좀 줘서 내보내려고 하고,

그 다음에는 우리 절은 포교원이니까 출가하기 곤란하다고 내보내려 했던 것입니다.

이게 모순 아닙니까? 이율배반이잖아요.

저는 지금까지 적어도 양심적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실제는 모순투성이였던 것입니다.

괴로운 사람은 다 이리로 오라, 나는 그런 사람의 괴로움을 들어주는 사람이다라고 믿고 있었는데,

막상 그런 사람이 오니까 쫒아내기에 급급했다,

제가 얘기했던 게 다 거짓말이라는 게 그 사람을 통해서 밝혀진 겁니다.

어린아이들, 중고등학생, 대학생, 청년, 이런 사람들은 사실은 저 없어도 다 잘 삽니다.

그런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가지고 저 없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가르치고,

인생이 뭔지도 모르는 애들을 붙들어놓고 인생이 고다, 고의 원인이 뭐냐, 이렇게 매일 교리를 가르치고 그랬는데,

정작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왔을 때는 그냥 보내려고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나름대로 의지처가 있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가 큰 기둥이고 형제는 작은 기둥이고, 결혼하면 남편이나 아내가 큰 기둥이 됩니다.

저는 그런 기둥들을 다 없애버리고, 부처님이라는 큰 기둥을 만들어서 그걸 움켜쥐고 살며 자랑스러워하고,

부처님 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다른 스님들을 엄청나게 비판했습니다.

중들이 포교는 안하고 돈 갖고 흥청망청 쓴다고 비난하고 비판하고, 개혁한다고 하고 데모를 하고 그랬던 것입니다.

근데 지금 내 모습을 보니 그 사람들 보다 더한 모순을 갖고 있습니다.

혼자 청정한 척하고 혼자 정법을 하는 것처럼 하고 살았는데 알고 봤더니 모순투성이란 말입니다.

정작 부처님이 필요한 사람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문 밖으로 쫒아내려 했습니다.

불법은 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책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다 삶 속에 있다고 생활불교를 가르쳐 놓고는,

여기는 시내에서 애들 포교하는 곳이니 산에 가서 출가하라고, 도는 산속에 있는 것처럼 말했던 것입니다.

 

의지했던 큰 기둥이 무너져 버리니까 혼 빠진 사람처럼 멍해져 버렸습니다.

스스로가 무너져버리니까 아무 생각도 안 들어 절에 온다 간다 말도 안하고,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간 곳이, 남산 칠불암이었습니다.

그곳은 학생 때 제가 절에 들어와 열심히 기도하고 정진하고 참선했던 정신적인 고향같은 곳인데,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그리로 간 것이었습니다.

거기 칠불암 부처님 앞에서 턱 엎어져 쓰러져 버렸습니다.

한 삼일 쯤 지나서 정신이 들고 생각이 돌아오자 그 때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칠불암에 갈 때 마음속으로는 다시는 이 세상에 나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확연하게 깨닫기 전에는 이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된다,

그런데 삼일동안 있으면서 정신을 차리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제까지 십 년동안 정말 쓸 데 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위선으로라도 그 팜플렛을 뿌렸기에 그 거지를 만나 내게 모순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 아닌가,

내가 만약 산속에만 있었다면 나는 영원히 자신이 모순 속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냈을 것이다,

또 팜플렛을 안 뿌리고 그 거지를 만났다면 그런 대화를 하면서도 내가 모순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제가 그 때까지 한 것은 다 잘한다고 한 것이었지 거짓말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팜플렛을 보는 순간 마치 꿈 깨듯이, 이율배반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지난 십 년은 어떻게 보면 허송세월이지만 달리 보면 제가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시간이었습니다.

깨달아 지혜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이 참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자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동안 저는 자신이 굉장한 존재인줄 알았습니다.

나는 인생의 중요한 몇 가지를 포기하고 부처님 법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자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나를 그만큼 대우해줘야 된다,

당신들은 부처님 밥을 먹고 월급까지 받으면서 왜 제대로 안하느냐,

나는 내가 돈 벌어서 젊은 아이들 가르친다고 이렇게 애를 쓰는데,

당신들은 절에서 나오는 돈 가지고 왜 공부를 제대로 안 가르치느냐 이런 비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십 년동안 제가 헛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까,

그동안 비난하고 비판했던 스님들에 대한 미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출가했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게 살고 있다고 그 사람들만 비판을 했는데,

나도 미망에 사로잡혀서 마치 나만 바른 길을 가는 양 그렇게 해서 했구나,

포교라는 것도 내 지식의 욕구, 내 필요, 내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입한 것이었지,

정작 필요한 사람은 쫒아내기에 급급했다,

그들만 부처님 법을 안 따르고 그들의 생각대로 산 게 아니라 나 또한 부처님 법을 안 따르고 내 생각대로 살아왔다,

그렇게 생각이 돌아가면서 세상에 안 나오겠다는 결심을 바꾸고, 다시 내려와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그 전이나 후나 아무런 변화가 없이 보였겠지만 제 자신에게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때까지는 공부도 많이 하고 준비도 많이 해서 강의를 했기에 사람들은 잘 가르친다고 좋아했습니다.

또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과 개혁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불교도 개혁하고 사회도 개혁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우리 민족의 역사도 바로 잡아야 되고 친일잔재도 청산해야 하고 노동자와 농민들의 권익도 옹호되어야 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그런 활동하는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보면 기독교인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행동을 할 수 있게, 아귀가 딱딱 맞게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5장에 산자와 죽은 자를 일으켜 세워놓고 왕이 와서 심판을 할 때,

너희들은 영원히 지옥에 가거라, 너희들은 영원히 천당에 갈 거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왜 우리가 지옥에 가야됩니까?

너희들은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갇혔을 때 영접하지 않았다,

우리는 주께 그런 적도 없었고, 주께서 그랬다면 우리가 그렇게 안 했을 리도 없다,

그랬더니 이 세상의 가장 작은 자에게 안한 것이 곧 나에게 안한 것이다,

또 이 쪽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즉 천당 가느냐 지옥 가느냐의 기준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경제적으로 열악한 자,

신체적으로 열악한 자, 정신적으로 열악한 자를 어떻게 대하느냐이다,

교회 다닌다고 성경책 많이 읽는다고 천당 가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가는 것이다,

이런 것은 가난한 자를 돕고 어려운 자를 돕는데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성경에는 이런 기준이 있으니 이런 운동하기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불경을 읽으면 ‘중생이 중생이 아니요~~’ 이러니까 무슨 힘이 나겠어요?

그래서 불교는 마음 닦는 데는 좋은 점도 있지만 세상을 새롭게 하는 데는 뭔가 부족하다,

남한테 말은 안하지만 이런 불만이 있었습니다.

그동안은 어떤 경전을 봐도 추상적이기만 하고 구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게 없었는데,

이 이후로 경전을 읽으면 성경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무엇을 해야 할지 다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참회가 되겠습니까?

내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해놓고 공연히 경전만 나무라고 불교를 비판했다,

그 이후로는 단어를 모르면 사전을 찾을까 그러지 않고는 글자 이면에 숨겨져 있는 뜻까지 다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부처님 법을, 똑같은 경전을 그 전에 수도 없이 읽었는데도 무슨 말인지 모르거나, 알아도 내 깜냥대로 알았었는데,

그 사건 이후에 경전을 읽으면 그 속에 담겨 있는 무궁무진한 뜻이 다가온 겁니다.

‘중생이 중생이 아니요’, 중생이 중생이 아닐 바에야 구제할 바도 없다는 얘기 아니냐,

그럼 세상을 바꿀 필요도 없으니 기득권층의 입장을 옹호하는 교리 아니냐,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그 의미가 그런 게 아니었던 겁니다.

보살행을 하는 사람들이, 즉 세상을 위해서 세상을 장엄하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 남을 위해서 한다는 그런 생각을 갖고 하는 것은 안 된다,

그런 생각을 갖고 하면 결국은 아집의 소산이 된다, 이렇게 전혀 다른 식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들 나름대로 다 자기 생각을 갖고 세계를 봅니다.

각자 다 자기는 안경을 벗고 세계를 본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꿈속에 있으면서 그것이 다 현실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안경을 벗어봐야 이제까지 안경을 끼고 봤다는 것을 알게 되고,

꿈을 깨야 내가 꿈속에서 헤맸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힌 데서 벗어나야 내가 내 방식대로 아이를 보고 남편을 보고 세상을 봤구나,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고 타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준 것이냐를 알게 될 때,

거기에 참회의 눈물이 있고, 또 이제는 무엇인가 조금 알았다는 깨달음의 눈물, 기쁨의 눈물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참회의 눈물만 있고 깨달음의 눈물이 없으면 후회하는 것으로 가게 됩니다.

깨달음에 대한 기쁨이 있으면 울기는 우는데, 얼굴에 눈물이 줄줄 흐르는데 표정은 환하게 됩니다.

 

좋은 일을 할 때도 늘 자기를 돌아보고 참회를 해야 한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무엇인가 한다고 할 때는 저 같은 꼴이 나기 쉽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좋은 일을 할 때도 늘 자기를 돌아보고 경계하고 참회하면서 해야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상에 사로잡힐 수가 있습니다.

이 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 있는 대로 이치대로 실다이(있는 그대로) 본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堤 於意云何)          :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이신상 견여래부(可以身相 見如來不)     : 몸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불야 세존(不也 世尊)                         :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불가이신상 득견여래(不可以身相 得見如來) : 몸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하이고 여래소설신상(何以故 如來所說身相: 왜냐햐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 형상은

즉비신상(卽非身相)                           : 몸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고 수보리(佛告 須菩堤)                     :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에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곧 여래를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