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2강에서 계속)
이럴 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 처지를 생각하면 한국에 데려다 줘야 되겠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될까요?
한국 데려다 주면 우선은 해결이 된 것 같지만 그걸로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자기가 좋아지고 편안해지면 편안해질수록 가슴 한 쪽 구석에는 자식에 대한 원망이 더욱더 깊어집니다.
미워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식이 그리워집니다.
밉기만 하면 안 봐버리면 간단하게 끝나는데, 여기에 애증이 붙어있다 이 말이요.
여러분들도 본인은 남편 욕을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남편 나쁘다 그러면 아니다라고 하고,
자식 문제 때문에 상담하러 와서도 우리 애가 착하긴 착해요 이런단 말이요.
이렇게 애증이 겸해있다, 애가 있으면 증이 있고 증이 있으면 애가 겹쳐있습니다.
일시적으로는 이것이 소원이지만 이것은 고를 근원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아니고,
어쩌면 인생의 괴로움을 더 키워놓을 수 있는 소지가 있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은 이것이었지만 이분이 진정으로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이 뭘까 이걸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법륜 : 보살님, 금강경에 무주상보시라는 말이 있는데 무주상보시가 뭡니까?
보살 : 무주상보시란 보시를 하고도 안했다, 이렇게 보시한 것을 잊어버리는 겁니다.
법륜 : 보살님이 그렇게 공부를 하니까 절에 이렇게 다녀도 안 되지요.
무주상보시란 보시를 하고 보시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게 아닙니다.
자기 이름 안 밝히고 내는 것이 무주상보시다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자기 이름 밝히고 싶은데 안 밝히면 복이 더 많다니까 이름 안 밝히는 사람도 많습니다.
무주상보시란 바라는 마음이 없이 행하는 보시를 말합니다.
이 보살은 자식을 키우면서 자식에게 바랬기 때문에 미움과 원망이 생긴 겁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나 무주상보시를 읽으면서도 실제로는 무주상보시를 안했기 때문에 이런 괴로움이 생긴 겁니다.
법륜 : 보살님은 아이들 키우면서 바라는 마음으로 키웠던 겁니다.
보살 : 아니요, 맹세코 애들 키울 때 하나도 바라는 게 없었습니다.
법륜 : 보살님이 바라는 게 없었다면 이렇게 미워할 일도 없습니다.
보살님은 주식 사거나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처럼 자식에게 투자를 했던 것입니다.
근데 주식 값 떨어지고 부동산 값 하락하듯이 자식에게 투자한 것이 내 마음대로 안된 것과 같아요.
그건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바로 보살님 자신의 책임입니다.
보살 : (이렇게 몇 시간 얘기했더니) 그럼, 이 괴로움은 내가 바라는 마음 때문에 생겼다 치더라도, 자식 놈은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법륜 : 보살님, 지나가는 사람 미워합니까, 안합니까?
보살 : 지나가는 사람을 내가 왜 미워합니까?
법륜 : 아들은 지나가는 사람보다 보살님께 더 잘해줍니까, 더 못해줍니까?
보살 : 아들이 지나가는 사람보다는 더 잘해주지요.
법륜 : 근데 왜 미워합니까?
아무 것도 안 해주는 남은 미워하지 않으면서 그보다 더 잘해주는 내 자식은 왜 미워합니까?
보살 : 그걸 몰라서 물어요? 그건 내 자식이잖아요.
법륜 : 그러면 앞으로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앞으로는 자식을 남으로 생각하세요.
남이라면 안 미워할 것 아닙니까? 앞으로 밉거든 ‘저놈의 새끼 남이다’ 이래 부르세요.
이렇게 몇 시간 이야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 다음날은 이 보살이 안 오는 겁니다.
절에도 오지도 마라, 관세음보살도 부르지 마라고 했더니 이 보살이 내 말을 진짜로 알아 들었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며칠이 지나도 안 오니 절에 사는 사람들이 궁금해합니다.
근데 누구도 그 보살 집에 전화해서 왜 안 오느냐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 이 보살이 절에 와서 청소를 했으면 왜 안 오시냐고 전화해서 물었을 겁니다.
이 보살이 부엌에 와서 밥을 했다면 밥할 사람이 안 오니까 전화해서 물었을 겁니다.
근데 이 보살은 절에 와서 금강경 독송하고 기도만 하니까 옆에서 들으면 시끄럽기만 했던거지요.
청소도 안 거들고 밥도 안하고 설거지도 안하고 독송만 했으니,
훌륭하다 신심이 있다 기도 잘한다고 말은 하지만 이 보살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 처음에는 이야기했지만 나중에는 대화에서 빠져버렸고, 저도 처음에는 걱정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한 달 정도 지났는데, 아침에 벨이 울려 문을 열어보니 이 보살이 서있습니다.
근데 얼굴이 환해져 있습니다.
법륜 : 매일 오시던 분이 그동안에 절에도 안 나오셔서 궁금했는데, 웬일이세요?
보살 : 아니, 부처님이 절에만 있어요?
법륜 : 어, 보살님 도 트인 소리하네!
보살 : 아, 내가 한 소식 했어요.
법륜 : 그래요? 들어오세요. 한 소식 한 얘기 좀 들어봅시다.
스님하고 이야기 한 뒤에 집에 가면서 분해 죽을 뻔 했다,
괜히 젊은 사람한테 얘기를 꺼내가지고, 동정을 받고 위로를 받기는커녕,
제 발등 제가 찍었다, 제 손가락 갖고 제 눈 찔렀다,
증권투자 했다가 실패하듯이 애한테 투자를 했다가 실패를 했다,
부처님 부르지 마라, 저놈의 새끼 남이다 그래라,
자기가 생각할 때는 온갖 못 들을 얘기만 들었으니 부아가 나서 죽을 뻔 했다,
다음 날 절에 오고는 싶었지만 그 이야기가 다 퍼졌을까 싶어 창피해서 오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집에 있으려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이렇게 보름쯤 지나니 완전히 미칠 지경이 되었다,
하도 괴로우니까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저놈의 새끼 남이다’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더라,
이렇게 혼자서 죽지도 못하고 사는데, 어느 날 자식이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저놈의 새끼 남이다’ 하고 쳐다보니까 자기 아들이 아니고 진짜 딴 사람이 서있더라,
딴 사람이 서있는 것을 보는 순간 가슴 속에 끓어오르던 모든 화가 순식간에 없어져 버리더라,
자식이 정말 남으로 보이는 순간 화가 가라앉고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이 쏟아지더라,
내 자식이라는 생각이 없어지고 남이라 생각하니 자식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더라,
남인데 누가 매일 차 태워다 주고 밥 주고 방 내주고 어머니라 깍듯이 예우를 하겠느냐,
그렇게 생각이 바뀌자 모든 것이 고맙게 느껴지더라,
그래서 밥 먹고 나면 설거지도 맡아서 하고, 다 나가고 없으면 방청소도 하고,
즈그들끼리 속닥속닥 얘기하면 멀리 피해주고, 그래도 가슴속에 고마움만 가득하더라.
얘기를 들어보니까 한 소식 하기는 했습니다.
그 후에 이 보살님은 절에 오면 기도하는 시간보다는 설거지하는 시간이 더 많아요,
지금까지는 자식이 있으니 공양주도 못했는데, 이제는 자식이 없으니 공양주 마음껏 할 수가 있지요,
저부터도 보살님 있으면 편하니, ‘보살님 집에 가면 뭐해, 절에 사세요’ 이럽니다.
큰 아들도 어머니가 집에 있으면 뭘 해주어도 하나 해주니까 집에 계시라고 그러고,
작은 아들도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집에 오기를 원합니다.
전에는 절에서도 안 왔으면, 작은아들은 큰 집에 갔으면, 큰아들 집에서는 작은아들 집에 갔으면,
본인도 싫어서 큰아들 집에 조금 있다, 작은 아들 집에 조금 있다, 절에 왔다가,
왔다가 갔다가 본인도 떠돌고 사람들도 귀찮게 여겼는데,
한 생각이 바뀌니 본인도 큰아들 집에 있던 작은 아들 집에 있던 절에 있던 자유롭고,
다른 사람들도 서로 오라고 난리인겁니다.
이 보살은 자유로워졌습니다.
이게 바로 무주상보시의 공덕입니다.
이 공덕을 다른 어떤 공덕하고 비교해서 말할 수 있겠어요? 비교해서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내 자식이다 하면 좋은 줄 알았지만, 내 자식 아닌 줄 아는 게 해탈의 길입니다.
아는 순간 바로 그 자리에서 어디에도 걸림이 없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바뀌면 모든 게 다 좋아집니다.
이 보살이 걸었던 길은 누구나 다 갈수가 있습니다.
무슨 지식으로 간 것도 아니고, 참선을 해서 간 것도 아니고, 염불을 해서 간 것도 아닙니다.
이 보살님의 가슴속에 있던 그 원망과 미움, 쌓인 업은 비교한다면 태산보다 더 컸겠지요,
이걸 하나하나 없앤다고 하면 다생겁래로 없애도 다 없애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순간에 다 없애버립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법이 위대한 겁니다.
산을 하나 옮긴 게 기적이 아니라, 보살 속에 있는 무거운 업장이 일순간에 없어지는 게 바로 기적입니다.
부처님 법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 전에 와서 아들 버릇 고쳐 달라, 며느리 버릇 고쳐 달라 하는 건 내 신세 한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근데 여러분들은 기도하고서도 안 되면 공연히 부처님만 원망합니다.
자기 자식 원망하고 남편 원망하고 부모 원망하고, 제 뜻대로 안된다고 부처님 원망하고,
절에 다녀봐야 소용없다, 경 읽으면 뭐 하냐, 참선하면 뭐 하냐 이런 소리나 합니다.
그러나 한 생각이 바뀌면 그 공덕이 한량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부처님 법은 성인이 하는 것이지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이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부처님 법은 고통받는 중생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 특별한 사람을 위해서 설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 집착하지 않는 미묘한 행
부차 수보리(復次 須菩堤) : 또한 수보리여!
보살 어법 응무소주 행어보시(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 보살이 저 법에 머문바 없이 보시를 행할지니
소위부주색보시(所謂 不住色布施) : 이른바 색에 머문바 없이 보시를 하며
부주성향미촉법보시(不住聲香味觸法布施) :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법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느니라
수보리 보살 응여시보시(須菩堤, 菩薩 應如是布施) :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보시를 하되
부주어상(不住於相) : 상에 머물지 않는다
하이고 약보살 부주상보시(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 왜냐하면 만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기복덕 불가사량(其福德 不可思量) : 그 복덕이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堤 於意云何) :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방허공 가사량부(東方虛空 可思量不) :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불야 세존(佛也 世尊) :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 남서북방 사유(須菩堤 南西北方 四維) :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그 사이,
상하허공 가사량부(上下虛空 可思量不) : 상하 허공을 가히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불야 세존(佛也 世尊) :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복덕(須菩堤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 수보리여!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역부여시 불가사량(亦復如是 不可思量) :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須菩堤, 菩薩 但應如所敎住) : 수보리여! 보살은 응당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지니라.
'법륜스님의 법문 > 5. 금강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5-2 여리실견분 (0) | 2017.11.24 |
---|---|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5-1 여리실견분 (0) | 2017.11.22 |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4-2 묘행무주분 (0) | 2017.11.20 |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4-1 묘행무주분 (0) | 2017.11.17 |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3-6 대승정종분 (0) | 2017.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