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5. 금강경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3-6 대승정종분

상원통사 2017. 11. 16. 17:40

(~~ 제3-5강에서 계속)

 

 

중생상(衆生相) : 생명을 가진 것만 중요하다는 생각

우리는 요즘 겨우 눈을 떠가지고 생명, 생명 가치관 이런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생명이란 말에는 물이나 공기나 흙이나 돌맹이는 빠집니다.

동물이니 식물이니 하는 생명이라고 하는 울타리를 쳐놓고 그 밖의 것은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산을 까부시고 물을 더럽히다가 그 물속에 사는 생명이 죽으면 문제지 물 자체는 문제로 삼지 않습니다.

이게 중생상입니다.

생명가진 것은 중요하고 생명 갖지 않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사실은 생명가진 것들과 생명 갖지 않은 것들은 분리 될 수가 없습니다.

이 수많은 생명은 다 생명 아닌 것이라고 분류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환경문제는 바로 이 생명을 중심에 놓고 생명 없는 것들을 파괴하는데서 생긴 것입니다.

중생상이란 소나 개는 울타리 안에 들어올 수 있지만 돌맹이는 안 들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환경파괴는 다 이런 중생의 무지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수자상(壽者相) : 존재하는 것만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

수자상이라는 것은 돌맹이나 물처럼 존재하는 것들 그 자체를 중심으로 해서 사고하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성주괴공하고 생로병사합니다.

모든 것은 생기면 반드시 사라진다는 것은 존재를 중심으로 해서 관찰한 것입니다.

존재라는 것은 육근을 통해서 인식이 되는 것을 중심으로 합니다.

인식을 중심으로 하기에 유무, 있고 없음이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참모습은 있고 없는 것을 떠나 있습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인식이 되면 있다고 하고 인식이 안 되면 없다고 합니다.

어떤 하나의 형상이 우리 눈에 인식이 되었다가 안되는 것을, 있다 없다라 하고 생기고 사라졌다라고 합니다.

 

수자상까지 없어져버리면 존재 비존재의 논쟁이 사라지니까 여기는 생멸도 없는 세계고 유무도 없는 세계입니다.

거기가 완전한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범위를 적게 하든 많이 하든 경계를 친다는 것은 상을 짓는 것입니다.

상을 짓게 되면 그것은 반드시 허물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보살이 상(모양)을 짓게 되면 곧 보살이 아니다,

굳이 네 가지로 나눌 필요가 없이 어떤 상이든 갖게 되면 그것은 보살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사상(四相)이라는 것을 공부하다보니까 이것이 마치 주요한 과제 같지만,

정종분에서의 요지는 이 상을 설명하는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고 그렇게 실천하는 게 첫째이고,

그럴 때 내가 너를 구제한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이것은 해탈의 길에서 멀어지게 된다,

‘내가’ 하면 벌써 아상이 생기고, ‘너를’ 하면 인상이 생기고, ‘중생을 구제한다’ 이러면 중생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상이 없다 하는 것은 일체가 나와 한 몸이 되는 것 입니다.

부인과 자식과 부모만 분리되지 않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도 분리가 안 됩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동물과 식물도 다 연관 맺어져 있고,

생물만이 아니라 무생물이라고 이름짓는 것까지도 다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괜히 선을 그어서 이쪽은 생물 저쪽은 무생물, 이쪽은 사람 저쪽은 동물,

이쪽은 나 저쪽은 너, 그런 것이지 존재 자체는 금을 그을 수가 없습니다

 

존재 자체는 상을 지을 수 없다

편의상 우리가 그렇게 이름 부를 수는 있지만 상을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존재 비존재도 둘로 나눠진 것이 아닙니다.

일체의 세계는 다만 그렇게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존재 비존재를 떠나서 다만 존재하고 있고, 그런 것들은 다 그 모양으로 완전한 겁니다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는 것은 떨어지는 대로 완전한 모습이고, 싹이 돋는 것은 싹이 돋는 대로 완전한 모습입니다.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은 그것대로 완전한 모습에 속하는 것인데,

우리는 분별을 일으켜 이것들을 분리해서 하나하나의 생명을 별개로 보니까 갖가지 갈등이 생기는겁니다.

원효대사도 처음에는 중생이라 상을 지어놓고 중생을 구제한다고 애썼습니다.

본래 중생이 아닌 줄을 알게 되면 구제할 것도 없게 됩니다.

구제할 게 없다는 것을 아무 것도 안하고 놀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또 놀아야 된다는 상을 지으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거다 저건 네거다 하고 상을 지으니까 내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니다 이렇게 상이 딱 떨어지면 다 줘버려야 되느냐,

이건 주고 안주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필요에 의해서 그냥 쓰여질 뿐입니다.

이 세계는 인연을 따라서 그렇게 움직이는 겁니다.

 

경전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나라에 임금이 정치를 잘 해서 백성들도 잘 살았습니다.

그 임금에게는 공주가 하나 있는데 어느 날 임금이 공주에게 물었습니다.

임금 : 네가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누구 덕이라 생각하느냐

공주 : 제 덕입니다.

또 물어도 똑같은 대답입니다.

화가 난 임금은 공주를 성 밖으로 쫒아내 지나가는 거지와 부부인연을 맺게 했습니다.

당시의 윤리 도덕으로는 귀족 옷깃에 손만 닿아도 천민은 죽을 수도 있었으니 거지는 한사코 공주와 부부되기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공주는 부부가 되지 않으면 왕명을 거스르는 것이 된다, 왕명을 거스르면 죽게 된다,

나는 쫒겨났으니 지금은 더 이상 공주가 아니라 당신과 같은 계급이다 라고 설득합니다.

거지는 할 수 없이 일단 형식적인 부부가 되어 살자고 타협하여 공주와 부부가 됩니다.

공주는 거지를 남편으로 깎듯이 대하고 살면서 하루는 고향이 어딘지 물었습니다.

거지는 처음엔 잘 모른다 했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어렴풋이 기억이 났습니다.

거지는 공주와 함께 고향을 찾아가서 동네사람에게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으니,

이 동네에 큰 부잣집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강도떼가 들이닥쳐서,

재물을 약탈하고 집은 불질러버리고 가족들도 다 죽였는데 아들이 하나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아들은 객지를 떠돌아다녔는데 그가 바로 지금의 거지인 것입니다.

거지와 함께 폐허가 된 집터를 둘러보던 공주는 한 곳을 파보라고 합니다.

그곳은 바로 예전의 창고자리였는데 거기에서 엄청나게 많은 보물들이 묻혀있었습니다.

한편 임금은 딸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소식이 궁금해 사람을 시켜서 찾아보라고 합니다.

다녀온 사람은 대궐같은 집을 짓고 잘 살고 있다고 하니 왕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직접 찾아갑니다.

와서 보니 그 말은 사실이었기에 왕은 공주에게 자기가 잘못 생각했었다고, 이게 다 네 복인데 내 복이라 착각을 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거지는 바로 중생에 대한 비유이고, 공주는 보살에 대한 비유입니다.

거지는 비록 행색은 누추하지만 물려받은 보물이 땅속에 묻혀있는 부자라는 것인데,

중생이 지금은 중생 노릇을 하고 있지만 본래는 부처다 이런 말입니다.

보살은 중생을 부처로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중생이 본래 모습을 찾아내도록 도와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한 생각 어리석은 데 사로잡혀서 지금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지만,

꿈 깨듯이 깨고 나면 다 그대로 부처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부처는 부처인데 지금 부처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중생이라는 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공주가 거지에게 자기와 평등하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거지가 안 듣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는 거지다 하는 상에 사로잡혀서, 부처님께서 오셔서 너희들이 다 그대로 부처다 해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거지로서 밥 한 끼 얻어먹는 게 중요하지 자기 본래 재산 찾으려는 생각은 없다 이 말입니다.

그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괜히 찾다나섰다가 굶어 죽으면 어떡하나 그 걱정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지 노릇을 오래 하다보면 자기가 본래 거지인줄 알고 그저 밥 한 끼 얻어먹는 게 인생의 목표가 됩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지지고 볶고 의식주에만 사로잡혀서 사는 것은,

거지가 밥 한 끼 얻어먹는 것으로 행복을 삼고 사는 것과 같다 이겁니다.

며칠 밥 얻어먹으러 못 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보물을 찾아내야 됩니다.

 

상에 관계되는 얘기니까 한 가지만 더 하겠습니다.

옛날에 어느 큰 스님이 도를 이루시니 모든 사람들이 다 존경하고 스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큰 스님이라는 형상에 집착하여 자꾸 몰려들자 큰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제자들이 스승을 찾아 온 천하를 다녀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 제자 중의 한 사람이 강을 건너는데 뱃사공이 어디서 본 사람 같았습니다.

처음엔 생각도 못하다가 배에서 내릴 즈음에야 그가 스승이라는 것을 알아봤습니다.

제자는 스승께 절로 돌아가자고 권하면서 다시 보니까 스승의 머리를 기르고 있습니다.

순간 제자는 스승이 파계하고 속인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합니다.

제자 : 스승님, 머리는 왜 기르셨습니까?

스승 : 도가 머리털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우리는 상에 집착합니다.

우리 스승은 이런 모습이다 하는 생각을 갖고 스승을 찾으면 찾을 수가 없습니다.

또 스승을 찾았을 지라도 상을 갖고 논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게 고승이고 어떤 게 도사다, 이렇게 상을 갖고 있습니다.

먹는 걸 기준으로 삼든지, 자는 걸 기준으로 삼든지, 옷을 기준으로 삼든지,

이렇게 기준을 삼아 그 안에 들어오면 괜찮은 스님이고 그 밖에 나가면 안 된다, 이렇게 상을 갖고 있습니다.

 

상이라고 하는 것은 꼭 어떤 글자 속에 있는 것만도 아닙니다.

집에서 남편이 하는 말도 가만히 들어보면 스님이 하는 말하고 똑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 말만 들어보면 부처님 말씀과 똑같지만 남편 말이니 그것은 틀렸다 이렇게 생각하고,

스님이 하는 말은 무슨 말이든지 다 맞는 것 같이 생각하는데 이래서는 안됩니다.

상을 버려야 우리의 공부도 진척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스님 법문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을 지어도 안되고,

스님의 법문이라는 상을 지어서 그것만 옳고 딴 것은 다 틀렸다는 상을 지어도 안 됩니다.

무당집에 다니던 사람이 스님 법문 듣고 불법을 깨닫게 되자 깨달았다고 좋아하는 데,

잘못하면 깨달았다 하는 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정법이라는 상에 빠지면 무당집 같은 절에 다니는 시어머니와 그건 불법이 아니라고 다투게 되고,

교회 다니는 친구와는 어리석다고 다투게 됩니다.

이건 상을 여읜 게 아닙니다.

전에는 미신이니 샤마니즘이니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왜 저런 쓸데없는 짓을 하나 생각했는데,

상을 여읜 사람은 그게 옳다 그르다를 넘어서 그 사람이 그렇게 하는 심정을 이해하게 되니 그게 좋다 나쁘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해의 폭을 넓혀야 됩니다.

싸워서 이기고 지는 것으로 보면 안 됩니다.

꼭 이기려고 하니 법조문을 대고 윤리 도덕을 끌어들이고 스님 법문을 끌어들여 자기 주장이 옳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찌기 ‘진리란 윤리나 도덕이나 관습이나 습관이나 경전이나 문헌으로 검증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것을 다 내려놓고 봐야 합니다

우리는 상을 여읜다 하면서 상을 없애야 된다는 상에 빠져 다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상을 여읜다 하는 것은 모든 것들을 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입니다.

다른 종교도 있는 그대로 봐야 됩니다.

그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끌려가거나 경계를 지어서 폐쇄가 되는 것이고,

이기고 지는 관점에서 보게 되니 내가 괴롭고 남도 괴로운 겁니다.

 

여러분들 오늘부터 상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상이란 자기가 일으키는 한 생각으로 지은 것이고, 거기에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이걸 내려놓게 되면 이제부터는 그냥 볼 수가 있습니다.

남편이 화를 내면 ‘왜 화를 내나, 경전에 화를 내지 마라고 그랬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상대를 이해해야 됩니다.

상대를 이해하면 화내는 사람을 보고도 욕심내는 사람을 보고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됩니다.

 

우리는 같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불교의 형식이 필요하면 형식을 지키고 문화가 필요하면 문화를 지키고,

문화가 장애가 되면 문화를 버리고 형식이 장애가 되면 형식도 버리고,

오직 밝은 깨달음의 지혜로 나아가야 됩니다.

중생 안에는 기독교인도 포함되고, 굿하는 무당도 포함이 되고 살인하고 감옥에 있는 사람도 포함이 되고,

북한 사람도 포함이 되고 일본 사람도 포함이 됩니다.

일단 사고를 크게 가지셔야 됩니다.

인연을 따라서 순간순간 옳고 그름이 생기는 것이지 영원히 옳은 것도 아닙니다.

일본 사람을 비판해야 될 때도 있지만, 의견을 수용해 줘야 될 때도 있고 함께 가야 할 일도 있습니다.

과거에 대해서 너무 집착하면 현재와 미래가 다치게 되지만,

과거를 잊어버리고 아무 것도 없듯이 하면 미래에 대해서 여러 가지 실수를 하게 됩니다.

한일관계도 옛날 과거의 역사는 역사대로 알되 상처는 치유를 해야 됩니다.

상처를 가지고 대응을 하면 친구가 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하는 지도 잘 알아야 됩니다.

과거에 그랬다 하더라도 앞으로 변할 수가 있으니, 늘 열린 마음으로 지켜보고 함께 가야 됩니다.

그 사람들이 자기 한계를 못 벗어나는 것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내서 도와줘야지,

시비하는 기독교인들 하나하나 대응하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닮아가서 나중에는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을 하게 됩니다.

북한이 어떻게 하든 우리가 좀 더 넓은 입장에서 대응해야지, 하나하나에 대응하다보면 우리도 모르게 같은 방식으로 닮아가게 됩니다.

그걸 우리가 잘 살펴야 됩니다.

수행하는 개인의 삶은 수행 그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사회, 우리 민족, 인류의 문제에도 다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 대승의 가장 바르고 으뜸되는 사상

불고 수보리(不告 須菩堤)                     :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하되

제보살 마하살(諸菩薩 摩訶薩)              : 모든 보살 마하살이

응여시 항복기심(應如是 降伏其心)           :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항복 받아라

소유일체 중생지류(所有一切 衆生之類)      : 있는바 일체 중생의 무리를

약난생 약태생(若卵生 若胎生)              : 알로 태어난 것이나 태로 태어난 것이나

약습생 약화생(若濕生 若化生)              : 습으로 태어난 것이나 화로 태어난 것이나

약유색 약무색(若有色 若無色)              : 형상이 있는 것이나 형상이 없는 것이거나

약유상 약무상(若有想 若無想)              : 정신이 있는 것이거나 없는 것이거나

약비유상 비무상(若非有想 非無想)           : 생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것

아개영입 무여열반(我皆令入 無餘 涅槃)     : 모든 중생을 내가 모두 무여열반에 들게 한다

이멸도지(而滅度之)                           : 모든 사람의 괴로움을 다 해결했다.

여시멸도 무량무수 무변중생(如是滅度 無量無數 無邊衆生) : 이와같이 한량이 없고 헤아릴 수 없고 그 끝이 없는 중생을 다 구제했는데

실무중생 득멸도자(實無衆生 得度者)      : 사실은 멸도를 얻은 자가 없다

하이고 수보리(何以故 須菩堤)              : 왜냐하면 수보리야

약보살 유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 만약에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즉비보살(卽非菩薩)                           : 보살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