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5. 금강경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3-3 대승정종분

상원통사 2017. 11. 12. 19:48

(~~ 제3-2강에서 계속)


 

남편이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는 것을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술을 먹으면 건강에 나쁘고, 돈 버리고, 실수를 하게 되는데도 먹고 들어옵니다.

안 먹으면 좋을텐데 왜 백해무익한 행동만 할까, 이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가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면 안 될수록 더욱더 부아가 커지고, 그럴수록 내 괴로움은 커집니다.

이해가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 들수록 나는 점점 성인에 가까워지고 남편은 점점 더 마귀에 가까워지는데, 내가 더 괴로워집니다.

나는 100% 옳고 그는 100% 틀렸다고 할수록 내가 점점 지옥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내가 옳을수록 내가 지옥에 떨어지고 있으니 나를 구제해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느냐’는 말은 ‘어떻게 하면 어리석은 남편을 고치느냐’ 이 말입니다.

 

무슨 비법이 없을까, 돈 100만원 바칠테니 부처님 비방 하나 일러주세요,

49재를 지낼까요, 천도재를 지낼까요, 스님 시키는 대로 뭐든지 다 할께요.

이래서 비방이 나오고 부적이 나오고 벼락맞은 대추나무가 나오고 조상탓이 나오지만 정작 해결은 안됩니다.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남편을 구제해야 합니다.

남편을 구제하려면 맨 먼저 남편을 이해해야 합니다.

왜 술 먹을까? 남편의 어린 시절도 살펴보고, 회사 일, 친구사이도 가만히 살펴봅니다.

살펴보니까 어릴 때 시골에서 자라면서 부모에게 사랑을 못 받았다,

시부모가 맨날 싸우고 그런 속에서 외롭게 자랐고 사랑도 못 받고 구박받고 자랐다, 그래서 늘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하다,

또 학교 다닐 때도 친구들하고 잘 못 어울리고 늘 그렇게 외롭게 자랐다,

결혼을 해도 마음 한 구석이 외롭고 가슴이 늘 허전하니까 부인과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부인은 늘 자기 요구, 돈 문제, 애들 문제, 자기 생활문제로 불평불만만 합니다.

연애할 때나 신혼 초에는 자기 허전함이 채워졌는데 지금은 안 채워지니까 부인하고는 얘기할 게 없다,

거기다가 자꾸 신경질 내고 하니까 늦게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니 바깥으로 맴돌게 되고 술을 먹게 되고, 술을 먹다 보니 술 먹는 습관이 들게 된다,

이런 데에 그의 방황과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아내가 이런 남편을 볼 때는 이해할 수 없지만, 엄마가 이런 자식을 볼 때는 너무 가슴이 아픈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엄마가 아들을 보듯 그렇게 하는 것이 남편을 보살피고 구제하는 겁니다.

‘보살의 길’이라는 것은 늦게 들어와도 그만한 이유가 있겠거니하고 이해하는 겁니다.

일찍 들어와 나한테 잔소리 듣는 것보다 늦게 들어오는 게 약이고,

나하고 이야기하다 싸우는 것보다는 술 먹고 늦게 오는 것이 약이겠구나,

술 한 잔 먹고 늦게 들어오는 게 그 사람한테도 좋고 나한테도 좋은 일이니,

술을 많이 먹고 온 날은 술국 좀 끓여주고, 적당하게 먹고 온 날은 적당히 하고 재우고,

적게 먹고 온 날은 눈치 봐서 한 상 차려 더 먹이자 이렇게 마음을 냅니다.

이렇게 하면 그날 밤 내 마음도 괴롭지 않고, 남편에게도 좋은 일이 됩니다,

이렇게 얼마를 지나면 남편은 아내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없어질 것이고,

술을 덜 먹게 되고 덜 싸우게 되어 문제가 해결되는 쪽으로 조금씩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게 수행이고 이렇게 하는 게 기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음이 뒤집어져 잘 안되니 시간을 정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남편이 보살입니다. 남편의 아픈 마음을 제가 잘 이해하겠습니다,

이게 다 제 지은 업입니다, 제가 전생에 진 빚을 이생에 갚으러 왔습니다.’

이렇게 매일 엎드려 절을 하게 되면 어제 저녁에 한바탕 싸웠더라도 다시 마음이 원래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렇게 위험한 고비들을 넘기는 것 그 자체가 기도입니다.

 

술 먹고 늦게 들어오고 여자들 집적거리는 남편과 하루도 못살 것 같더니,

이렇게 마음을 내면 그런 현실을 두고라도 편안해집니다.

‘스님, 그걸 어떻게 해요?’ 보통은 이렇게 말하겠지만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은 술 먹고 길거리에서 행패피우고 쓰러져 자는 유랑민들을 모아 따뜻이 감싸기도 하고,

내 자식도 아닌 정신박약아들을 모아가지고 보살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피붙이도 아닌 사람을, 그것도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모아서 보살피는 사람도 있는데,

여러 명도 아니고 한 명, 남도 아니고 내 남편인데 그걸 왜 못하나,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쉬운 일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먹으면 그냥 놔두고도 금방 내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할수록 내가 지옥에 간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생각이 서로 다른 것이구나 라고 받아들이면 내가 인간계에 사는 것이고,

내가 어리석어서 생각을 잘못했구나, 당신이 옳습니다, 이렇게 내면 난 이미 천상에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에 와서 법문 듣는 이 순간에는 다 잘 될 것 같지만 막상 집에 가면 또 안됩니다.

왜 그럴까요? 법당에서는 마음을 내려놓고 집에 가서는 다시 자기 식으로 잡으니까 안 되는 겁니다.

 

그런 남편이지만 영원히 사랑하고 살아라,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해탈하고 싶다’ 하니까, ‘어떻게 해야 내가 해탈할 수 있느냐’ 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눈앞에서 괴롭다고 하는 여러분을 위해서 일러주는 얘기지, 집에 있는 남편을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첫째 여러분들이 좋아지고, 시간이 조금 경과되면 남편 생활태도도 조금씩 바뀝니다

 

남편이 변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은 기적이 일어난 것 같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열심히 기도하지만, 조금 지나면 괴로움이 또 시작이 됩니다.

왜 그럴까? 남편이 변하는 것을 보고 좋아한다는 것은 또 원래로 돌아갔다는 얘기입니다.

처음에는 남편을 바꾸려고 하다가 안 바꿔져서 괴로웠는데,

이제 상대가 바뀌는 것을 보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중생심에 의한 기쁨인 것입니다.

내가 조금만 더 열심히 기도하면 더 빨리 변하겠다 이런 생각으로 기도를 하는 것은

처음에 왔을 때 기도하는 심보로 돌아가 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기도를 안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중생의 구제를 마쳤다 하더라도 내가 중생을 구제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내가 이렇게 하니 남편이 저렇게 변하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다시 기대를 걸게 되고,

그 기대를 성취시키기 위해서 더 열심히 하게 되면 바라는 마음이 더 커지는데,

그걸 못 따라오는 남편을 보면 실망을 하게 되어 마음에서 또 분별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또 상대를 탓하게 됩니다.

 

이렇게 두 번째 고비가 찾아오는 데 이 고비를 넘기기가 참 힘듭니다.

첫 번째 고비는 어지간히 공부하면 넘길 수 있는데 이 두 번째 고비에 딱 걸립니다.

선방에서 공부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세상이 훤하게 보이고 업식이 맑아지면서 상대의 전생도 보이는 것 같고,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너는 공부 다 했다’ 이러면 원래 속에 있던 자기의 그 욕구,

잘나고 싶어하는 것과 딱 결합을 해서 ‘나는 깨달았다. 내가 부처다’ 이렇게 됩니다.

이런 잠꼬대같은 병은 정말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일체 중생을 구제한다, 이게 보살의 첫 출발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내어 모든 중생을 구제했을 지라도 내가 중생을 구제했다 이런 생각을 가지면 안됩니다.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는 것이고,

그런 생각을 가지면 곧 다시 괴로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내고, 그렇게 행동하게 되면 나의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상대편이 좋아지는 것이 보이지만, 내가 잘해서 상대방이 좋아졌다는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저 사람도 수행을 해서 자기 인생을 변화시켜 나가니 고맙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상대가 변하는 것을 보고 오직 감사하는 마음만 내야 하는데,

내 덕이다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움의 씨앗이 생겨서 또 괴로움의 과보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 즉 해탈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설명드리겠습니다.

오늘 배운 것은 집에 가셔서 다시 공부하십시오.

알면 믿음이 생기는 것이고,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고 또 행해야 합니다.

    


 (제3-4강에 계속 ~~)